시편 9편과 10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시편이다. 두개의 시편이 알파벳 순서로 연결되어있다. 라틴 벌게이트 역이나 일부 히브리어 사본들도 하나로 취급한다. 하지만 현재 히브리어 원문에는 둘로 나뉘어 있다. 9편과 10편은 서로 다른 내용처럼 보인다. 9편은 개인적인 감사의 찬양이 담겨있는 반면에 10편은 개인적인 애가가 담겨있기 때문에 후대에 둘로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슬픔과 고난 가운데에서 과거에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앞으로도 구원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기에 하나로 연결해서 보아야 한다.
먼저 과거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 기억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는 내용이 1-12절에 나온다. 그 중에 1-2절은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찬양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그 은혜의 자리에서 찬양을 드린 것이 아니다. 현재는 말할 수 없는 현재는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지만 과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들을 회상하면서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먼저 1절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고난 중에 있지만 온 마음을 다해서 감사를 드리겠다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드리는 감사는 음악으로 말하면 “점점 세게” 를 나타내는 크레센도이다. 첫째로 “주의 모든 기이한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라고 했다. 여기서 전파한다는 말은 무리들 앞에서 하나씩 큰소리로 손꼽아 세어보며 말하겠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출애굽 사건과 그 밖의 수많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손꼽아 세듯 나열한 것과 같은 것이다.
2절의 “주를 기뻐하고” 구약성경에서 최상품의 포도주나 기름과 향 같은 것들을 보고 좋아할 때 썼다. 또 현명한 아들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날 때의 기쁨을 묘사할 때도 쓰인 말이다. 이 말이 주님과 함께 쓰일 때에는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공의를 기뻐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할 때 썼다. 계속해서 주를 기뻐한다는 뜻이다. 1절에서 시편 기록자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하나씩 꼽아 전할 때 듣고 있던 사람들의 주를 향한 기쁨이 계속 가득차게 된 것이다.
이어서 ‘즐거워하며’ 라고 했다. 이는 모두 함께 계속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잠언 28:12절에서 “의인이 득의하면” 이라는 말에서 “득의하면” 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원래는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모두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전쟁터에서 승리한 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전쟁에서 졌더라면 자신들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까지도 다 죽거나 노예로 잡혀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기쁨은 자기가 응원하는 미식축구팀이 수퍼볼에서 우승한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모두가 계속 기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모두가 승리의 기쁨으로 즐거워한 후에 세번째 나온 말은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라는 말이다. 찬송한다는 말은 악기로 연주하며 즐겁게 노래한다는 뜻이다. 기쁨에서 즐거움으로 상승된 분위기가 웅장한 악기 소리와 함께 모두의 합창으로 울려 퍼지며 그 기쁨은 최고 절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 노래는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노래이다.
하지만 이처럼 고조된 분위기와는 달리 실제 현실은 고통 중에 있다. 하지만 과거 자신들을 위해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함께 회상하고 고통 중에서 온 마음 다해 함께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이 찬양의 근거는 현재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이다. 하지만 현재의 소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이어서 3절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멸망시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현재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하며 극적인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먼저 3절에서 “원수들이 물러갈 때의에” 라는 말은 새번역처럼 원수들이 뒤돌아선다는 뜻이다. 이는 무술영화나 전쟁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다. 원수들이 시편 기록자를 죽이려고 달려들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 정신없이 도망간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주앞에서 넘어져” 라는 말은 하나님의 화살이나 칼을 맞고 비틀비틀 몇발짝 걷다가 고꾸라지는 모습을 그린 그림 언어이다. 이어서 “망함이니이다” 는 쓰러져 죽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 앞에서” 쓰러져 죽은 것이기에 몇발짝도 못 떼고 바로 고꾸라져 죽는 모습이다. 또 자신이 그렇게 물리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신은 단지 하나님께 피하며 부르짖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을 확신하는 것 뿐이다. 시편 기록자의 실제 상황은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죽을 위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4절부터 8절까지는 재판하는 그림이다. 하나님은 재판관으로 등장한다. 시편 기록자는 이유없이 공격을 받고 불의한 자로 취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재판과 소송을 준비하셔서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4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악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게 되는 이유이다. 주님께서는 시편 기록자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재판을 준비하시고 친히 그 소송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검사가 되셔서 악인들의 죄를 조사하시고 또 시편 기록자의 편에서 변호하는 변호사도 되시는 것이다. 그런데 또 “보좌에 앉으사” 라고 했기 때문에 판사까지 되신 것이다. 이 재판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담당하시고 시편 기록자를 보호하시며 악인들은 벌하시는 공정한 재판을 내리신다는 것이다.
5절은 재판의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먼저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을 심하게 나무라시면서 중형을 선고하는 모습이다. 그 다음에는 “악인들을 멸하시며” 라고 했다. 악인들에게는 사형판결을 내리시고 군사법정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사형집행까지 다 끝내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멈추시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까지 영원히 지워버리셨기 때문이다.
6절에서는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라고 했다. 영원히 멸망했다는 말은 영원히 끝났다는 뜻이다. 인간들이 아무리 높고 강하다 해도 영원히 자취도 없이 사라질 존재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 받으실 존재이시다. 원수들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났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들에 대해 계속 벌을 내리신다.
이어지는 벌은 “무너뜨린 성읍” 이란 말에 담겨있다. “무너뜨린 성읍” 이란 말은 원래 원어에서는 “성읍들을 뿌리 채 뽑으셨다” 라는 뜻이다. 개역은 이 부분을 직역 하지 않고 의미를 살려 “무너뜨린” 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중요한 그림 언어인데 의역을 해서 그 그림이 사라져 버렸다. 이는 큰 나무를 뿌리채 뽑아 버리듯 악인들의 성읍을 뿌리 채 뽑으셨다는 것이다. 악인들은 완전히 사라졌는데 이제 그들이 살던 성읍들도 완전히 뽑아서 바다에 던져 버리신 것이다. 이제 그들의 성읍들 조차도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억할 수 없나이다” 라는 말은 그들에 대한 기억조차도 사라진 것이다. 5절에서는 이름을 지워버렸다고 했다. 이는 묘비의 이름을 지우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악인들과 그들의 성읍들에 대한 기억까지 다 지우신 것이다.
이제 재판은 끝이 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형집행은 끝나지 않았다. 7절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앉으심이여” 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재판관의 자리에 영원히 앉아 계시며 계속 악인들에 대한 형을 집행하신다는 것이다. 나치의 전범들을 끝까지 찾아내어 심판하듯 하나님은 계속 재판관의 자리에 앉으셔서 악인들의 잔당들을 계속 뿌리 뽑으신다는 것이다. 그 심판을 위해 보좌를 세우셨다. 하지만 이렇게 끝까지 악인들을 찾아내어 계속 처형시키시는 하나님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8절에서는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제 9절에서는 재판정의 그림은 사라지고 요새의 그림으로 바뀐다. 이처럼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시편 기록자의 입장에서 보면 피난처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시편 기록자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품에 숨어 악인들을 고발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품이 정말 안전하기에 “압재를 당하는 자의 요새” 라고 한 것이다. 억울한 자들이란 악인들에게 짓밟히고 억눌려 좁은 곳에 끼어 있는 모습이다. 악인들에 대해서는 그 뿌리까지 그 이름까지 흔적도 없애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반대로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이기에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이름이고 억눌려 있는 죽음의 장소에서 벗어나 영원히 안전하게 피할 요새이신 것이다.
10절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 분 안에서 안전하게 잘 살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주님을 찾는 사람을 주님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품에 안겨있는 사람들을 그냥 놔두고 가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자녀를 버리고 떠나가는 부모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자녀들을 놔두고 떠나시지 않는다.
이제 11-12절에서는 함께 고난 받는 자들에게 함께 찬양하자고 촉구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두가지 별명이 나온다. 첫번째 별명은 “시온에 계신 여호와” 이다. 이는 시온에 앉아 계신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법궤가 시온에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실제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 또한 언제나 시온에 있는 백성들과도 함께 계신 것이다. 그 여호와께 찬송하자는 말은 모든 악기와 목소리로 찬송하자는 것이다. 2절의 찬송하자는 말과 같은 말이다. 또 그가 모든 백성들에게 하신 일을 선포하라 했다. 이는 수수께끼의 답을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하나님께서 하신 신비로운 일들의 내용들을 모든 백성들에게 드러내어 알게 하라는 것이다.
두번째 별명은 12절에 나오는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 여호와께서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함을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함께 계시며 보호자가 되어 주시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죽이는 자들에게는 피의 복수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일들은 시편 기록자가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근거로 앞으로 하실 일을 기대한 것이다. 13절을 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먼저 시편 기록자는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라고 했다.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라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악인들을 완전히 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노래했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앞으로 이루어기질 기대한 것 뿐이다. 현실은 악인들에게 둘러싸여 죽을 위기에 있다.
그러니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라고 했다. 이는 마치 자녀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서 부모가 지켜보고 있는 것과도 같다. 미국의 부모들은 항상 그렇게 한다. 만약 부모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고 큰 아이가 자녀를 때리려 한다면 부모는 즉시 나타나 자녀를 보호할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라고 한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죽음의 문턱에까지 도달해서 이제 곧 죽음의 문으로 빨려 들어갈 위기에 있더라도 즉시 낚아채 구해달라는 것이다.
14절에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라고 했다. 주님께서 하신 위와 같은 구원의 역사들을 모두 다 기억했다가 찬송을 전파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1절에서 과거 구원의 은혜를 세어본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찬양의 내용들을 모두 하나 하나 꼽아가면서 전해서 두 함께 찬양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찬양을 꼽아가면서 할 장소는 바로 “딸 시온의 문” 이다. 이제 죽음의 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성인 예루살렘 성문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구원 받은 것을 기뻐하겠다는 것이다.
15절에는 또다시 악인들이 받는 심판이 나온다. 이 또한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이면서 또 미래에 일어날 일인 것이다. 15절 앞부분에서는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라고 했다. 또 15절 뒷부분에서는 “자기가 숨긴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라고 했다. 잡혔다는 말은 원래 골리앗의 이마에 박힌 돌멩이 같은 모습이다. 이것이 예레미야 38:6절에서는 진흙창 구덩이에 빠진 것으로 비유적으로 쓰였다. 따라서 대적들이 빠져서 꼼짝도 못할만큼 단단히 끼어있는 그림이다.
1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라고 했다. 심판을 행하셨다는 말은 4절에서 의를 변호하셨다는 말과 똑 같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알리시려고 재판을 시작하셨는데 이제 끝이 난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가 꾀한 일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걸려들었다는 말은 새덫이나 쥐덫처럼 갑자기 탁하고 때리며 덮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악인들이 어떻게 걸려들었는가? 17절에 보면 “스올로 돌아감이여” 라고 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을 보고 놀라 돌아서다가 죽는 모습이 나왔다. 이번에는 하나님을 피하여 돌아서서 도망가는데 모두가 스올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서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잊는다. 스올이란 하나님을 기억도 못하고 완전히 멸망하는 곳이다.
18절에는 궁핍한자와 가난한 자들이 나온다. 이들은 실제로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악인들에게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하나님의 종들을 말한다. 결국 시편 기록자 자신을 포함하여 하는 말이다. 현재 이들은 아직도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하지만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라고 했다. 악인들은 스올로 들어가 완전히 잊혀진 존재들이 되지만 의인들은 절대로 잊혀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현실을 보면 의인들은 멸망할 것 같고 악인들은 영원히 영광을 누릴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결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멸망할 것 같은 위기에 있더라도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했다. 이는 억눌린 자들의 소망도 결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인들은 현재 고통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확신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이제 기도의 중요한 내용들이 끝났다. 계속 앉아서 지켜 보고만 계시던 하나님은 이제 일어나 활동하실 때이다. 그래서 19절에서는 “여호와여 일어나사” 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라는 말에서 인생이란 악인들을 가리킨다. 현재 악인들이 아무리 강하게 보여도 결국 깨어질 수 밖에 없고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또 이방 나라들이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 20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여호와를 부르며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라고 간구하고 있다. 이는 저들을 두려움 안에 넣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강력한 이방 나라들이 한낱 깨어질 수 밖에 없는 인간임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다.
시편 9편은 기쁜 일이 있어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고난 가운데서 찬양한 것이다. 우리도 큰 고난 가운데서 찬양하는 법을 오늘 시편 기록자에게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우리도 고난 가운데서 과거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적을 보여 주시며 인도해 주셨는가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를 손가락으로 꼽아 세며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 은혜를 함께 누리고 있는 사람들과 온 마음 다해 온 힘 다해 즐겁게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찬송할 일들을 하나 하나 꼽아가면서 함께 찬양하는 일이다.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멸하실 것이고 저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함정에 빠질 것이다. 지금은 저들이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릴 것 같지만 저들은 한낱 깨어질 그릇 같은 존재이고 이름조차도 완전히 지워질 존재들이다. 반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우리는 영원히 그분 안에서 찬양할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때 영원한 몸을 입고 영원히 찬양할 존재들이다. 이것을 기억하며 고난 중에 찬양하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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