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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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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편

시편 10편은 시편 9편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문장을 시작한다.

2016. 12. 8.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10편 강해 설교

시편 10편은 시편 9편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문장을 시작한다. 시편 9편과 10편을 하나로 보는 견해와 나누어 보는 견해가 있지만 본래 하나라는 증거가 더 분명히 드러난다. 그 중 가장 분명한 증거는 시편 10편이 9편에 이어 영어의 L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첫 글자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시편 9편과 10편을 독립된 시편이라고 보는 것은 시편 9편은 찬양의 노래인데 10편은 슬픔의 노래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편 9편을 단순한 찬양시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 9편은 단순한 찬양시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에서도 과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겨 보며 또 그렇게 은혜 주실 것을 소망하며 찬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이어서 시편 10편에서 시편 기록자는 자신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구체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호소의 결과에는 어떠한 분명한 응답이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시편 기록자가 혼자서 묵상하고 난 후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회복한 것만이 드러나 있다.

시편 기록자는 9편 끝에서는 하나님께 심판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10편 첫 부분을 보면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시편 기록자는 여전히 환난 중에 있었던 것이다. 환난 중에 있다는 말은 본래 좁은 곳에 끼어 있어 꼼짝 못하고 있다는 그림 언어이다. 환난 중에 있던 시편 기록자가 그렇게 환난 중에 간절히 부르짖었다면 하나님은 즉시 나타나셔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셔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1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먼저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라고 한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아무리 간절하게 하나님을 부르고 외쳐도 하나님은 그저 저 멀리 하늘에 초월해 계신 분으로만 느꼈다. 이어서 “숨으시나이까?” 라고 했다. 멀리 계시다고 느낄 때는 그래도 하나님이 보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숨으셨다는 말은 이젠 아예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악인은 시편 기록자의 눈 앞에서 설쳐대고 있다. 먼저 2절에서 악한 자가 교만하다고 했다. 교만하다는 말은 본래 파도가 높이 일어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이 높이 일어나야 하는데 악인들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이 일어나는 그림이다. 높이 일어난 악한 자는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한다 했다. 압박한다는 말은 불길처럼 쫓는다는 그림 언어이다. 산불이나 들불이 나면 사람이나 말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 불길을 벗어날 수 없다. 바람의 방향을 보고 불길이 달려오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그 불길에 포위되어 버린다. 같은 말이 창세기 31:36절을 보면 야곱이 라반에게 “급히 추격하나이까” 라고 했는데 새번역은 원어를 살려서 “불길처럼 달려들어서 저를 따라오신 것입니까?” 라고 번역했다. 불길은 순식간에 온 들판에 퍼지는 법이다. 그렇게 불처럼 빠르게 천지 사방에서 가련한 자를 추격하여 포위한다는 것이다. 가련한 자는 시편 기록자 자신을 나타낸 말이다.

악인들이 이렇게 교만한 태도로 가련한 자를 추격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전혀 간섭하지 않으신다 믿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셔서 활동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악인들은 절대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것이다. 시편 10편을 보면 악인들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들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여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악한 행동을 했던 악인들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여있다. 그 신뢰는 하나님은 자신들의 악한 행동을 전혀 막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뢰가 오랫동안 축적되어 있고 자신들은 계속해서 악한 일을 해서 자신들의 탐욕을 채웠던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마치 파도처럼 높이 일어나 하나님이 악인들을 심판하듯 가련한 자들을 불길같이 추격한 것이다.

2절 뒷부분에서 시편 기록자는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다. 사방이 악인의 불길로 둘러싸인 절박한 상황이라면 시편 기록자는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었어야 했다. 하지만 시편 기록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악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는 자기들이 고안한 함정이나 덫에 자신들이 첨벙 빠지고 덜커덕 걸리게 해 달라는 그림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고 자신을 그 위기에서 구해주시기만 한다면 악인들은 또 다시 기회를 봐서 자신을 불길처럼 추격할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자신의 구원을 구하지 않고 악인들을 심판해 달라고 한 것이다. 그래야 자신은 악인들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3절부터는 시편 기록자에게 큰 고통을 주는 악인의 태도를 묘사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설치는 이유는 1절에 나온 대로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 같고 숨어 계신 것 같기 때문이다. 먼저 3절 앞부분을 보면 악인은 자신의 마음(히: 영혼)의 욕심을 자랑하는 자들이다. 악인은 인간적인 욕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다.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란 폭력으로 취하는 자들이란 뜻이다. 탐욕을 부린다는 말이 기둥을 목적어로 취한다면 기둥을 부수어 넘어뜨린다는 뜻이다. 이들은 폭력으로 약한 자들을 무너뜨리면서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오늘날 관공서나 회사나 군대나 어디에나 있다. 자신들의 승진이나 출세를 위해 약한 자들을 무너뜨리면서 밟고 올라가는 자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믿는 자들 가운데도 그런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을 밟고 출세한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도 지도자 놀이를 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을 하기도 한다.

이들의 악행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배반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라크” 인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뜻으로 축복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다. 악한 자는 가련한 자를 수도 없이 밟고 성공했어도 하나님은 한번도 막지 않았기에 무릎을 꿇는 척만 하는 무늬만 하나님을 축복하는 자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 앞에 무릎꿇고 조롱하던 로마병정들 같은 모습이다. 거짓으로 경배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여호와를 멸시하는 자들이다. 거짓으로 무릎을 꿇고 여호와를 멸시하던 자들이다.

4절에 보면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고 여호와를 거짓 경배하여 멸시하던 자가 벌떡 일어났다. 왜냐하면 “교만한 얼굴” 이라는 말은 교만한 태도로 일어서서 얼굴을 높이 들고 콧대를 세우며 말하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일어나 콧대를 세우면서 큰 소리로 떠드는 내용이 “여호와께서는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라는 말이다. 이는 9:12절에서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이” 라는 말과 연결해서 읽어야 하는 말이다.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을 “피의 복수자” 라고 했는데 악인은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다. 또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 라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그의 모든 사상에는” 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그들의 생각이란 늘 이러합니다” 라는 뜻이다. 이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던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실질적인 무신론자들이다.

악인의 교만은 갈수록 태산이다. 5절에서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라고 했다. “견고하고” 라고 번역된 말은 영어성경들에서는 ‘prosper’ 라고 번역했는데 본래 이 단어가 가진 뜻은 원래 원을 그리며 빙빙 돌면서 춤을 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데도 악인의 길은 만사형통이라는 것이다. 또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라고 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멀어서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인을 하나님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대적들을 멸시” 한다고 고발하고 있다. 멸시한다는 말은 대적들을 향해 코방귀를 뀌는 것이다. 이러한 악인은 하나님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대적한다면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볼 때 의인은 넘어지지 않아야 하고 악인은 당연히 넘어져야 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악인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6절에서 악인이 마음 속으로 자신의 두가지 모토를 말했다. 그 첫째 모토는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라는 말이다. 이는 공격을 받아도 끄덕 없다는 뜻이다. 둘째 모토는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한다는 것이다. 대대로 라는 말은 영원히 항상 이라는 뜻이다. 언제라도 항상 자신에게 불행과 저주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악을 계속 행하면서 그 악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마음 속에만 있던 이러한 모토들이 7절에서는 말로 드러난다. 먼저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라고 했다. 이 세단어는 점층법이다. 저주란 맹세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악행을 방어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만약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라고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이 저주라는 말이다. 이러한 자기 방어적 맹세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 ‘속임수’이다. 속임수는 말로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속임수보다 한단계 더 올라간 것이 폭언이다. 속임수가 상대 몰래 공격하는 것이라면 폭언은 직접 말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로 범하는 죄들이 입 안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는 말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 다음 그들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다 했다. 혀 밑에 있는 잔해와 죄악은 그 악한 말들이 나오는 샘인 것이다. 이는 악인에 대한 의인의 정신적인 분노를 그림처럼 그린 것이다.

이어서 8절에서는 악인들의 추가적인 속성을 강도의 비유로 고발하고 있다. “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라는 말은 막다른 골목과 같은 으슥한 곳에서 앉아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는 강도와도 같다는 것이다. 또 그들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본다 했는데 가련한 자를 죽이고 빼앗으려고 노린다는 뜻이다.

9절에서는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라고 했다. 이러한 악인의 악행을 사자에 비유하고 있다. 자기의 굴이라기 보다는 은밀한 장소에서 숨어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강도의 비유에서 구석진 곳 은밀한 곳과 같은 그림이다. 그러한 곳에서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사자처럼 은밀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가련한 자를 잡는 그림은 그물로 덮쳐서 끌어 당기는 모습이다. 이러한 그림언어는 악인들의 인생철학을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다.

이제 10절에서 진짜 재앙이 나온다. “그가 구푸려” 라는 말은 악인이 쓰러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악인의 사냥감이 쓰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망가진다는 말은 화살에 맞은 사냥감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모습이다. 악인은 이 순간에 ‘명중이다’ 라고 외쳤을 것이다. 이어지는 동작은 개역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주저앉는다는 말이 원어에는 있다. 마지막으로 넘어진다. 이 세 단어는 화살에 맞은 사냥감이 휘청거리다가 주저앉고 마지막엔 옆으로 쓰러져버리는 연속동작을 보여준다. 악한 자의 포악으로 인한 것인데 포악이란 힘이란 뜻이다.

이렇게 가련한 자를 쓰러뜨리는데도 하나님은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기에 악인은 더욱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11절에서는 악인이 또 마음 속에 말하길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이 잊으셨다는 것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건망증으로 잊으셨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의 얼굴을 가리셨다는 말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고개를 돌리셨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영원히 악인의 악행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의인들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여간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시지만 자신들의 악행에는 관여도 안하시고 고개를 돌리시어 외면하시며 영원히 보지 않으신다는 신뢰가 쌓여간 것이다. 이는 악인의 철학과 신론을 보여준다. 악인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자신들의 악행에는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실질적인 무신론자이다.

이제 시편 기록자가 악인에 대한 묵상과 고발이 끝이 났다. 이어지는 그림은 이제 전쟁터의 그림이다. 12절은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라는 말로 시작한다. 악인은 하나님이 전혀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했지만 의인은 알고 있다.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진지에서 계속 지켜보며 분노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악인을 심판할 결정적인 때를 기다리며 의인들이 악인들에게 고난을 받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의 보고는 “폐하! 이젠 때가 되었습니다. 일어나시지요” 라는 말과도 같다. 이어서 “손을 드옵소서” 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힘을 보여달라는 것이고 동시에 대적들에게는 선전포고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는 악인에게 고난 받는 의인들이다. 이는 악인에게 고난 당하고 있는 의인의 고통을 기억하시고 악인을 벌해 달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대적들에게 선전포고를 해야 하는 이유는 13절에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라고 밝혔다.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말은 3절에서 나온 말과 같은 말이다. 3절에서는 겉으로는 엎드려 경배하면서 속으로 멸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악인의 멸시는 이제 분명한 확신으로 드러나 있다.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은 하나님은 벌을 내리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절대로 악인을 그대로 두지 마시고 악인들의 행동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14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악인이 장담한 하나님은 보지 않는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라는 말은 완전히 다 지켜 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지 안에서 대적의 악행을 모두 다 지켜 보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제 의인을 구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또 이어서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의로운 자가 주를 의지 하나이다” 라고 했다. 주께서 행동개시를 하시려 하시기에 의로운 자는 주의 품에 의지해서 피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주의 뒤에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을 벌써부터 알아 보았다는 것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아는 실제 고아가 아니다. 아무런 보호막이 없는 사람을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이제 전지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악행을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제압하여 팔을 꺾으시며 심문하시는 모습이다. 악인이 모든 죄를 다 자백하실 때까지 하나님은 악인의 팔을 우두둑 우두둑 꺾으실 것이다. 악인은 비명을 지르면서 모든 죄를 다 자백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라고 한 것이다. 더 이상 자백할 것이 없을 때까지 악한 자의 팔을 계속 꺾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악인의 믿음은 틀렸다는 것이다.

16절에서는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은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라고 했다. 갑자기 구하고 지켜야 할 대상이 시편 기록자 자신에서 나라로 바뀌었다. 이방 나라들이란 말은 원어에서는 ‘나라들” 이란 말이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 뿐 아니라 악한 나라들까지 다 멸망시키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렇게 무섭기만 하신 분은 아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꺾으시지만 겸손한 자의 말에는 귀를 기울여 주시는 자상하신 왕이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다.

18절은 17절에 딸린 문장이다. 그렇게 겸손한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셔서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해 심판 하셔서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왜 악인을 내버려 두시나요? 어째서 자신의 간구를 듣지 않고 멀리 계시고 숨어 계시나요?” 라고 질문했었는데 이젠 확신에 찬 믿음으로 끝이 났다. 시편 기록자의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현실은 악인들의 불길 같은 추격과 위협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다. 하지만 악인들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묵상하고 나니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게 되었다.

시편 기록자는 자신이 경험한 것과 현재 감지하고 있는 것 사이에 큰 간격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체념하고 단순히 죽음 이후나 종말론적 심판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시편 기록자는 분명히 현재적 구원을 기대하고 있다. 시편 기록자가 실제적 구원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편 기록자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확신 가운데 삶을 계속 이어나갔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 뜻에 따라 사는 삶이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행복과 안정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뢰와 삶은 세상적 기준 이상의 놀라운 축복의 삶을 보장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신뢰 관계이다. 이것이 시편 기록자가 맺는 이 시편의 결론이다. 우리도 말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신뢰의 관계를 지속하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세상에는 이론적인 무신론자와 실제적인 무신론자가 있다. 오늘날 이론적인 무신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은 아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전혀 방해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저들은 스스로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추구하며 고상하게 살아간다.

문제는 시편 10편에 나온 악인처럼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고 떠들면서 실제적으로나 기능적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저들은 자기 중심의 유익을 추구하고 그걸 얻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며 짓밟고 올라서는 자들이다. 그러면서 얻은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간증하며 떠드는 자들이다.시편 10편에서 다룬 악인은 이러한 실제적이고 기능적 무신론자이다.

예수님을 대적한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실제적이고 기능적 무신론자들이다. 저들은 하나님을 팔아 지신들의 부귀 영화를 누리며 자신들의 명예와 권위를 지키려 했던 자들이다. 세계사에 보면 세속의 군주들을 자신의 권위 아래에 두고 통치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라고 속인 교황들도 나온다. 저들도 시편 10편에 나온 실제적 무신론자들이다.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자들을 죽인 교황들도 역시 실제적 무신론자들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외치며 사실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겼다. 오늘날 하나님을 팔아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는 자들, 거짓과 속임수와 권모술수로 종교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도 역시 전부 실질적 무신론자들이다. 만약 하나님이 실제로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것을 마음 속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진출처: US-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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