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누구나 인생의 큰 위기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때에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뜻대로 안되고 결국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해결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시편 11편 기록자도 역시 큰 위기에 빠져있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내용이다.
1절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내가 피하였다는 말은 본래 피난처를 찾는다는 뜻이다. 이 말이 비유적으로 쓰일 때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완료형이기에 시편 기록자는 이미 완전히 여호와께 피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로 피해 있으면서도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어서 시편 기록자는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묻는다. 도망하라는 앞에 나온 피하라는 말과는 달리 목적없이 이리저리 방황한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도망할 때는 목적지가 없는 법이다. 그저 당장 닥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아무데로나 몸을 피해 달아나는 법이다. 새도 사람들에게 쫓기면 아무데로나 도망간다. 그래서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한 것이다.
이미 주님께 완전히 피한 시편 기록자에게 목적없이 이리저리 달아나라는 조언을 한 사람이 누구일까? 이것은 실제 조언을 한 친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또 시편 기록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대화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던지 간에 분명한 것은 시편 기록자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완전히 피했다고 하면서도 현실을 보면 여전히 대적들의 위협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틈타서 시편 기록자에게 들려온 유혹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는 것이 안전하지 않으니 어서 새처럼 아무데로나 달아나라는 것이다.
2절은 원어에서 “왜냐하면 잘 보라!” 라는 말로 시작한다. 유혹의 목소리는 하나님을 보지 말고 눈에 보이는 위기를 잘 보라는 것이다. 1절에서 시편 기록자를 새에 비유한 그림이 2절에서는 사냥꾼의 그림과 연결된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새의 그림인 것이다. 어서 피해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이다. 사냥꾼인 시편 기록자의 대적들은 새와 같이 쫓기던 시편 기록자를 향해 화살을 날릴 준비가 끝났다. 그 다음에는 “마음이 바른 사람을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라고 했다. 시편 기록자는 대적에게 위치가 노출되었지만 대적은 자신을 감춘 채 공격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이제 언제 어디서 화살이 날아와 시편 기록자의 가슴에 꽂힐지 모른다. 이런 상황보다 더 두려운 상황은 없을 것이다. 유혹의 음성은 적이 어디서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말로 시편 기록자의 마음 속의 두려움을 더 크게 증폭시키고 있다. 어서 하나님의 품에서 빠져 나와 어디로든지 피하라고.
3절도 원어에서는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이는 빨리 피해야 하는 두번째 이유가 된다. 영어성경에서는 대부분 가정법으로 보고 ‘if’ 나 ‘when’ 으로 번역했다. “터가 무너지면” 이라는 말은 국가를 지탱하는 기둥인 법률과 질서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율법으로 다스려지던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통해 유지되던 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혼자서 의인이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언은 마태복음16:22절의 베드로의 조언에서도 나온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처음으로 예언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책망하며 그렇게 하지 말라는 장면에서 나온다. 또 사도행전 21:12절에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조언하는 부분에서도 나온다.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노리고 있으니 가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나 바울은 하나님의 품으로 피한 상태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위험하니 어서 피하라고 한 것이다.
시편 11편에 나온 두가지 왜냐하면에 이어 나오는 말들도 다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 조언의 목적은 하나님의 보호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두려운 마음을 버릴 수는 없다. 우리도 그러한 위기에서 하나님께로 피했다고 하더라도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유혹의 목소리에 넘어가 다른 피할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두려운 상황에서도 시편 기록자의 두려움과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다. 그 답변이 4절부터 나온다. 먼저 “주님은 성전에 계신다” 는 것이다. 성전에 계신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이 그 성전에만 계신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백성들에게 임재해 계신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주님은 어디에나 다 계시는 분이다. 열왕기상 8:29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드린 기도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기도할 때 주님의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기도를 들어 달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성전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보좌는 성전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주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다” 라고 말한 것이다. 열왕기상 8:29절과 마찬가지로 시편 11:4절에서 “주님은 그의 눈으로 사람을 살피시고 눈동자로 꿰뚫어 보신다” 라고 한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하나님의 품에 피하여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떨 때 속삭이는 목소리는 거기서 빠져 나와 다른 곳으로 피하라 했다. 우선 눈에 보이는 위험을 피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 기록자는 그런 상황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았다.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시면서 시편 기록자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을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보고 안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회복은 주님께 피한데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회복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그분은 인간 대적자들의 능력을 훨씬 뛰어 넘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어서 금세공사가 불로 금을 연단하는 그림으로 이어진다.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라는 말에서 ‘통촉하시고’ 라는 말은 눈으로 살펴보신다는 뜻이다. 금세공사가 금광석에서 순금을 추출하는 첫째 단계는 눈으로 살피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먼저 골라낼 수 있는 불순물을 골라내는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골라내는 것만으로는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오직 눈에 보이는 분명한 불순물들만 골라낼 뿐이다.
그래서 다음 둘째 단계의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연단의 과정의 그림은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고” 라는 말에 숨겨져 있다. 원어에서 안목이라는 말은 ‘눈꺼풀’ 이다. 잠언 4:25절은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라고 했다. 시편 11:4절과 같이 눈이 보고 눈꺼풀이 살핀다 했다. 눈으로 보는 것과 눈꺼풀로 살펴보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 눈으로 보는 것은 육안으로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눈꺼풀이 살펴보는 것은 육안으로 보기 힘든 아주 세밀한 부분을 들여다 보는 모습이다. 아주 작은 물체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뚫어지게 관찰하다 보면 눈이 건조해져서 눈을 깜박거리게 된다. 눈꺼풀로 감찰한다는 말에서 감찰한다는 말은 원어에서 금을 연단하여 순금으로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눈꺼풀을 깜박이시며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시는데 그 과정이 바로 순금으로 만드는 과정과도 같은 과정이다.
5절에서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라고 했다. 4절과 같은 말을 5절에서 쓴 것이다. 가려낸다는 말도 역시 금을 연단한다는 말이다. 불순물이 섞인 금광석에서 순금만 골라내려면 강한 불로 녹여야 한다. 그러면 순수한 금이 먼저 녹아 나온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의인을 감찰하시고” 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불로 금을 연단하는 과정은 의인에게 나타나는 고난을 그림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연단은 의인이나 악인이나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의인은 고난을 통해 불순물을 버리고 순수한 금과 같은 믿음만 남게 되는 것이다. 욥의 고난도 역시 의인의 고난이고 욥이 순수한 금과 같은 믿음으로 발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욥이 고난 중에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불순물들은 제거되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만 남게 된 것이다.
또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신다” 했다. 6절에 보면 악인들을 어떻게 미워하시는지 나타나 있다. 6절에 보면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라는 말은 악인에게 비를 새그물처럼 내리신다는 것이다. 새그물은 새가 빠져나갈 수 없는 매우 촘촘한 그물이다. 하지만 이 그물은 실제 그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비이다. 그 비는 불과 유황으로 된 비이다. 불과 유황의 비가 악인들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아주 촘촘하게 내린다는 것이다. 비와 유황이 악인들을 다 태우고 나면 태우는 바람이 그 재까지 싹 쓸어 보낸다. 태우는 바람이란 동쪽과 남쪽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아주 뜨겁고 건조한 바람이다. 그 바람은 남은 재까지도 다 태워 날려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언뜻 잘못 읽으면 하나님께서 의인들은 약한 불로 살살 연단하시고 악인들은 사정없이 태워 없애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듯 하는 심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똑 같은 고난이지만 의인들의 안에는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고난의 불은 불순물들을 태우고 순수한 금과 같은 믿음만 남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악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기에 같은 불로 태워도 다 타버리고 남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같은 고난이 의인들에게는 정금같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련이 되지만 악인들에게는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되는 것이다.
7절도 왜냐하면으로 시작한다. 왜 같은 고난의 불이 의인들은 정금같이 만들지만 악인들은 다 태워버리시는가 하면 이란 뜻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정의로운 일을 사랑하신다. 정의롭다는 말을 두번이나 써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것이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에게 똑 같은 고난을 주시지만 악인들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고 의인들은 정금같이 연단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난다는 말이 아니다. 시편 기록자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우리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걱정할 수 밖에 없는 두려운 상황을 자주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분명히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신자들도 역시 그러한 두려움과 걱정에 빠지게 된다. 시편 기록자는 그 이유를 하나님을 보지 않고 근심스러운 상황을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그 근심스러운 상황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의 확신은 두려움이 물밀 듯 밀려오는 상황에서 유혹의 목소리를 뿌리치고 하나님만 바라본 것에서 나왔다.
우리도 우리가 만난 위기를 바라보면 두려움과 걱정에 빠지게 된다. 이는 마치 까마득한 낭떠러지 사이에 놓여있는 줄로 된 다리를 건너는 사람과도 같다. 좌우와 아래를 보면 두려움이 몰려와 현기증을 느끼고 잘못하면 떨어지게 된다. 그럴 때 건너편 목적지를 바라보고 그 다리를 건너면 그 두려움은 사라진다. 우리가 바라보고 건너가야 할 목표는 바로 하나님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목표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을 볼 수 없어 바라보고 따라갈 수 없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분이 사랑과 인내로 견디시며 제자들을 양육하신 모습을 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표이다. 또 예수님을 목표 삼아 앞서 건너가고 있는 이들을 보고 따라 가야 한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고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다. 그러면 천길 낭떠러지를 건너는 것 같은 두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움 대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위기가 자신을 연단하여 순수한 믿음으로 변화되는 기회로 볼 수 있게 된다.
의인이나 악인의 차이는 고난의 강도가 아니다. 같은 고난이지만 의인들에게는 순수한 믿음으로 발전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악인들은 같은 고난에서도 아무런 소망이 없기에 다 타서 날아가 버리고 아무것도 안남게 된다. 우리 인생의 위기 중에 우리가 가져야 하고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사진출처: flick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