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용 미리보기 · 교수님 확인 뒤 확정합니다 · NanuriWeb
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말씀 › 강해 글 › 시편 강해

Psalms

시편 12편

시편 12편에서 시편 기록자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있다.

2016. 12. 22.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12편 강해 설교

시편 12편에서 시편 기록자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있다. 이는 마치 열왕기상 19장에서 이세벨에게 쫓기는 엘리야의 모습과도 같다. 19:10절에서 엘리야는 “오직 나만 남았거늘” 이라고 말했다. 주의 선지자들은 다 잡혀 죽고 엘리야 자신만 겨우 빠져나왔다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시편 12편의 다윗도 바로 그런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그 위기는 실제로 다윗이 전쟁터에서 쫓기는 상황이 아니다. 진실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가 말만 하는 사람들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영적 위기를 나타낸다. 12:1절에서는 경건하고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진다 했는데 12:8절에서는 비열함이 인생들 중에 높임을 받는다 했다. 따라서 영적 위기는 경건한 자들은 멸종되고 비열한 자들이 날뛰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영적 위기에서 시편 기록자는 “도우소서 여호와여!”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숨을 헐떡이며 부르짖는 외마디 비명과도 같다. 자신이 처한 위험에서 건져내 달라는 것이다. 이어서 원어에서는 두가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유를 말하고 있다.

첫째 왜냐하면은 경건한 자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원어는 “하시드” 인데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용서하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란 뜻이다. 끊어졌다는 말은 과거에 존재하던 것이 이제 영원히 전멸했다는 뜻이다. 마치 공룡이 멸종되었다는 말처럼 완전히 멸종되었다는 뜻이다.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행하는 사람은 완전히 멸종되었다는 뜻이다.

둘째 왜냐하면은 진실한 사람도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사람이란 항상 같은 자리에서 든든히 더 받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말없이 삶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든든히 지켜 나가던 사람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과의 언약에 근거해서 그 언약 안에서 말씀대로 지키며 그 사랑을 행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인생 중에” 멸종되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인생 중에” 라는 말이 시편 12편을 시작하고 끝을 내면서 액자와 같은 구실을 한다. 이 말은 원어에서 사람의 아들들이라는 뜻이다. 시편 12편의 기록자가 비명을 지르며 구해달라는 것은 실제 목숨이 위험한 상태가 아니다. 삶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들 가운데서 멸종되고 사라졌기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2-4절은 말만 앞세우는 악인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첫째 2절에서 사람들이 서로 이웃에게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웃에게 라는 말은 친구들이란 뜻이다.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원어에서 친구들에게 텅빈 말을 한다는 뜻이다. 같은 말이 시편 41:6절에서 “나를 보러와서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라고 했다. 이는 독수리가 죽어가는 자들의 위를 빙빙 도는 것 같은 자들이 시편 기록자를 찾아와서는 빈말이나 늘어 놓고는 아픈 시편 기록자가 말하는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거리에 나가 흉을 보고 다닌다는 것이다. 이처럼 거짓말 또는 빈말이란 말로는 좋은 말로 위로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뒤에서 공격하는 자들의 말이다.

또 같은 말이 호세아 10:4절에서는 “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라고 했다. 호세아에서는 재판에서 거짓 맹세를 하는 것을 빈말이라 한 것이다.

에스겔 13:6절에는 선지자들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며 “허탄한 것” 예언하는 모습이 나온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힘이 없는 의인들은 말로만 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독수리가 시체를 뜯어먹듯 해친다는 뜻이다.

둘째 2절 뒷부분에서 “아첨하는 입술로 두 마음을 품고 말한다” 라고 했다. 아첨하는 입술이란 말에서 아첨하는 이라는 말은 이사야 30:9-10절에 보면 패역한 백성들이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고 선견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라고 요구한다. 라고 했다. 여기서 “부드러운” 이라는 말이 바로 시편 12:2절의 ‘아첨하는’ 과 같은 말이다. 이들은 힘있는 악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 않고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는다는 말을 원어 그대로 번역하면 마음 안에 또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마음이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뜻하는 말이다. 마음 속에 두가지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속인다는 것이다. 진리를 알고도 진리를 말하지 않고 상대를 속이기 위해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다.

셋째 3절에는 “자랑하는 혀” 가 나온다. 자랑하는 혀 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앞의 두 가지 말들을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 첫째 거짓말 또는 빈말이란 선지자가 스스로 나서서 하나님이 하지 않은 말을 하나님이 했다 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양의 탈을 쓰고 온 늑대와 같다. 말로는 거룩하고 그럴 듯 하지만 사실 힘이 없는 의인들을 잡아 먹으려고 하나님을 내세우는 자들이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두번째로 하는 일은 힘이 있는 악한 자들에게는 악한 자들이 원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놀랍게 축복하신다며 악인들이 원하는 예언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존경 받으며 부귀와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 세번째로 하는 것이 바로 3절에서 나온대로 자랑하는 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3절은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신다고 한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아첨하는 입술이 힘있는 악인들에게 인정받고 높임을 받으면 자랑하는 혀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의 혀를 끊어주신다 했다.

4절은 이러한 아첨하는 자들과 큰소리치는 자들이 한 말을 상상해서 쓴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라고 했다. 이는 전쟁터에서 상대를 누르고 제압하여 이기는 모습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그런데 혀로 이긴다 했으니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말, 아첨하는 말, 교만한 말로 의로운 자를 누르고 이길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들의 입술을 자신들의 것이라 자랑하면서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답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만이 최고조에 달해서 자기들이 바로 주인이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온 세상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면 실제로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 노릇까지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악인들은 이제 갈 데까지 갔다. 더 이상 악은 없다.

5절에서는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나온 악인들의 말과 대조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 하신 것이 아니라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해서 하신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이 드디어 행동개시를 하는데 그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 “가련한 자들의 눌림” 때문이다. 가련하다는 말은 마치 강한 이집트에서 압제 당하던 이스라엘과 같은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다. 힘없는 자가 힘있는 자에게 사정없이 짓밟히고 있는 모습이다. 가련한 자들은 힘이 없는 의인들을 말한다. 힘이 없는 의인이 악인들에게 사정없이 짓밟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렇게 짓밟히는 모습 때문에 하나님은 일어나신 것이다.

둘째 “궁핍한 자들의 탄식” 때문이다. 궁핍한 자들이란 광야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사람들 같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궁핍한 자들이 울부짖는다는 말은 치료 불가능할 만큼 치명상을 입고 고통 가운데 울부짖는다는 뜻이다. 앞에서 나온 힘없는 가련한 의인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먹을 것을 공급받는 궁핍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앞에서 짓밟힘을 당하고 울부짖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앞에서는 짓밟히는 모습을 보셨는데 이번에는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시편 기록자가 얻어 맞고 짓밟히는 그림이 아니고 빈말과 아첨하는 말과 교만한 말로 공격을 받아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그림처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말로 영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은 마치 성폭행을 당하는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이제 일어나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안전한 지대에 둔다는 말은 1절에서 도와달라고 한 말과 같은 말이다. 앞에서 짓밟히며 울부짖으며 구해달라고 외친 그 구원을 베푸시겠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나타나신 것처럼 시편 기록자에게 임재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는 실제 어떤 놀라운 역사가 아니다. 이제 거짓된 말과 아첨하는 말과 교만한 말을 하는 자들을 없애시고 진실되고 순결한 말씀을 들려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6절에서는 금과 은에 비유했다. 시편 11편에서도 금과 은을 연단하는 비유가 나왔지만 그 초점은 연단하는 과정인 고난에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다.

악인들의 거짓을 멈추게 하시고 6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라고 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하면서도 순수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앞에서 나온 악인의 말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나온 거짓 선지자는 약한 의인은 속여서 갈취하고 강한 악인들에게는 아첨으로 신임을 얻어 세상 권력과 명예를 모두 거머 쥐었다. 이런 자들은 마치 1960년대 시골학교 소풍 때 상인들이 좌판 벌려놓고 팔던 10원짜리 가짜 반지와도 같은 것이다. 몽땅 불순물들 뿐이고 귀한 금이나 은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그런 가짜 반지와도 같다. 하지만 이와 대조되는 여호와의 말씀은 어떤 것보다 순수한 진품이다.

먼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라는 말에서 순결하다는 말은 본래 제의적 정결을 말한다. 실제 물리적 정결에 쓰일 때는 물이나 금이 정결하고 순수하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말씀에는 앞에서 말한 헛된 거짓말이나 아첨하는 말 교만한 말들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결한 말씀은 마치 흙 도가니에서 단련한 은 같다고 했다. 단련한 이라는 말은 원어에서 짜라프인데 불순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험삼아 녹여보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에 일곱번 걸러낸다는 말에서 걸러낸다는 말은 짜카크 인데(개역에 없음) 완벽하게 걸러 완벽히 순수한 말씀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인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묘사가 끝난 뒤 시편 기록자는 7절에서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을 부르며 한 첫번째 말은 “그들을 지키사” 이다. 지켜달라는 말은 아주 주의 깊게 계속 쉬지않고 세심하게 살펴보며 지키는 것이다. 이 말은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말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세심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도 쓴 말이다. 사무엘하 18:12절에서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라고 했다는 말에서도 나왔는데 원래는 압살롬이 다치지 않도록 잘 지키고 보호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의인들을 세심하게 지켜봐 달라는 것이다. 물론 지켜달라는 말이지만 지키기 위해 잘 관찰해 달라는 뜻에 초점이 맞추어진 말이다.

하지만 7절 뒤에 나오는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는 앞의 말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감시자라는 뜻으로 많이 쓰였다.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같은 의인들을 한결 같은 사랑으로 꾸준히 지켜달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잘못하더라도 용서해 주시고 항상 한결같이 보호해 달라는 것이다. 이 말은 관찰보다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용서하시면서 지켜 달라는데 초점이 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여전히 악인들이 날뛰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현재 악인들이 날뛰고 있다는 것을 8절에서 알리고 있다. 원어에서는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악인들이 사방에서 휘젓고 다니는 그림이다. 사방을 둘러보면 악인들만 가득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또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라는 말은 앞에서 나온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예언으로 약한 자를 속이고 강한 자에게 아첨하여 힘과 존귀를 얻은 자들이 높임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말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근본이었다.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백성들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들을 말로써 드러내야 한다. 말로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며 그 창조하신 세계를 관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도록 하나님 영광을 위해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도 시편 기록자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을 이용해서 헛된 말로 위로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약한 자들을 약탈하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 날뛴다. 이러한 악한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거짓 예언을 한다. 남을 해치고 자신들의 유익만을 구하는 말들만 한다. 이러한 거짓 예언자들이 계속 부귀영화를 누리며 교만해지면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선다. 사이비 이단 교주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통을 표방하는 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자들이 있다고 본다.

시편 기록자가 그리는 자신의 모습은 성폭행 당하는 힘없는 여인의 모습과도 같다. 헛된 빈말들과 입에 발린 칭찬들과 교만들에 의해 계속 더럽혀지고 폭행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외치는 모습이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을 보아도 이러한 거짓된 예언과 축복의 메시지로 힘없는 의로운 자들을 착취한다. 힘있는 악한 자들에게는 아부하여 명예와 부귀영화를 누린다. 만약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여 거짓말 빈말을 해서 힘없는 의인들을 착취한다면 또 힘있는 악인들에게는 입에 발린 거짓 예언으로 비위를 맞추는 말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혀를 잘라버릴 것이다.

그런 거짓된 가르침을 함부로 전하면서 목에 힘주고 자신을 높인다면 그 더러운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은 오늘 시편 기록자가 말한 것처럼 더러운 가르침으로 마치 성폭행 당하는 것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한 가르침은 우상 숭배이고 영적인 간음인데 강제로 계속 들어야 한다면 영적인 강간인 것이다. 이제 강단에서 거짓된 빈말들 아첨하는 말들 교만한 말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완벽히 정제된 순수한 금과도 같은 귀한 하나님 말씀만 강단에서 선포되길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편 기록자가 구해달라는 말의 뜻이다.

시편 강해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