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할 때는 가짜 믿음과 진짜 믿음이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이 닥치면 가짜와 진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편 13편도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평안을 얻는 찬송이다. 처음에는 시편 기록자에게 몰아 닥친 고난이 주는 두려움은 엄청난 파도와 같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아주 낮 듯 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난이 주는 두려움은 점점 낮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점점 높아만 간다. 기도를 마친 뒤 고난이 주는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하늘 끝에 닿을 만큼 높아졌다. 그 결과 시편 기록자는 거울처럼 비치는 호수같이 되어 기쁨으로 찬양하며 춤을 춘다.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며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1-2절은 ‘어느 때까지’ 라는 말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첫번째 “어느 때까지” 라는 말이 이어지는 말은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라는 말이다.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던 고통의 시간들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까지이니까” 라는 말 뒤에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라고 한 것이다. 첫번째 “어느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어느때 까지”에 이어지는 말은 “숨기시겠나이까” 이다. 이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동안 그토록 다정했던 그녀에게서 갑자기 답장이 없다. 처음엔 무슨 바쁜 일이 있겠지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며칠 째 계속 문자를 보내도 답장이 없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면 마음이 변해서 의도적으로 외면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는 그동안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고난 가운데서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전혀 반응을 안하시니 처음에는 잊었나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세번째 ‘어느 때까지’ 부터는 주어가 하나님에서 시편 기록자 자신으로 바뀐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라는 말에서 ‘번민’ 이라 번역된 말은 원어에서는 “상담 거리” 또는 “고민 거리” 라는 뜻이다. 새번역은 RSV를 따라 ‘아픔’ 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고민이 생겼고 하나님께 아뢰고 조언을 들어야 할 거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원어대로 직역한다면 “어느 때까지 고민 거리를 내 영혼에 넣어두어야 합니까?” 라는 뜻이다.
원래 상담이란 내담자가 상담가에게 자신의 고민거리를 다 털어놓는 것이다. 그러면 상담가의 역할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내담자 안에 있던 고민거리는 상담가의 영혼 안에 맡겨두고 가게 된다. 그것이 현대의 상담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가까운 사람들이 상담자의 역할을 했지만 현대에는 그런 고민을 말할 만큼 믿을 사람이 없기에 전문 상담가에게 돈을 주고 다 쏟아놓고 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그러한 고민거리를 다 하나님께 다 쏟아놓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상담자이신 하나님께서 아예 외면하고 들어주지를 않으시니 모든 고민을 자기 영혼 안에 넣어 둘 수 밖에 없어 힘들어 하는 것이다.
네번째 “어느 때까지” 는 원어에는 생략되어 있고 세번째와 접속사도 없이 세번째의 “어느 때까지” 에 연결되어 있다.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라는 말은 “언제까지 슬픔을 내 마음에 넣어 두어야 합니까?” 라는 뜻이다. 앞에서 고민 거리가 근심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슬픔이란 뜻이다. 넣어 두는 장소도 처음에는 몸과 영혼 모두를 포괄하는 말인 영혼 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 속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고민거리가 시편 기록자 자신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민거리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못하다 보니 그 고민거리가 점점 더 깊어져서 나중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 것이다. 그 슬픔은 이제 몸 전체에 있지않고 심장에 있다. 슬픔에 압도되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아픔이 시편 기록자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늘 다정하게 속삭이며 그렇게도 상냥하게 대해주던 연인이 싸늘하게 등을 돌린 후의 마음 상태와도 같다. 처음엔 고민거리지만 나중에는 심장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과도 같다.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살게 되는데도 그 당시에는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 관계가 단절된데서 오는 가슴앓이이다. 1978년 쉰듯한 목소리로 “It’s a heartache” 라고 절규하듯 불렀던 Bonnie Tyler의 노래가 생각이 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가슴앓이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듯 느껴지자 시편 기록자는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는 고민거리에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고통으로 발전하는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이지 하나님과 믿는 자의 관계가 연인관계와 같다고 비교한 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길 바란다.
본래 시편 13편 기록자는 모든 고민거리와 슬픔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던 의인이었다. 시편 73편에 보면 악인이 어떤 사람이고 의인이 어떤 사람인지 비교되어 나타난다. 먼저 73:9절에 보면 악인은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는도다” 라고 했다. 영어의 ESV, NASB, RSV는 “their mouth against the heavens” 라고 번역했다. 악인들의 입이 하늘에 있다는 말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against” 라는 말을 삽입한 것이다. 그러나 원어는 분명히 “in the heavens” 이다.
입이란 입 밖에 있는 입술이다. 바깥 입술이 하늘을 향하여 거룩한 척 떠들고 있다는 것이다. 말로는 그보다 더 거룩한 사람이 없기에 입술은 하늘들 안에 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혀는 온 땅을 두루 다니며 떠들고 다니는 아주 우스운 그림이다. 따라서 악인들은 바깥에 있는 입술으로는 하나님께 향하고 거룩한 척 떠들지만 진짜 말하는 입술 뒤에 있는 혀는 땅에 두루 다니는 자들이다.
그러나 73:28절에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의인의 모습이 나온다. 의인은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라고 했다. 입술만 하늘을 향한 악인과는 달리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이 의인인 것이다. 시편 13편의 기록자도 자신의 고민거리와 슬픔을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다 내어놓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께 피하길 원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가 아니면 말로만 하나님께 맡기는가의 차이이다.
처음 두개의 언제까지는 하나님이 주어였고 그 다음 두개의 언제까지는 시편 기록자 자신이 주어였다. 이제 2절 뒷부분에 나오는 “어느 때까지”는 대적들이 주어이다. “어느 때까지 내 원수들이 나를 치며 자랑하게 두실 것입니까?”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대적들이 이렇게 시편 기록자를 향해 자신들을 높이는가? 이는 앞에서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를 더 이상 보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대적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의 고민과 슬픔을 다 맡아 주시고 시편 기록자를 감싸 주신다면 대적들은 절대로 시편 기록자를 그렇게 무시할 수 없다. 저들은 하나님이 없다 생각하거나 하나님은 세상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실질적 무신론자들이기에 시편 기록자를 깔아 뭉개며 무시하는 것이다.
이 대적이 누구인가? Peter Craigie는 이 대적이 죽음일 것이라 했다(Peter Craigie, Psalm 1-50, 142). 아마도 2절에 나오는 고민거리와 슬픔이라는 말을 RSV 나 새번역처럼 아픔과 고통이라는 의미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3절 끝부분의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라는 말을 실제 죽음을 뜻하는 말로 문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Craigie는 시편 기록자가 죽음을 앞둔 병석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고쳐달라고 호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이제 죽음이 시편 기록자를 깔보고 조롱하며 높은 자리에서 으시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이 시편에 나타난 말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의인과 악인을 비교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사는 길인가 하는 것에 관한 중요한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계속 다음의 내용을 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숨으셨다면 기도하지 않아야 맞는 것이다. 완전히 자포자기 하고 그냥 멸망의 길로 가야 했다. 그러나 시편 기록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극단적인 단절의 고통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자가 진정한 의인이라는 것이다. 3절에는 세개의 명령어가 점층법으로 이어진다.
먼저 첫째 기도는 “나를 생각하사” 이다. 이는 새번역처럼 “굽어 살펴 주십시오” 라고 번역해야 옳은 말이다. 원어는 '보라' 는 뜻이 말이 잘 안통하기에 개역은 원어의 문자적인 뜻을 삭제하고 의미를 살려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보라는 말은 단순히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시편 기록자는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는 눈으로 자신을 살펴보아 달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새번역의 압도적인 한판 승이다.
그 다음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응답하시고’ 이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바라보신 뒤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랑의 목소리로 대답해 달라는 것이다. 이는 누가복음 15:11-32절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이 거지꼴로 돌아와 용서해 달라고 엎드렸을 때 따듯한 목소리로 응답하는 모습과도 같은 반응을 구하는 것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세번째 간구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 이다. 원어에서 이에 뒤따라 오는 말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라는 말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도저히 눈을 뜰 힘도 없을 만큼 힘이 없어져서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정말로 힘들 때는 눈을 뜰 수조차 없는 법이다. 이 말 때문에 Craigie는 이 시편 전체를 병에 들어 죽을 위기에서 드린 시편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영적인 위기를 나타낸다.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사라진 위기를 가리킨다. 어쩌면 영적으로 죽을지도 모를 위기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부르며 눈을 번쩍 뜨는 것 같은 새 힘을 다시 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과의 신뢰의 관계만 확인되면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일주일간 답장이 없어 변심했다고 생각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시름 앓던 사람에게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문자 메시지가 온 것과도 같은 상황이다. 변심하고 돌아선 것이 아니라 사고가 생겨 연락을 못했다며 다시 연락이 왔다면 죽어가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기뻐 뛸 것이다.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죽어가던 사람이 눈을 번쩍 뜨는 것 같이 새힘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금 하나님 품에 안겨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달라는 것이다.
4절에 보면 이처럼 영적으로 죽어가는 시편 기록자를 보고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 라고 말할 상황에 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다시금 새 힘을 주지 않으시면 잠시 후 심판의 카운트가 시작이 되고 곧 원수에게 승리를 선언하고 그의 팔을 들어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4절 뒷부분에는 대적들이 등장한다.
Craigie는 앞에서 계속 단수로 나온 ‘원수’ 는 의인화된 죽음이고 복수로 나온 ‘대적들’은 일반적인 시편 기록자의 대적들이라고 설명하지만 설득력이 없는 설명이다. 이를 고대의 운동경기나 결투의 그림으로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시편 기록자와 맞서 싸우던 원수는 시편 기록자가 죽어가자 의기양양했던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흔들릴 때에 대적들이 기뻐한다고 한 것은 원수를 응원하던 자들이 환호하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영적 위기에서 비틀거리고 곧 쓰러져 죽을 듯하자 원수를 응원하던 무리들이 기뻐하는 것이다. 기뻐한다는 말은 본래 빙빙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악인들은 의인들이 자신의 모든 고민거리와 슬픔을 하나님께 다 맡겨드리고 평안을 누리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 반대로 악인들은 의인이 모든 고민거리와 슬픔을 혼자서 끌어안고 쓰린 가슴으로 휘청거리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그렇게 자신이 쓰러져서 악인들이 이겼다 라고 소리치고 춤추며 좋아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 시편 기록자의 간절한 기도이다.
이렇게 기도를 마친 뒤 갑자기 상황은 반전된다. 기도의 결과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한 후 첫째 변화로 5절에서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라고 한 것이다. 주의 사랑이라는 말은 원어는 헤세드(הסד) 라는 말인데 새번역처럼 “한결 같은 사랑” 이라고 번역해야 맞는 말이다. 이는 실수하고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근거해서 계속 용서하시며 한결 같은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것을 말한다.죽을 것 같은 위기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져 가다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새힘을 얻어 하나님의 품에 털썩 쓰러지듯 안기는 모습이다. 대적들은 곧 쓰러져 죽을 줄 알았고 자신들은 승리의 춤을 출 줄 알았다. 그러나 갑자기 반전이 일어난 것은 기도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기도한 후 둘째 변화는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다. 첫째 변화는 계속 하나님의 사랑 안에 안겨 있는 모습인데 이제 계속 기뻐하는 모습이다. 계속 기뻐한다는 말은 앞에서 시편 기록자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악인들이 기뻐 빙빙 돌며 춤을 출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도 악인과 의인의 비교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나 지금이나 악인들은 자신들의 경쟁자들이 쓰러질 때 기뻐 춤을 춘다. 그러나 의인들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을 때 기뻐 춤을 춘다.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라는 말은 특별한 일이 일어나서가 아니다. 주님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그 상태 자체가 구원이다. 그걸 깨달았을 때 기뻐 춤을 춘다고 한 것이다. 우리 고양이 하비는 언제나 내 품에 안겨있는 것을 좋아한다. 화장실에 가도 변기에 앉아 있는 내 무릎에 앉고 아침에 성경을 묵상할 때도 내 무릎에 앉아 그릉그릉 거리며 기뻐한다. 의인은 우리 고양이가 내 품에 안겨 있을 때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 가장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인과 악인의 가장 큰 차이이다.
시편 31편 기록자도 역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있다. 31:6절에서 무가치한 우상에 관심을 두는 자들을 미워하면서 자신은 여호와만 의지한다고 했다. 오늘날도 악인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물질과 명예 따위에 관심을 두며 상대를 이기고 자신이 그런 것들을 차지하면 기뻐 춤을 춘다. 하지만 시편 31편 기록자는 그런 자들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대신에 자신은 여호와의 품 안에 기대어 있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31:7절에서는 시편 13편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 안에서 기뻐한다고 했다. 따라서 이 기쁨의 춤은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할 때 그 분의 한결 같은 사랑의 보호막 안에서 기뻐 춤추는 것이다.
이제 6절에서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라고 했다. 이는 “내가 계속 노래합니다” 라는 뜻이다. 이 노래한다는 말은 주로 악기 없이 여럿이 목소리만으로 합창하는 것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시편 기록자는 구원의 은혜를 함께 입은 사람들과 성전에서 함께 기쁨의 찬송을 부르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자신을 너그럽게 대해 주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 영혼이라는 말은 육체와 영혼 전체를 합한 인간 존재 전체를 나타내는 말이다. 육체가 고통을 당하면 영혼도 함께 고통을 당하고 영혼이 고통을 당하면 육체도 함께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해지고 단절되는 고통이 훨씬 큰 고통이라고 시편 기록자는 말한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분명히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육체의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 뛰며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의 지속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담의 범죄로 완전히 단절되었지만 구약성경에 보면 계속해서 범죄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으로 연결된다. 그러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이 마지막으로 나타나 완성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것이다. 비록 범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이것은 거듭남의 기쁨이다.
하지만 시편 기록자가 노래한 것은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 보고 과거에 한결같이 자신을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거듭남의 기쁨에서 멈추지 말고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를 하며 그분의 한결 같은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경험이 오랫동안 쌓이면 어떠한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확신이고 이것을 믿음이 자란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잘해서 나를 계속 품에 안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를 너그럽게 대하시고 계속해서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안아 주시는 것이다.
사진: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773) by Pompeo Ba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