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편에는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비교하며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구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간구하는 내용이다. 이 시편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1절은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오늘 시편에 따르면 머리가 나쁜 사람이나 우둔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하나님은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은 자신들의 삶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믿는 실질적 무신론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매우 똑똑하고 지혜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1:21-22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라고 했다. 말로는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경배하지도 않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히브리 지혜문학에 따르면 어리석은 사람의 반대말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입고 그 한결 같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실천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언약을 믿고 그 언약을 따라 하나님께 받은 한결 같은 사랑을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적 특성인 한결 같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인 것이다.
사무엘상 25:25절의 나발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사무엘상 25장을 보면 다윗은 나발에게 멸시를 당하고는 보복하려고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얼른 다윗을 쫓아가 말하는 장면이다. 사무엘상 25:25절은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라고 했다. 나발은 다윗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해서 어리석은 자이고 아비가일은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어 지혜로운 자인가? 아니다. 나발은 다윗은 나발의 양떼를 지켜주었는데도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자였기에 아무 영양가 없다고 판단하여 무시하고 사랑을 베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미련한 자 인 것이다. 반대로 아비가일은 그간 다윗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하고 한결 같은 사랑을 베풀려 했기에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다.
로마서 1:22에 따르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주 지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지식을 근거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한결 같은 사랑을 남에게 베풀지 않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이 살아가기에 어리석은 것이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시편 기록자는 이어서 설명한다. “그들은 부패하고” 라고 했다. 부패했다는 말은 완전히 썩었다는 말인데 본래 구덩이를 파다 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직으로 무덤을 파지 않고 바위 벽에 수평으로 무덤을 판다. 바위 벽에 무덤을 파고 시체와 함께 있던 못쓰게 된 옷과 그릇 등이 썩은 모습을 묘사하는 그림이다. 이는 시체에 입혀진 옷이 시체와 함께 썪었고 못쓰게 되었고 그 그릇들도 썩은 것이다. 거룩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썩었다는 것이다.
또 ‘그 행실이 가증하니’ 라고 했다. 이는 “완전히 더러운 행위만 하니” 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들을 말한다. 동성애나 인신공양이나 부정한 짐승을 먹는 것이나 우상의 신전에서 성행위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앞에서 나온 부패했다는 말과 연결한다면 가증하다는 말은 부정한 짐승인 독수리나 까마귀가 이러한 썩은 옷을 찢고 그 시체를 파먹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경배하지도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썩은 시체와 같은 세상의 탐욕에만 눈이 어둡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 한결 같은 사랑도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한결 같은 사랑을 베풀지도 않는다. 오직 썩은 고기가 있는 곳만 찾아 다니는 사람이 바로 악인이다.
또 이어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구나” 라고 했다. 이는 악인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은 구조로 된 말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같은 말이 3절의 “선을 행하는 자” 에서도 나온다. 선을 행한다는 말은 착한 일 좋은 일을 한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입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거나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거나 상관없이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푸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시편 14편의 어리석은 사람을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이방 나라들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도 오랫동안 그렇게 가르쳐왔다. 하지만 구약성경 전체의 문맥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구약성경은 시체 파먹는 까마귀나 독수리처럼 백성들을 착취하며 탐욕을 추구하다가 망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반복되어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바로 하나님 말씀을 이용해서 백성들을 착취하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다.
2절에서는 이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사람의 반대말인 지혜로운 자를 찾고 계시는 모습이다. 이는 1절 끝부분의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말과 연결된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라고 했다. “굽어 살피사” 라는 말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는 모습이다. 인생이란 원어에서 사람의 아들들이다. 내려다 보시는 목적은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보시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 보려 하시는 것이다. 보려 하신다는 말은 감지한다 발견한다는 뜻이다. 하늘에서 죽 훑어 보시다가 “아, 저기 하나 있구나!” 라고 하시는 모습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 란 말에서 찾는다는 말은 주의 깊게 찾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주의 깊게 찾는 사람이란 하나님 말씀에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주의 깊게 찾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주의 깊게 찾아서 행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있는지 내려다 보신다는 것이다.
3절은 그렇게 찾으신 결과를 설명한 것이다. “다 치우쳐 함께” 라고 했다. ‘치우쳐’ 라는 말은 본래 떠났다는 뜻이다. 사무엘상 16:14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라는 말에서 ‘떠나고’ 라는 말이 바로 ‘치우쳐’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배교하여 하나님을 떠났다고 할 때도 쓰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사람을 찾고 보니 모두가 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방 나라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을 떠났다고 해석하는 것은 여기서부터 말이 안된다. 떠난다는 말은 본래 함께 있었던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방나라 사람들은 본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떠났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샅샅이 훑어 보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 것이다.
또 “더러운 자가 되고” 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을 말한다. 이어서 원어는 “선을 행하는 자가 없구나 하나도 없구나” 라는 시적인 표현이 이어진다. ‘선을 행하는 자’ 란 1절에서 “선을 행하는 자”와 똑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입고 그 사랑을 베푸는 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은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인가? 4절은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라고 묻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잘나서 이룬 줄 생각하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행하는 행동에 대해 “내 백성을 빵 먹듯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 라고 했다. 이 구절을 보면 악인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착취해서 자기들만 배불리 먹는 것을 내 백성을 빵 먹듯 먹는다 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먹어버리는 부정한 독수리와 같은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5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악인들에게도 드러난다. 5절에서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고” 라고 했기 때문이다. 악인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어서 6절은 원어에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세대에 세대를 걸쳐 의인들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의인들에게 기적이라도 보여주셔서 평안을 주셨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의인들은 악인들의 착취 가운데에서 고생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평화롭게 살았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악인들은 전율을 느끼고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악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6절에 보면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에 나온다. 가난한 사람은 광야에서 오직 여호와께서 공급하여 주시는 것만 먹고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나온 말이다. 오직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여호와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여호와의 한결같은 사랑만 바라는 사람이다. 이는 시편 기록자 자신을 말한 것이다. 악인들은 이런 사람들이 한결 같은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계획을 좌절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러한 가난한 자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악인들은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7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이제 자신의 구원의 문제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으로부터 나오게 해 달라는 것이다. 언제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인가 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 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 포로된 곳에서 해방시켜 돌아오게 하신 사건을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1절에서 이스라엘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로 시작한 것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한다. 만약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되돌린다고 해석하면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지은 시가 된다. 문맥상 이부분의 의미는 이제 악인의 길로 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돌아서게 해 달라는 것이다. 악한 길로 가던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고 그 앞에 엎드려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을 깨달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때 “야곱이 기뻐할 것이고” 라고 했는데 이는 원을 그리며 돌며 춤을 춘다는 뜻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악한 백성들을 돌아서게 하셨을 때 빙빙 돌면서 기쁨의 춤을 춘다는 것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이다. 또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라” 했다. 즐거워한다는 말은 기쁨의 춤을 춘 뒤 하나님의 잔치에서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는 지혜있는 삶을 계속 지속하며 기뻐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바울은 로마서 3:10-18절에서 이 시편을 인용했다. 모든 인간들은 다 어리석은 자들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고전 1:23-25)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그 사랑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가 되는 비결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백성으로 살아왔다가 잠깐 회복되고 또다시 어리석은 백성으로 사는 모습이 반복되었다. 313년 기독교 공인 이후 종교개혁까지 종교 지도자들은 썩은 고기를 탐하는 독수리처럼 살아왔다. 종교개혁 때 이후 오늘날까지도 역시 썩은 고기를 탐하는 독수리같이 백성들을 빵으로 먹듯 먹어치운 어리석은 자들이 교회를 지배해 왔다.
오늘날 신학생들이 되기를 원하는 모델도 어쩌면 그러한 탐욕스러운 독수리 같은 태도로 성공한 목회자일지도 모른다. 물론 말로는 다들 루터와 캘빈 같은 목회자가 되겠다고 하지만 물질과 명예와 권세를 탐하면서 타락의 길을 걷는다. 그것을 날세워 비판하는 목회자들도 있지만 사실 그러한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신도들도 역시 직장에서 아랫사람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자신만 출세하려고 애를 쓰는 경우가 많다. 성공한 크리스천 정치가나 기업가라 하는 사람들도 역시 모두 다 썩은 고기 같은 세상 것들을 차지하기 위해 이전투구의 삶을 살아간다. 그 중에 남을 짓밟고 올라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며 간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썩은 고기 같은 세상 것을 얻었다고 자만하는 것도 어리석은 삶이지만 이러한 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결코 지혜로운 삶을 사는 의인은 아니다. 개혁의 칼날은 남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시편 14편의 기록자에 따르면 자기를 향하고 자기를 수술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그렇게 수술하라고 권면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해야 한다.
오늘 시편에 따르면 지혜로운 자란 자기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아도 항상 한결 같은 태도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다. 남을 비판하기 보다는 먼저 자신부터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근거해서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그러면 복을 받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칼끝으로 자신을 수술하는 것과 같은 고통이다. 시편 기록자는 그러한 자신을 가난한 사람이라 했다.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복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한결 같은 사랑을 찾으며 사는 자가 진짜 지혜있는 자라는 것이다.
우리도 나만 지혜롭게 해 달라고 하면 안된다. 남을 비판만 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 사람들처럼 탐욕을 추구하며 사는 성도들에게도 항상 한결 같은 사랑을 베풀며 그들이 전율을 느끼고 두려워할 만큼의 사랑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때 모두 함께 빙빙 돌면서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일 소망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계속 함께 기뻐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장차 주님 다시 오실 날 입을 영광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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