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이 싸울 때 흔히 하는 말 중에 “니까짓게 뭔데” 라는 말이 있다. 씨스타 라는 걸그룹이 부른 노래 중에 “니까짓게 뭔데” 라는 노래도 있다. 그 노래의 중간에 반복되는 말은 “니까짓게 뭔데 왜 나를 아프게 해” 라는 말이다. 이 노래 가사를 쓴 사람은 교제하던 상대보다 자신이 낫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상대에게 차이자 “니까짓게 뭔데 왜 나를 아프게 해” 라고 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은 높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교만이 점점 커져서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 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시편 기록자는 반대로 자신에 대해 “내까짓게 뭔데요” 라며 자신을 낮춘다. 그 앞 뒤를 주의 이름이 정말 위엄있다는 감탄의 말로 감싸고 있다.
시편 기록자는 1절에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고 찬양한다. 개역의 “아름다운지요” 라고 번역된 말은 원어에서는 새번역처럼 위엄이 있다 라는 뜻이다. 이 말은 아주 높은 파도나 큰 배나 큰 나무등을 보고 감탄할 때 쓰는 말이다. 또 위대한 왕이나 큰 나라를 보고 감탄할 때 하는 말이다. 시편 93:3-4절에는 홍수가 나서 큰 물들이 모든 것들을 다 부수며 솟아 오르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 보다 크니이다” 라고 했다. 여기서 크다 라는 말이 8:1절의 아름답다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1절에서 주의 이름이 땅 위에서는 그 엄청난 크기의 위엄이 넘친다 했다. 이와 짝을 이르는 말은 하늘 보다 더 위에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는 말이다. 땅 위에서는 주의 이름에 엄청난 크기와 힘의 위엄이 있고 하늘 저 높은 곳에는 주의 이름에 별들처럼 반짝이는 영광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는 낮에는 땅 위에서는 바다의 큰 파도와 높은 산들을 보며 주님의 이름의 장엄함을 느낀 것이다. 또 밤에는 하늘의 수많은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그 별들보다 더 반짝이는 영광을 주의 이름을 통해 느낀 것이다.
이러한 찬양은 2절을 보면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온다. 이는 젖을 떼고 나서 걸어다니는 어린 아기들과 젖을 먹고있는 아기들을 가리킨다. 이런 어린 아기들이란 순수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잘못해석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어른들이 보살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가리킨다. 이런 아기들의 입을 통해서 주님의 장엄함과 반짝이는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가 흘러 나온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이라는 말은 시편 기록자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의 약함과 미천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엄청난 크기와 빛나는 영광이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와 대조되면서 주님은 더욱 더 커지고 빛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 주의 이름의 장엄함과 그 영광을 찬양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2절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술을 통해서 주님은 강함을 세우셨습니다.” 라는 뜻이다. 개역에서는 “권능을 세우심이여” 라고 했다. 강함을 세운다는 말은 강함을 건축한다는 뜻이다. 젖먹이와 같이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능력도 없는 미천한 존재들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자 하나님은 강력한 보호막을 건축해 주셔서 찬양하는 이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들의 행동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이다.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교만한 인간들을 가리킨다. 저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니까짓게 뭔데!” 라며 공격하는 교만한 인간들이다. 자신들 스스로가 가장 강한 줄 착각하면서 어린아이와 젖먹이 같이 아무런 보호능력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미천한 자들이 주님의 위엄을 찬양할 때 강력한 보호막이 쳐지고 대적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은 강력한 요새와 보호막을 세우셔서 우리를 대적들로부터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3절을 보면 시편 기록자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절에서 저 하늘보다 높은 곳까지 주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말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달들을 보면서 한 말이다. 우리 예슬이가 어릴 때 우리 가족은 지리산 거림골에서 텐트를 치고 잔 적이 있다. 그 때 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았는지 예슬이는 ‘와, 징그럽다!’ 라는 표현을 썼다. 하늘이 새하얗게 보일 정도로 별들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3년전 우리 성도님들과 스모키 마운틴에 갔을 때도 온 하늘에 빈틈없이 뿌려져 있는 별들을 보고 모두가 감탄한 적이 있다. 도시에 살면 도시의 불빛과 공기의 오염 때문에 별이 잘 안보이지만 산골에 가면 아직도 그러한 별들을 볼 수 있다. 이 시편은 다윗의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왕이 되기 전 어릴 적 양떼를 돌보며 밤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을 바탕으로 쓴 것일 것이다. 다윗은 그처럼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면서 주의 영광이 장엄한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가득 깔려 있다라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장엄한 하늘을 손수 만드셨기 때문이다. 3절에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라고 했다. 그처럼 광대한 우주도 하나님의 크기에 비하면 하나님의 손가락 크기 만큼도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우주가 하나님의 손 크기 만큼만 되었어도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셨다 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그림처럼 표현한 것이다.
이어서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이라 했다. 달과 별들은 주께서 직접 설치하셨다는 뜻이다. 마치 집안에 액자를 걸 듯 하나님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그 우주 공간에 달과 별을 걸어놓으신 것이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을 하나님이 다 하나 하나 걸어 놓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역시 그림처럼 표현한 것이다.
다윗은 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그 우주 너머에 있는 우주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위엄을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이라고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을 생각하며 그렇게 쓴 것이다. 우주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 앞에 서고 보니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쉬운 말로 하면 “내 까짓게 뭔데요!” 라는 감탄사이다.
사람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에노쉬인데 인간의 약함이나 유한함을 강조한 말이다. 그릇으로 말하면 살짝 떨어뜨리기만 해도 박살이 나는 그릇과도 같은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렇게 약한 존재를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셨다는 것이다. 또 이어서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라고 했다. 인자 라는 말은 “벤 아담”인데 흙의 아들이란 뜻이다. 질그릇 같은 인간은 흙으로부터 왔기에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흙의 아들인 시편 기록자를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셨다는 것이다. 돌보신다는 말은 원래 “찾아와 주셨다” 라는 뜻이다. 광대한 우주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주 안의 작은 먼지만도 못한 다윗을 기억해 주시고 찾아와 주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은 한없이 높이고 나서 더 높일 수가 없게 되자 그 다음에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하나님을 상대적으로 높였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높이고 난 뒤에는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우리의 삶을 통해 가장 겸손한 삶을 살면 하나님은 그만큼 더 높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은 낮추면서 그 입술로 하나님의 입술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억하셔서 찾아와 주신다는 것이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찬양하는 사람을 찾아와 주셔서 하신 일이 나와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워주셨다는 것이다. 개역성경에는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되어 있고 히브리서 2:7절에서도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역시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라고 했다. 이는 70인역 구약성서에서 엘로힘이란 말을 천사로 번역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당시의 성경 해석자들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이 말을 천사로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엘로힘은 분명 하나님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개역개정은 이를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각주에 “또는 천사” 라고 달아 놓았다.
1-3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한없이 높이고 또 4절에서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었다. 그러나 5절에서 다윗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다윗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며 찬양을 한 다윗을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조금 낮게 하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주시기 까지 하셨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된 존재이다. 창세기에 보면 “종류대로” 라는 말이 반복되어 있다. 모든 생물들은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개 종류 고양이 종류 이렇게 비슷한 류로 만드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 했다. 원래부터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을 닮아 가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인간들은 인간을 “영장류” 라고 분류해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종류대로” 라는 식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보다 조금 낮은 그런 존재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에게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셨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신 것은 절대로 아니다. 시편 기자는 분명히 주님의 위엄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찾아와 주셔서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신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귀한 신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고정된 신분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행동에 따라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형상인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인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신 것은 특별한 일을 맡기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신것이다. 특별히 모든 살아있는 동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7-8절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사람이 기르는 가축들과 자연에서 사는 야생동물들을 다 인간이 다스리도록 되어있다.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도 모두 다스리도록 권한을 주셨다.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란 고래나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괴물들을 가리킨다. 인간들보다 훨씬 크고 강하지만 인간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의 위엄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이처럼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을 다스리라고 주신 권리이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의 위엄을 찬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삼으셔서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9절에서 다윗은 다시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라고 찬양하며 마친다. 우리가 미약한 존재이지만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때 우리를 기억해 주시고 찾아와 주셔서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씌워 주시고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맡기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다윗처럼 “사람이 무엇이기에” 라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교만한 마귀와 짐승들을 닮아서 “니까짓게 뭔데” 라고 교만을 떤다. 그러나 우리는 “내까짓게 뭔데요” 라고 겸손히 우리를 낮추어야 하는 존재이다. 단순히 하나님을 향해서만 우리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어 섬기신 그 본보기를 따라 교회 안에서 낮은 자리에서 서로 섬겨야 한다.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 위엄을 찬양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는 길이다.
마태복음 21:15절에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전 뜰에서 사람들을 고쳐주셨다. 그 때 어린아이들이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 하고 외쳤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화를 내며 따졌다. 예수님을 향해 메시야라고 외치는데도 왜 가만히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본 일이 없느냐?” 하셨다. 이는 오늘 말씀인 시편 8:2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쓴 것인데 예수님은 그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바로 그 찬양 받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네까짓게 뭔데 메시야가 받을 찬양을 받느냐고 항의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시편 8:2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바로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늘 시편의 “주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았다. 우주만물을 손가락으로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27과 에베소서 1:22절에서 시편 8:6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라고 했다. 히브리서 기록자도 2;6-8에서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 예수님이라 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시편을 읽으며 찬양 받으실 주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우리도 다윗처럼 “내까짓게 뭔데요” 라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해야 한다. 우리가 이처럼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고백하고 찬양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보호막을 세워주셔서 지켜주시고 우리를 기억하시고 찾아와 주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씌우셔서 하나님 보다 조금 낮은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대신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주신다.
사진: George Hodan, "Nightly Sky With Large Moon," Accessed on Nov. 23, 2016 at www.publicdomainpictur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