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편의 제목을 보면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 라고 되어 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광야에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이 광야에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는 사무엘하 15-17장에 나오는 압살롬의 반란 때이다. 그 때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쫓겨 죽을 위기에 있었다. 이보다 더 힘들고 슬픈 위기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사무엘하 16:5-8절에 보면 시므이라는 사람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나던 다윗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쫓기는 것만해도 정말 죽도록 힘든데 사울의 가문인 베냐민 지파의 시므이가 저주하며 돌까지 던졌던 것이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도 시므이를 내버려 두라며 16:12절에서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라고 말했다. 시편 63편은 바로 이처럼 벼랑 끝에 매달려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만 붙잡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찬양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달리다가 죽도록 힘든 환난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이 시편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I.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함(1-4)
"하나님,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부르는 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옛 언약을 바탕으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우리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광야에 있었기에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까이 있기를 애타게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목말라 하며 자신의 영혼도 애타게 주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목마름과 그리움은 물이 없어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몸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다. 고난 가운데 있기에 자신의 영혼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느낌이기에 "나의 하나님! 어디 계세요?" 라고 외치며 사막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물을 찾듯 애타게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힘든 고난 중에 있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과거의 좋았던 때를 되새기기 마련이다. 마치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는 꿈을 꾸는 것과도 같다. 2절은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과거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로 하나님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1절의 모습과 대조가 되는 모습이다.
3절은 복음성가에도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메마른 광야에서 죽어가는 사람과도 같았던 다윗은 마치 꿈을 꾸듯 과거의 좋았던 때를 되새기다가 다시 제정신이 들어 현실로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응답 받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메마른 사막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태에서도 자신의 생명보다는 주의 인자 즉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이다.
4절은 그렇기 때문에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내 손을 든다고 했다. 송축한다는 말은 본래 무릎을 꿇는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또 손을 든다는 것은 찬양을 한다는 뜻이다(Jamieson, Fausset, & Brown, 366). 다윗은 지금 광야에서 "나의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고 있기에 어떤 고난 중에도 평생동안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그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정말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한다. 그러나 큰 어려움을 당할 때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시편 기록자처럼 그렇게 간절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II. 하나님의 도움에 만족함(5-9)
시편 기록자는 비록 육신적으로는 메마른 사막에서 대적들에게 쫓기어 죽을 지경이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을 드리며 새 힘을 얻고 있다.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신 것을 골수와 내장에 붙은 기름을 실컷 먹은 것에 비유한다. 비록 광야에서 쫓기고 있는 상태였지만 하나님께서는 2절에서 회상한 과거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던 때보다 더 좋은 것으로 먹여주셨다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새번역은 골수와 기름을 "기름지고 맛깔난 음식"이라고 의미를 살려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름 덩어리를 나쁜 것으로 여겨 다 떼어내지만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양을 잡아도 얼마 안나오는 골수와 내장에 붙은 기름은 양고기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여겼다. 오늘날도 최고급 고기 부위는 모두 다 지방이 고루 섞인 부분이다. 오늘날 요리 전문가들도 말하길 모든 음식 맛은 지방의 맛이 좌우한다고 한다.
먹을 것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어 기진 맥진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이 골수와 내장에 붙은 고소한 기름으로 배불리 먹고나서 새 힘을 얻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한 다윗이 과거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보다 더 큰 힘을 얻고 기뻐하는 장면이다.
6절은 그 경험이 너무나 좋아서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좋았던 것을 다시 되새기며 주님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굶주리던 사람이 최고로 맛있는 요리를 먹고나서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잠자리에서도 그 먹었던 일을 되새기는 것과도 같다.
이는 또 사랑에 빠진 사람과도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누웠지만 그 황홀한 기쁨에 빠져 계속 사랑하는 사람만 생각하는 모습과도 같다.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황홀한 체험을 한 뒤에는 이제 두려움이 사라졌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기쁨이 가시지 않아 계속해서 주님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7절에서는 그러한 기쁨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기 때문에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즐거이 노래한다 했다. 주님의 날개란 원래 성전 법궤 위에 있는 그룹들의 날개아래를 말한다.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제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 자신을 보호하시며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 날개 아래서 그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8절에서 내 영혼이 주님께 매달린다는 말은 주님께 찰싹 붙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이는 마치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주님의 발을 붙잡고 매달리는 장면과도 같다. 그럴 때 주님의 오른손이 꼭 잡아주신다고 했다. 내 힘으로 대롱대롱 주님께 매달려 있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빠지고 결국은 놓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위기에서 주님께만 매달리는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는 오른손으로 꼭 붙잡아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환난과 핍박 중에도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양하고 기도를 드리면 우리에게 맛있는 최고로 맛있는 영의 양식을 먹여 주셔서 새 힘을 주시고 하나님께만 매달릴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매달리는 것만으로는 끝까지 버틸 수 없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만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 손을 잡아 주셔서 우리가 계속 하나님께 매달려 있을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만약 영적으로 계속 침체되고 있고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함이 없다면 우리가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기 보다 그냥 주저 앉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다윗처럼 환난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무릎을 꿇어 예배를 드려야 한다. 만약 여러가지 사정으로 못드리게 된다면 가정예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면서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다윗처럼 죽도록 힘든 일들을 겪고 있고 영적으로 침체될 때일수록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으로 하나님께만 간절히 매달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강하신 오른팔로 우리를 잡아 주시는 것이다. 어려울 때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주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예배와 기도를 게을리한다면 우리는 끝없는 나락으로 날개도 없이 계속 한없이 추락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III. 대적의 운명 (9-10)
앞에서는 벼랑 끝에 매달린 시편 기록자가 하나님께 매달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오른손으로 잡아 구해주시는 장면이었다. 이제 9절부터는 그 반대로 벼랑 아래로 추락하는 대적들의 운명을 묘사하고 있다. 9절에서 대적들은 땅 아래 깊은 곳으로 떨어진다 했다. 민수기 16:32에서 땅이 갈라져 모세를 대적하던 고라 자손들을 삼킨 것과도 같은 것이다.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땅이 갈라지게 하시고 모두를 그 아래로 떨어지게 한 것이다. 이제 시편 기록자의 대적들이 그와 같이 땅속 깊은 곳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는 절벽 바위 틈의 좁고 어두운 협곡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이다.
이러한 대적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 세상 영광을 예배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환난 중에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며 하나님만 붙잡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러한 사람들이 끝없는 협곡 아래로 떨어진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은 결국 우상숭배이고 하나님의 대적인 셈이다.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 세상 것들을 잡는 사람들은 썩은 밧줄을 잡은 사람과도 같다. 그래서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위기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것을 쉬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았더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잡아 주시고 그 낭떠러지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이다. 대적들은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셨기에 그 멸망의 낭떠러지 아래도 한없이 추락한 것이다.
10절에서 이렇게 땅 속 깊은 곳으로 떨어진 자들 중에 살아남은 자들이 칼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이다. 또 그 시체는 승냥이의 밥이 될 것이라 했다. 이들의 시체는 무덤에 묻히지도 못하고 승냥이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비참한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11절에서 우리의 왕은 하나님을 기뻐한다 했다. 여기서 왕은 다윗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Kidner는 다윗이 자신을 "나"라고 하지 않고 왕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부르셨다는 소명에 대한 확신이라고 했다(Kidner, 245). 그러나 다윗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시고 왕으로 세워주신 소명만 가지고 기뻐한 것이 아니다.
다윗은 자신이 낭떠러지에 매달려있던 것과도 같았을 때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만 붙잡았더니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과 자신을 왕으로 불러주신 소명을 연결시키며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왕인 자신이 환난 중에 하나님만 의지해서 구원을 받은 것을 보고 자신을 본보기로 삼아 따라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사람들은 왕을 찬송한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체험을 가지고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왕을 따르는 것은 결국 그 따르는 자들도 그렇게 왕을 따르며 절대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자들은 입이 막힐 것이라 했다. 진짜 사랑이 없이 말로만 찬송하는 자들의 입은 하나님께서 막아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으로 찬양하며 거짓으로 존경하는 척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따로 정죄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입을 막아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짓으로 찬양하고 경배하며 기도하며 다른 것을 붙잡고 있는 자들의 경배와 기도를 받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및 적용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벼랑 끝에 매달려 있던 것과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며 하나님께만 간절히 매달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오른손으로 붙잡아주셨다는 간증의 찬양이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잡아 주셔서 계속 하나님께 매달려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끝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악인들은 대단한 악인들이 아니다. 시편 기록자처럼 낭떠러지에 매달린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만 예배와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만 붙잡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악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악한 세상의 것을 붙잡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적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시편 기록자처럼 물 없는 사막에서 지쳐 쓰러져 있는 것과도 같은 어려움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지쳐 쓰러져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목숨을 걸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의 벼랑 끝에 매달려서 하나님만 붙잡는 길이다. 그러면 우리의 힘이 빠져 놓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계속 붙잡아 주셔서 멸망의 골짜기로 추락하지 않게 된다.
고린도후서 1:1-7절에서 바울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위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기 때문에 얻은 신체적 고난과 영적 고난이다. 바울이 증거하는 신체적 고난은 사도행전 14:19절에 나오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일이다.
그러나 바울이 경험한 낭떠러지는 신체적 고난이 아니라 영적 고난이다. 바울의 영적 고난은 고후 11:28에서 자신이 전도한 교회들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 때문에 받는 고난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세상 질서를 따라 교회를 다스리며 바울에게 등을 돌리고 바울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울이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그들이 주는 후원금을 거부하면서 마케도니아 성도들이 주는 헌금과 텐트 만드는 일을 통해 살아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짜 사도들은 이러한 바울의 환난의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저들은 자신들은 베드로와 야고보 같은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사도들의 추천을 받았지만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해서 모든 고린도 성도들이 등을 돌리게 했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있던 귀족 계층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하층민 출신의 성도들까지 다 바울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바울은 이처럼 고난이 넘칠 때 하나님의 위로가 넘친다고 했다. 이러한 고백은 오늘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과도 같다.
이러한 위로는 마치 자동차의 배터리가 충전되는 것과도 같다. 자동차의 배터리는 alternator의 고난을 통해서 충전된다. 그러나 alternator가 고장났다면 아무리 열심히 돌며 고난을 받아도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시켜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자리로 나갈 때 성령 충만함을 받고 재충전이 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고 새 힘을 충전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고난은 쓸데없이 고생만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아 재충전이 되게 하신 것은 모든 환난 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 말씀에서 시편 기록자가 자신이 환난 중에 재충된 된 것을 보고 자신의 백성들이 자신을 본보기로 삼아 따른다고 한 것과도 같다.
지금 환난 중에 있는가? 영적으로 침체되고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나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새힘을 주신다. 그렇게 환난 중에 하나님만 붙잡고 매달리는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본보기로 삼아 하나님만 붙잡고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주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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