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깊은 물속에 빠졌다. 131편 기록자도 130편처럼 어떻게 하면 깊은 물속에서 빠져 나와 회복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그 해답을 발견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그렇게 회복하면 된다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발견한 회복의 정답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I. 자신의 마음과 눈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라 (1)
1절의 교만이란 말은 원래 높다는 뜻이다. 이사야 2:15 절에 보면 “모든 높은 망대” 라는 말에서 높다는 말이 바로 교만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이사야 2:12-16에 보면 레바논의 백향목과 바산의 상수리 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높은 망대 튼튼한 성벽에서 다시스의 모든 배와 탐스러운 모든 조각물들이 낮아지는 날이라고 했다. 이처럼 높은 것들이 곧 교만을 상징하는 비유로 쓰였다. 원어에서 시편 131:1은 “내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고” 라고 되어 있다. 마음이 높은 나무나 높은 망대처럼 높아지는 것이 곧 교만이다. 마음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거나 존귀한 존재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자기 마음을 높이는 것이 교만의 첫단계이다.
자기 마음을 높이는 것이 어째서 나쁜 일일까? 자신을 높이는 일은 자신이 이룬 일을 자기가 했다 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면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자신이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이나 군인이 높은 자리에 올라도 자신이 능력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학자로 이름을 얻으면 자신의 머리가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세상 뿐 아니라 믿는 자들도 그렇게 세상을 따라간다. 심지어는 목회자들까지도 큰 교회 목사가 되면 자신이 설교를 잘하고 목회를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이루게 해 주신 것인데도 자신이 했다라며 자신을 높이는 것이 교만이고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자기 마음을 높이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역대하 26:16절에 보면 웃시야 왕의 교만을 볼 수 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라고 했다. 자기 마음을 높이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교만한 마음을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이룬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셨다 라고 고백한다는 뜻이다.
1절에서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라고 했다. 이는 원어에서는 “내 눈을 높은 곳에 두지 않았다” 라는 뜻이다. 눈을 높은 곳에 둔다는 말은 높은 곳의 보좌를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자기 마음을 높은 곳에 두는 사람은 실제로 눈을 높이 들어 높은 곳의 보좌를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높이 올려 높은 보좌에 두고 그곳을 바라보게 되면 그보다 낮은 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래서 높은 곳에 눈을 둔 사람들은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눈을 높이 들어 높은 보좌를 바라보며 모든 사람들을 자기 눈 아래로 보는 것이 교만의 두번째 단계이다. 시편 기록자는 이 두 가지를 다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교만의 세번째 단계는 그 높은 보좌를 얻으려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오늘 말씀 1절에 보면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라고 했다. 큰 일과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원어는 이러한 것을 입고 걸어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걷는다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위대한 일과 놀라운 일을 입고 다니면서 그것을 자기가 한 일처럼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아주 큰 것이란 말은 예레미야 45:5절에도 나온다. 이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여호야김에게 전하라 한 말이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고 했다. 여호야김은 뭔가 위대한 일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왕이라는 칭송을 듣고 싶어 그렇게 위대한 큰 일들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려는 것과 같기에 하나님은 그만 두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하셨다. 하나님 뜻이 아닌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에 죽을 죄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나서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동으로까지 옮기게 되면 생기는 결과가 잠언 18:12절에 나온다. 잠언 18:12절은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라고 했다. 마음이 오만하면 그 다음에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을 행하려고 하다가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과 눈은 교만을 가져오는 시작이다. 마음과 눈이 높아진 다음에는 실제로 그렇게 되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멸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야김도 멸망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하신 것이다.
로마서 12:3절에서도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라 했다. 믿음의 분량이란 그리스도의 겸손이라는 자를 가지고 자신을 재어보고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교회 성도들 중에도 자신을 높여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분량 즉 믿음의 자로 재어보고 믿음의 자인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행하라고 한 것이다.
시편 131:1절에 나타난 교만이 발전하는 단계를 보면 마음에서 시작하여 눈을 거쳐서 발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행동의 다음은 멸망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러한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낮추고 눈도 낮추고 행동으로도 겸손을 나타내야 한다. 그래야 잠언 18:12절의 말씀대로 멸망하지 않고 영광이 뒤따르게 된다. 우리가 우리를 낮출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신다.
II. 자신을 포기한 자의 영적 상태(2)
2절에서 이제 시편 기록자는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라고 했다. 고요하다는 말은 원래 비교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높인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바라보고 자신은 저 높은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그렇지 못하기에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요동치는 것이다.
자신은 명품 백을 들고 2캐럿 짜리 다이어 반지를 끼고 다녀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여인은 실제로는 명품백과 귀금속을 갖지 못하면 분노하게 된다. 그런데 명품백에 2캐럿의 다이어 반지를 낀 사람을 보면 그 사람과 비교하여 그 마음이 요동치고 질투심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남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들은 대체로 차에 대한 욕심이 많다. 자신은 메르세데스 벤츠 S500이나 BMW750을 타야 어울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은 25년된 현대 엘란트라를 타고 다닌다면 그 마음에 분노가 잠재되어 있게 된다. 그런데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런 고급차를 타고 나타나면 역시 그 마음이 요동치고 잠재해 있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공부를 한 학자들은 자신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들만큼 똑똑한 대학자인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논문을 발표해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면 역시 그 사람과 비교해서 분노가 폭발한다.
고양이가 자신이 고양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산다면 주인에게 복종하며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고양이가 자신은 사람이 되었어야 하는데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이렇게 고양이로 주인에게 복종하는 신세가 되었다며 신세한탄을 한다면 그 고양이는 틈만 나면 다른 고양이에게 주인을 욕하며 때로는 주인에게 대들며 힘든 삶을 살 것이다. 그런 고양이가 있다면 자신이 사람대접 못 받고 고양이 대접 받는 것에 대해 항상 울분을 토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분노의 폭풍우가 몰아친다.
그러나 시편 기록자가 내 영혼이 고요하다고 한 말은 자신의 영혼은 비교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요하고 평온하다라고 한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한 영혼을 갖게 된다. 귀금속과 명품백을 갖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런 것을 가져도 비교하지 않고 시기하지도 않고 오히려 평온하게 된다. 좋은 차에 관심이 전혀 없다면 똥차를 고급차 탄 친구 차 옆에 세우고도 아무런 질투심이 없다. 시편 기록자는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요하고 평온하다는 것이다.
그 평온함을 시편 기록자는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에 비유했다. 젖떼는 나이는 시편이 기록될 당시 일반적으로 3살 때 였다. 이 때는 혼자서 걷고 말하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나이다. 이 때 아이들은 뭐든지 다 자기가 한다고 한다. 자신이 뭐든지 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도 그만한 때에 뭐든지 해주려면 “내가 할래”라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하지는 못한다. 이 나이는 스스로 독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스스로 뭔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젖을 떼었지만 여전히 어머니 품에 안겨 있어야만 편안한 나이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낮추는 것은 단순한 자기 바하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젖먹이 아이들과도 같았다. 하나님께서 메추라기와 만나로 젖먹이듯 먹이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이룬 줄 알고 자기들이 하겠다고 하나님을 거역했다. 가나안 땅에 막 들어가 있을 때 만나도 그쳤고 그 때에는 자신들이 주변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모든 것을 이룬 줄 알고 점차 교만해졌다. 그래서 저들은 멸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기듯 하나님 품에 안겨 겸손히 하나님만 높이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III. 공동체를 향한 권면(3)
3절은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라고 했다. 자신이 깨달은 것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배워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폐허 속에 있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결론 및 적용
우리의 마음과 눈이 높은 곳을 바라보며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그 자리에 앉으려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더더욱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야망과 탐욕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늘 폭풍우가 몰아친다. 하지만 모든 야망과 탐욕을 푀하고 하나님 품 안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사는 사람의 마음에는 늘 평온함이 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까대는 사람들은 건전한 비판자인 척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는 것이다. 목회에 성공하여 대형 교회를 이룬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미자립 교회 목회자가 대형교회 목회자보다 더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은 아니다. 단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건전한 비판으로 포장해서 터트리는 것이다.
이 시편의 기록자 처럼 진짜로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주님 앞에 섰다면 그 마음에 고요함과 평온함이 있어야 한다. 세살짜리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젖을 만지는 듯한 평온함이 있어야 한다. 2캐럿짜리 다이어반지에 루이비똥 가방을 든 친구를 만나도 마음에 고요함과 평온함이 있어야 한다. 몇억씩 하는 차를 타고 온 친구를 만나도 그 마음에 고요함과 평온함이 있어야 한다. 수천명 되는 교회 담임 목회자로 부임한 친구를 만나도 그 마음에 고요함과 평온함이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똥으로 여긴 것을 황금으로 여기고 품에 간직하며 더러운 냄새를 풍긴다면 아직도 교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 교만과 탐욕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품안에서 고요함과 평온함을 누리자.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하자. 내가 이룬 평화를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도 들려주어 함께 그 고요함과 평온함을 누리도록 하자. 그것이 교회가 우리 주님 원하시는 교회가 되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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