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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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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3편

시편 53편은 시편 14편과 아주 비슷하다.

2019. 7. 11.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53편 강해 설교

시편 53편은 시편 14편과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Briggs를 비롯한 다수의 학자들은 시편 53편은 시편 14편을 후대에 변형시킨 것이라고 본다(Briggs. Psalms, 16). 또 Tate는 시편 14편은 이스라엘의 악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으로 보는 한편 53편은 이스라엘을 포위한 이방인 대적들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으로 본다(Tate. Psalm, 97). 그렇기 때문에 Tate는 시편 53편이 민수기 21:27-30절과 에스겔 28:2-19절과 이사야 14:4-20절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조롱하는 시라고 말한다(Tate, 93). 다수의 학자들이 이 시편이 다윗이 아닌 후대의 사람들이 편집한 것으로 보고 열왕기하 18:13-37절에 나오는 산헤립의군대를 물리친 이야기가 이 시편의 배경이라고도 한다.

Tate가 예로 든 성경 구절들은 모두 이방 민족이나 이방의 왕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조롱한 것이다. 하지만 시편 53편에는 이방민족의 이름이나 왕들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에 맞추려 하거나 후대의 편집이라고 보기 보다는 이 시편에 나타난 그대로 시편 기록자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자신의 시를 다시 썼다고 보고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이 본문에서 시편 기록자가 그리고 있는 그림과 잘 맞는다.

I.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예언적인 불평 (1-4)

이 부분은 하나님과 그의 능력이 실재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가증한 행동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1절에서 어리석은 사람이란 머리가 나쁜 바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매우 똑똑하고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히브리 지혜문학에 따르면 어리석은 사람의 반대말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 속에 대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마음 속에 대고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척 한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발” 이다. 사무엘상 25:1-44에 나오는 다윗을 대적한 나발과 발음이 똑같다. 나발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해도 사람들 앞에서 직접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었기에 대신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대적한 것이다.

이 나발처럼 어리석은 다른 나발들은 첫째로 "부패하며" 라고 했다. 이 말은 본래 구덩이를 파다 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구덩이를 파고 땅에 묻어 두었기에 완전히 못쓰게 된 옷이나 그릇 등을 말한다. 시편 기록자는 사람의 시체와 그가 쓰던 그릇들이나 물건들도 부장품으로 무덤에 함께 넣어두어 완전히 못쓰게 된 그림을 그려 전달하고 있다고 본다. 이 말은 또 소돔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할 때도 쓰였고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할 때도 쓰였다. 시편 기록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완전히 못쓰게 되었다고 한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발들은 둘째로 “가증한 악” 이라고 했다. 이는 이는 본래 독수리가 이렇게 썩은 옷을 찢고 시페를 파 먹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부정하고 가증한 것을 말한다. 우상숭배 하는 자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러운 것이었다. 동성애와 우상숭배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과 부정한 동물들을 먹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들 보기에 더러운 것이다. 사업을 할 때 부정직하게 하는 것도 이러한 더러운 것에 속했고 이방신전에서 이방 여제사장과 성관계하는 것도 더러운 것이었다.

이러한 썩었고 더러운 일을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를 더럽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동체 밖으로 쫓아 내거나 돌로 쳐 죽여버렸다. 그러므로 시편 기록자가 한탄하는 나발들은 절대로 이러한 것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나발들은 사람들 눈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최고로 잘 섬기는 척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인 그들의 마음은 무덤에서 다 썩어서 못쓰게 되고 부정하게 되어 버린 물건들과도 같았다. 또 그 마음 안에 가증한 우상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라고 했다. 이 말은 3절 끝부분에도 똑같이 나오기 때문에 이 시의 앞부분에서 후렴처럼 반복되는 말이다. 선이란 "좋은 일"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좋았더라" 라고 하신 말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다라고 할만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2절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이라고 했다. 지각이 있는 자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는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온 힘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이 많다면 찾으실리가 없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모두가 다 어리석은 자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혹시나 하나님을 찾는 그 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 보고 계신 것이다.

3절 앞부분은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라고 했다. 물러갔다는 말은 뒤로 미끄러져 내려가서 목표 지점에서 한참 멀어진 것을 뜻한다. 이는 또한 화살이 빗나가서 엉뚱한 곳에 떨어졌을 때도 쓰는 말이다.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하는데 모두 다 미끄러져서 엉뚱한 곳에 우상 앞에 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를 찾으셨는데 모두가 다 우상들 앞에 가 있다는 것이다. 썩었다는 말은 1절의 썩었다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1절에서 썩었다는 말은 겉으로 보기에 완전히 못쓰게 되었다는 뜻이지만 3절에서 썩었다는 말은 우유 같은 것이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상해서 신맛이 난다는 뜻이다.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라는 말은 1절의 끝부분과 똑 같은 말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일을 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같은 후렴으로 끝내고 있는 1절의 두가지와 3절의 두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봐야 한다. 1절에서는 먼저 마음이 무덤 속에서 시체와 함께 썩은 것처럼 되어 다 못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행동도 우상숭배로 더럽혀졌다는 뜻이다. 1절에서는마음과 행동이 둘 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망가졌고 더러운 것이다.

그러나 3절은 보기에는 멀쩡해 보인다. 열심히 10시간을 운전해서 목표에 도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10시간 운전하여 텍사스의 San Antonio에 갔어야 했는데 엉뚱하게 플로리다의 Orlando에 간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도 보기엔 멀쩡한 우유 같은데 상한 우유 같은 마음인 것이다. 3절은 행동이나 마음이나 둘 다 보기엔 그럴듯한데 실제로는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4절에서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라고 묻는 것은 이들은 누구보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아는 지식인들이고 지도자들이라는 뜻이다. 어리석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지 지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사는 자들이기에 이들은 사실 무지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분명히 성경 말씀을 잘 알고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이거나 말씀대로 잘 인도해야 하는 정치 지도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빵을 먹듯 삼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코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최상류층들이다. 제사장들과 왕들 같은 존재들이다. 자신들이 가진 것이 많고 부족한 것이 없기에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것이지 이방인이라 부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난한 자들을 짐승처럼 부려먹고 학대하면서 그들을 통해 호의호식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불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빵을 먹는 것처럼 삼킨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최고로 잘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뜯어 먹고 사는 식인종들인 셈이다. 이러한 자들이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없다 생각하기에 육체의 쾌락과 탐욕을 따라 살면서 다가올 하나님의 징계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II. 여호와의 간섭하심의 결과들 (5-6)

5-6절은 여호와의 간섭하신 결과들이다. 5절에서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크게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시편 14편과 다른 부분이므로 이 부분을 잘 봐야 53편이 말하려는 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시편 14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의인의 세대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러나 53편에서는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고 했다. 14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 한 것이다. 14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완전히 경험하지 못하였으면서도 그 두려움을 알기에 두려워한 것이다. 속된 말로 아직 직접 뜨거운 맛은 보지 못하였으나 명성을 들어서 알고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53편에서는 안전한 곳에 피신해서도 계속해서 두려워 떤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너를 대적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이라고 설명한다. 너를 대적하여 진을 친 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여 진을 친 자들인 셈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공격하려고 진을 치고 있는 자들의 뼈까지 다 흩으셨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척하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을 없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과 맞서서 진을 친 것이다. 만군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의 진으로 들어가셔서 심판의 칼을 휘두르신다. 칼을 어찌나 잘 휘두르시는지 살을 발라내고 뼈들도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마치 탈곡기에서 나온 지푸라기들이 흩날리듯 그렇게 뼈조각들이 흩어지는 장면이다. 통나무를 넣으면 기계에 넣으면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나와 사방에 흩어지는 모습처럼 그렇게 흩어지는 장면이다. 그 중에 살아 남은 자들은 안전한 곳에 대피해서도 계속 두려움에 벌벌 떤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수치를 당한다는 것이다. 수치를 당한다는 말은 시편에서 주로 적에게 사로 잡혀 모욕을 당하는 것이다.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사로잡혀 아들들이 죽고 눈이 뽑히는 것과 같은 것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시편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대부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나 여호와께서 피난처가 되신다는 말과 짝을 이루며 나온다. 시편 14편에서도 이 부분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말과 짝을 이루며 나온다. 14편에서는 대적들은 하나님과 맞서 진은 치고 있었지만 아직 공격을 당하지 않은 상태였다. 단지 시편 기록자만 하나님의 품을 피난처로 삼아 피한 것이다.

그러나 53편에서는 대젇들이 수치를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의인들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버리셨다는 말은 거절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뼈까지 다 흩어 날려버리실 때 살려달라고 엎드려 손을 내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애원을 거절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저들은 뼈 조각들이 산산히 흩어지게 된 것이다.

6절은 먼저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라고 했다. 이는 5절에서 수치를 당한다는 말과 짝을 이루어 쓰이는 말이다.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이스라엘을 구원주실 분은 하나님 뿐이라는 뜻이다. 포로된 백성들을 그들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실 때에 야곱은 기뻐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포로된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그 땅으로 되돌려 달라고 했기에 흔히 열왕기하 18:13-37절에 나오는 산헤립의군대를 물리친 이야기가 이 시편의 배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1-4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을 찾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중에 의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를 찾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 53:6절은 14:7절과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포로된 자를 돌이키실 때에 기뻐한다는 것을 14편에서는 타락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53편은 바빌로니아 군대를 물리치신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없다. 포로된 자를 돌리신다는 것은 앗시리아의 공격이나 바빌로니아의 공격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배경이라고 볼 수 없다. 대적에게 수치를 당할 위기에 있는 신실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대적들을 심판하셔서 대적들의 뼈를 흩날리실 것이라는 뜻이다.

문맥을 통해 보면 이 시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찾고 또 찾으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만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지 혈통으로나 정치적인으로서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다. 대적들도 이방인들이 아니라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백성들을 착취하며 세상의 부귀영화만 누리려는 자들이고 시편 기록자와 같은 의인들의 대적인 사람들이다.

결론

시편 53편은 14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을 찾으시면서 한 사람도 없다고 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일 수 없다. 명백하게 어느 이방 나라를 지적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했기에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잘 믿는다는 지도자들인 것이다. 지식이 있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빵 먹듯 먹어 치운다고 했기 때문에 이방인이라기 보다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시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신다고 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마음 속으로 믿고 인정하고 따르던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대적들을 심판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찾으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14편의 기록자와는 달리 53편의 기록자는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뼈까지 흩으셔서 구원해 주신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을 근거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1절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마음 속으로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인정한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기능적인 무신론자들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 나오는 대적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던 바보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하나님을 믿는자 하는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던 자들로 가득 차 있다. 말로는 주여 주여 부르긴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7:21-23).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바보들을 향해 "나는 너희를 모른다. 내게서 떠나 가거라"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삶의 주인이시고 진짜 하나님의 사람들을 항상 한결같은 사랑으로 격려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그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우리도 그런 사랑을 나누어 주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여기 하나 찾았다! 여기 또 하나 찾았다!" 라고 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진출처: Wood Chipper,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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