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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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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편

시편 6편은 뼈와 영혼이 모두 떨릴 만큼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다.

2016. 11. 12.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6편 강해 설교

시편 6편은 뼈와 영혼이 모두 떨릴 만큼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그림처럼 표현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응답 받고 확신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1-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만화영화의 장면과도 같다. 두가지 하지 말아달라는 말의 느낌이 그림언어로 한층 강화되고 있다. 먼저 1절의 ‘주의 분노로’ 는 주께서 콧김을 내 품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콧김을 내 품으시면서 말로 꾸지람 하시지 말아 달라는 그림이다. 1절 뒷부분의 “주의 진노로” 는 불 같은 분노 라는 뜻이다. 앞의 콧김을 내 품는 것에서 더욱 더 분노하셔서 그 콧김에 불이 붙은 듯한 진노이다. “징계하지 마옵소서” 라는 말은 ‘얼차려’ 나 ‘PT체조’ 같이 고통스러운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징계를 말한다. 불 붙는 듯한 진노로 고통스러운 동작을 반복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두가지 하지 말아달라는 말 다음에 해 달라고 부탁하는 말이 다섯가지가 나오고 그 이유들 세가지가 따라 나온다. 여기서 시편 기록자는 몸과 영혼이 심히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 중에도 회개하는 내용이 없다. 이는 마치 욥과 같이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 깨닫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실 것이라며 하나님의 징계에 순종한 욥과도 같은 태도이다.

첫째 부탁은 원어의 2절에서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가 먼저 나온다. 앞에서 말한 분노로 책망하고 진노로 징계하는 대신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은혜라는 말은 형편이 나은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있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진심어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밥값 좀 달라는 노숙자에게 1000원짜리 한 장 성의 없이 던져주지 않고 식당으로 데리고 가 밥을 사 주면서 노숙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누가복음 18:38절에서 맹인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외침에 경청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다. 원어에서 그 다음에는 “왜냐하면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라는 말로 이어진다. 이제 기력이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심어린 반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부탁은 2절 뒷부분에 나오는 “나를 고치소서, 여호와여!” 이다. 첫번째 부탁과 똑같이 부탁 뒤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간구에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물으시자 “나를 고쳐 주십시오, 여호와여!” 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이는 누가복음 18:41절에서 예수께서 무엇하여 주길 원하는지 물으시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첫째 부탁과 똑 같은 구조로 그 다음에는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어가면서 두 가지가 떨린다 했다. 첫번째 떨림은 “나의 뼈가 떨리오니)” 라는 말이다. 뼈는 겉사람의 대표 선수로 등장했다. 육체의 살 속 깊은 곳에 있는 뼈까지 떨리고 아프다는 뜻이다. 또 두번째 떨림은 3절의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이다. 영혼은 속사람의 대표 선수로 등장했다. 히브리인들은 마음과 영혼은 우리 몸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그 중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영혼이다. 겉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떨리기 시작해서 속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도 다 떨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육체와 영혼을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다. 몸과 영혼 전체가 지독하게도 아프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주님 어느 때까지니이까?” 주께서 들으셨는데도 오랫동안 응답을 하지 않으시자 언제 자신을 고쳐 주시겠는지 다시 한번 독촉하는 것이다.

셋째 부탁은 4절의 “돌아와 주소서. 여호와여” 이다. 첫째부터 계속 똑같이 부탁하는 말과 그 뒤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개역 개정에는 그 구조가 뭉개져 있다.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진정으로 듣고도 고쳐 주시지 않고 멀리 가버리셨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돌아와 달라는 말에는 전에는 자신과 함께 계셨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예전에 자신과 함께 계시며 자신의 기도를 듣고 치료해 주시던 그 자리로 돌아와 달라는 것이다.

넷째 부탁은 4절 중간 부분의 “건져주소서, 내 영혼을” 이다. 역시 원어의 운율이 깨져있다. 건져 달라는 말은 더러운 벌레가 우글거리는 집에서 정결한 돌 하나를 빼내는 것과 같은 그림이다. 시편 기록자는 자신이 비참한 처지에 있으니 꺼내 달라는 것이다.

다섯째 부탁은 4절 끝부분의 “구원하소서, 나를” 이다. 건져 달라는 말은 꺼내 달라는 말인데 구원해 달라는 말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전에 동물농장에서 하수구에 갇혀있던 개를 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건져 놓았지만 오랫동안 구부린채 있어서 잘 걷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시편 기록자는 그런 상태에 있던 것이다. 건져 주신 것에서 멈추지 말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이 간구는 “주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주의 사랑이란 ‘헤세드’ 라는 단어인데 당신의 한결 같은 사랑에 근거해서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는 시편 기록자가 무엇을 잘 했거나 경건해서가 아니다. 주님과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전에도 수도 없이 용서해 주시고 사랑을 베푸신 것처럼 또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버지 돈을 훔쳐 집을 수도 없이 나간 십대 소녀와도 같다. 집을 나가서 다니다가 인신매매범에게 팔려 어느 섬에 몰래 팔려갔는데 주인 몰래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살려달라는 것과도 같다.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다. 잘 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아버지의 한결 같은 사랑에 근거해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해 달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5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셋째 넷째 다섯째 간구의 이유를 5절에서 한꺼번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라는 것이다. 이 기억은 모든 삶의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를 드렸던 기억을 말한다. 그러나 죽으면 이 모든 기억들이 사라지고 영혼도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 다음에 분명하게 “스올에서 주께 감사랄 자 누구리이까?” 라고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스올이란 영원히 멸망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다. 따라서 죽어서 스올에 떨어지면 어떻게 거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를 드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감사를 드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후회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찬양과 경배를 드렸던 기억 대신 후회와 원망만이 남아 있으면 감사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

6절부터는 이처럼 기도하다가 밤을 꼬박 새우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시편은 밤새 기도하고 신음하다가 날이 밝아오는 새벽에 드린 찬송시이다. 6절은 원어에서 “지치고 말았습니다. 내 탄식 안에서” 라는 뜻이다. 밤새도록 탄식하며 간구하다가 지쳐버렸다는 것이다. 또 이어서 “밤바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라고 했다. 원어 순서대로 직역하면 “나는 수영하게 합니다. 매일 밤마다 내 침대를” 입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이 방안에 가득 차서 침대가 둥둥 떠다니며 수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이어서 “내 요를 적시나이다” 라고 했다. 원어는 “나는 녹였습니다. 내 요를” 이라고 해서 앞의 댓구와 같은 구조이다. 요는 침대에 까는 매트리스 같은 것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매트리스가 다 녹아 버렸다는 것이다.

필자가 청주 교육대학에 다니던 1978년 겨울 가정형편 때문에 학비에서 생활비까지 나홀로 책임져야 했다. 나만 공부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빨리 취직해서 동생들을 돌봐야 했기에 학비가 없고 기성회비만 내면 되었던 교육대학에 간 것이다. 그 때 창고를 방으로 개조한 문간방 한 칸을 친구와 함께 사용했는데 영하 10도 이상 내려가던 청주의 추운 날씨에 연탄불도 안 때고 살았다. 친구는 삼단으로 접을 수 있는 스폰지가 있었고 나는 그것조차 없이 살았다. 아침에 요를 개면 방바닥에 찬 습기로 물이 흥건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그렇게 살던 내 자취방으로 예고도 없이 오신 것이다. 친구는 다른 친구 집으로 가고 어머니께 친구의 삼단요를 깔아 드렸다. 다음 날아침 방 안의 벽은 모자간에 내쉰 숨으로 온통 하얗게 성에가 끼었다. 다음 날 어머니는 청주에서 대전으로 가셔서 대고모님 댁에서 대고모님을 붙잡고 밤새 울다 하소연하다 같이 기도하다 하셨단다. 그러다가 대고모님은 꼽추였던 당숙이 척추수술을 받은 후 사용했던 스폰지가 있다며 그걸 주셨다. 어머니는 그걸 가지고 다음날 대전에서 신탄진까지 시내버스로 또 신탄진에서 청주 수곡동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오셨다. 부모가 되고서 자식이 아파 죽을지도 모른다고 할 때서야 그 때 어머니가 대고모님 손을 잡고 밤새 울며 기도하시던 마음을 알게 되었다.

7절은 이렇게 밤새 울은 결과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라는 말은 원어에서 “내 눈은 쓸모없이 되었습니다. 슬픔으로” 라는 말이다. 눈이 쓸모없게 되었다는 말은 눈이 밝아졌다는 말의 반대말이다. 구약 성경에서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사무엘상 14:29절에서 요나단이 “꿀을 조금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이라고 말한 것에서 나온다. 눈이 밝아진 것은 힘차고 건강한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라면 눈이 쓸모없이 되었다는 말은 너무 쇠약해져서 눈조차 뜰 힘 조차도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명기 34:7절에서 모세가 죽기 전에도 그의 시력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도 마지막 순간까지 건강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라고 했다. 대적들 때문에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 시야가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시야가 점점 좁아져서 실명이 되는 모습과도 같다. 앞에서는 눈을 뜰 힘이 없었던 것인데 이젠 눈을 떠도 시야가 어두워져가고 있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친구들에게 둘러 싸여 있던 욥과도 같다. 친구들이 대적으로 변해 눈을 뜰 힘조차 없고 눈을 떠도 보이지 않는 시편 기록자를 계속 괴롭히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 시편 기록자는 계속 내려왔다. 이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이다.

경기도 바닥을 치면 그 다음은 올라가는 법이다. 시편 기록자도 8절에서 새 힘을 얻은 모습이 나온다. 너무나 갑작스런 변화이기에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은 다른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시편 기록자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7절과 8절 사이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다는 말이 생략된 것이다. 그러나 실수로 빼놓은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극적으로 응답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꺼져가는 등잔불처럼 가물거리던 시편 기록자에게 갑자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극적인 변화를 묘사하기 위해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어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 8절에서 그 외침은 “돌아서 떠나 가거라, 내게서” 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시편 기록자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이는 사무엘상 1:17절에서 울며 지치도록 기도하던 한나의 모습과도 같다. 하나님께서 엘리를 통해서 응답하시자 힘이 없어 술취한 사람처럼 기도하던 한나가 힘을 얻고 돌아갔던 모습과도 같다. 자신을 계속 정죄하던 대적들은 이제 더 이상 시편 기록자를 괴롭게 하지 못한다.

9절에서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라고 했다. 간구란 2절의 은혜와 같은 말이다. 은혜를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결국 간구인 것이다. 들어주셨다는 말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치료된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신 것 뿐이다. 또 그 다음에는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라고 했다. ‘받으시리로다’ 라는 말은 들으셨다는 말에서 한걸음 더 나간 것이다. 들으셨다가 하나님께서 듣고 관심을 보이신 것이라면 받으신 것은 그 기도를 정식으로 접수하신 것이다. 이 말은 미래형이기에 받으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이제 시편 기록자를 죽도록 조롱하던 대적들에게 그 조롱과 저주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다. 그래서 10절에서는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하는 말이다. 벌벌 떤다는 말은 2-3절에서 뼈 속과 영혼 속까지 떨린다고 한 말과 같은 말이다. 이젠 시편 기록자 대신 대적들이 그렇게 벌벌 떨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또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라고 했다. 원수들이 갑자기 수치를 당하고 돌아간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원수들이 시편 기록자 둘레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원수들은 돌아가고 여호와께서 자기 곁에 돌아와 자신을 치료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를 앞두시고 밤새 떨며 기도하셨다. 우리도 시편 기록자처럼 예수님처럼 뼈 속까지 떨리고 영혼의 깊은 속까지 떨릴 만큼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그 고통은 가족들 때문일 수도 있고 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친구인줄 알았는데 자신의 대적이고 하나님의 대적들일 때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 쓰러져 죽게 되었더라도 기도해야 한다. 절대로 기도의 끈을 놓으면 안된다. 시편 기록자처럼 눈물로 침대를 수영하게 하고 매트리스를 눈물로 녹일만큼 힘든 상황에서도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지쳐서 눈을 뜰 힘조차 없을 때에도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 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아직 응답되지 않았어도 시편 기록자처럼 확신을 가지고 힘과 용기를 내야 한다.

사진출처: Don Christner, Morning Prayers;flickr.com/photos/dtchristner/327876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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