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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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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0편

이 시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9. 4. 11.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40편 강해 설교

이 시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인 1-10절은 개인적인 감사의 찬양이다. 반면에 11-17은 개인적인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서로 상반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두개의 독립적인 시가 합쳐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반복된 것이 이 시편 전체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의 시임에 틀림없다.

이는 먼저 감사의 찬양을 드린 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시편을 자세히 보면서 우리도 먼저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도록 하자. 그 뒤 현재 우리의 고통을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도록 하자.

1. 감사의 찬송(1-10)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1절에 보면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라는 말로 시작한다. 원어도 개역처럼 같은 단어를 동사와 부정사로 반복해서 쓴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인내하며 기다렸다는 뜻이다. 시편 기록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정말 오랫동안 참고 기다린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 마침내 귀를 기울이셨다고 했는데 원어는 귀를 잡아 늘였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귀를 잡아 늘이고 듣기 시작하신 것이다. 이어서 자신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셨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를 바라보며 들어 주시기 시작한 것이다.

2절은 그렇게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신 뒤에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에게 해 주신 일이다. 먼저 기가 막힐 구덩이에서 건져 주셨다고 했다. 기가 막힐 구덩이란 물같은 것이 소용돌이 치면서 요란한 소리는 내는 구덩이이다. 떨어지면 그대로 죽는 그런 구덩이인 것이다. 그런데 또 바로 이어서 수렁에서 끌어 올리셨다고 했기에 흙탕물이 소용돌이를 치는 곳에서 건져 주셨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끌어 올리신 다음에는 반석 위에 두셨다고 했다. 반석 위에 세워주실 뿐만 아니라 시편 기록자의 걸음을 견고하게 해 주셨다고 했다. 계속해서 반석과 같은 안전한 길로 가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는 다윗 왕이 적의 공격 때문에 위기를 만난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만났던 위기는 마치 깊은 구덩이에 빠지다가 겨우 구덩이의 벽을 붙잡고 매달려 있는 것과도 같았다는 것이다. 구덩이 바닥에는 떨어지기만 하면 즉시 삼켜버릴 진흙탕 물의 소용돌이가 굉음을 내며 돌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 절박한 위기에서 정말 오랫동안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는데도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참고 견디며 간절히 외쳤더니 하나님께서 구해주신 것이다. 실제 구덩이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런 절박한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구해 주셨다는 것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3절에서 시편기록자는 이렇게 구원받은 기쁨을 담은 새로운 찬송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랬더니 수많은 사람들이 왕의 찬송을 들은 것이다. 그러나 시편 기록자는 사람들은 찬송을 들었는데도 보았다고 표현했다. 시편 기록자를 보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냥 보았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았기에 사람들이 두려워했을까? 그것은 시편 기록자를 본 것이 아니라 시편 기록자의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바라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이 처한 절망적 상황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렇게 놀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수많은 구경꾼들도 역시 시편기자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각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간증과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신 놀라운 일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찬양과 간증을 통해서 그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은 하나님께 만 드려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찬양을 통해 그 분이 하신 놀라운 일을 사람들에게 보게 하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4절은 그렇게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여호아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시편 기록자 같은 사람이고 또 시편 기록자의 찬양과 간증을 듣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이러한 하나님만 의지하고 우상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완전히 우상만 섬기는 사람을 거짓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면서도 다른 것들도 의지하는 사람을 우상 숭배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배우자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배우자 이외에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과도 같은 것이다.

5절은 원어에서 "많습니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뭐가 많은가 하면 두가지이다. 첫째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이다. 또 우리를 위한 주의 생각도 많다는 것이다. 생각이란 앞으로 행하실 계획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너무 많아서 아무리 알리고 전파하려 해도 다 전파할 수 없다는 것이다.

6절은 원어에서 "주님은 제사나 예물도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시편 기록자는 그동안 하나님께 율법에 따라 합당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많은 감사의 예물도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나 예물을 기뻐하시지 않고 번제나 속죄제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주께서는 자신의 두 귀를 열어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두 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렇게 두 귀를 열어 주신 이유가 7절에 나온다. “두루마리 책” 이란 신명기에 기록된 율법들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신 법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두 귀로 듣고 그대로 순종해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최고의 제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시편기록자는 8절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하기를 즐거워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 귀로 듣고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순종한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즐거워 하기에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말씀을 통 채로 암송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며 벌을 받을까 봐 억지로 순종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쁨으로 해드리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자녀들이 우리가 무서워 억지로 우리 말을 듣고 순종한다면 기쁘겠는가? 우리 자녀들이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기에 우리 말에 기쁨으로 순종할 때 기뻐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순종도 마찬가지이다. 십일조를 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십일조를 안 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 것이기에 십일조를 한다면 그러한 십일조는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형제 자매들을 돕는 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억지로 용서하고 도우면 안된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한 뒤에 해야 할 일들이 9-10절에 나타나 있다. 9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많은 회중들 가운데서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한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다. 또 주님께서 아시는 것처럼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한다고 했다. 이는 입술이 열리고 저절로 터져 나오려고하는 찬송과 간증을 억지로 막지 않겠다는 뜻이다.

10절은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라고 했다. 이는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의 의를 나의 가슴 속에 묻어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님의 의란 죄 없는 자에게는 무죄를 선포하셔서 건져 주시고 악인들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마음 속에 간직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로 자신을 구해 주신 은혜는 마음 속에 묻어두면 안되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말로 선포한 것은 "주의 성실과 구원" 이다. 이 두가지는 구원받은 기쁨을 말로 전한 것이다. 성실하심이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2절에서 진흙탕에서 구원하셔서 반석위에 세웠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반석과 같이 견고하셔서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기에 구원 받고 그 위에 서 있는 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 기쁨을 말로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와 짝을 이루는 말은 감추지 않은 두가지이다. 이는 "주님의 인자와 진리" 이다. 인자란 헤세드라는 말인데 계속해서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한결같은 사랑으로 참으시며 사랑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진리라는 말은 앞에서 나온 성실과 어원이 같은 말이다. ESV, NIV, NLT, RSV 등은 Faithfulness 라고 번역했는데 새번역의 미쁘심이란 말과 통하는 말이다. 이와는 달리 NASB와 KJV는 개역처럼 Truth라고 번역했다. 본인은 Faithfulness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맞다고 본다. 앞의 두가지가 구원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 두가지는 구원 이후의 일들이다. 하나님께는 구원하시는 것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 범죄할 때도 항상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하시며 사랑하시는데 그것이 항상 변함없이 성실하시다는 것이다.

성실과 진리는 원어에서는 같은 말에서 온 말이다. 항상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 바깥쪽에서 감싸고 있다면 그 안쪽에는 구원과 한결 같은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항상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샌드위치의 빵이라면 하나님께서구원하시고 또한 계속해서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용서하시며 사랑해 주시는 것은 샌드위치의 알맹이에 해당된다.

2. 기도(11-17)

과거에 함께하신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한 후 기도로 이어진다. 그 기도는 "여호와여" 라고 부르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라고 했다. 거둔다는 말은 비나 이슬을 계속 내리시다가 갑자기 멈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계속해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비와 이슬처럼 내려 주셔서 시편 기록자의 마음은 푸른 초장과 같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하늘 문을 닫고 더 이상 긍휼을 내려 주지 않으셔서 이제 자신의 마음은 말라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긍휼 다음에 구한 것은 주의 인자와 진리이다. 10절에서 나온 주의 인자와 진리가 다시한번 반복되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보호해 달라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보호막으로 삼아 살아왔다. 그런데 그 보호막이 사라진 것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항상 변함없는 성실하심으로 자신의 보호막이 되어 달라는 뜻이다.

12절은 현재 자신에게 처한 수많은 재앙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하도 많아 셀 수도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주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과 계획이 그렇게 많았다고 했는데 이제 시편 기록자에게는 재앙이 그렇게도 많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재앙들을 도저히 볼 수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러한 재앙들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는 머리털보다 더 많은 죄가 생각나서 자기의 의로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구해달라고 부탁할 자격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13-18절은 다가 올 위기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간청하고 있다. 13절에서 시편기자는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한다. 그렇게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너그럽게 봐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이 다급한 위기에서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구원해 달라는 말은 확 낚아채 달라는 것이다. 시편기자의 죄가 너무 많기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시고 확 낚아채서 건져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무 자격도 없고 염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빨리 자신을 도와 달라는 것이다.

14절부터 어떻게 도와 주셔야 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시편 기록자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자들이 당할 수치를 세단계 점층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먼저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라고 했다. 이 두 단어는 구약의 시가서와 예언서에 짝으로 많이 나오는 말이다.

이사야 1:29절에서는 같은 단어를 "부끄러움과 수치" 라고 번역했다. 이사야의 문맥을 보면 이 두 단어는 우상 숭배로 인해 수치 당하는 것을 간음으로 인해 수치를 당하는 것으로 표현한 말이다. 또 예레미야 50:12절에서는 바벨론을 향하여 너희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며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한다고 했다.

서로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먼저 나오는 수치라는 말은 간음한 여인을 사람들 앞에 세워 놓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모두가 보고 알 수 있는 명백한 죄로 인해 당하는 수치를 뜻한다. 낭패라는 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이는 간음한 여인에게서 간음한 증거를 찾아 내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낭패라는 말은 본래 땅을 파서 샘물을 찾는다거나 숨겨진 것을 파내어 찾는다는 뜻에서 온 말이기 때문이다. 이는 숨겨진 은밀한 죄를 드러내서 더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모두 뒤로 물러가서 욕을 당하게 해 달라고 했다. 욕을 당한다는 말은 적에게 포로로 잡혀서 상처를 입는 모습이다. 전쟁에서 패한 왕의 손 발을 자르거나 눈을 뽑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는 대적들의 수치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이다. 그 수치는 드러난 죄에서 시작하여 은밀하게 숨겨진 죄를 거쳐서 마지막에는 포로가 되어 신체 일부가 해를 입는 모습으로 강화되어진 것이다.

15절의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란 말을 원어로 직역하면 “내게 대해 아하 아하 말하고 있는 자들” 이다. 아하! 란 히브리어로 기뻐 외치는 소리인데 만국 공통어이다. 지금은 대적들이 시편 기록자를 "아하! 아하!" 하며 놀리고 있지만 이제 저들이 자기들이 받는 수치 때문에 놀라게 해 달라는 것이다. 놀란다는 말은 소름 끼치도록 섬뜩해 한다는 뜻이다. 저들이 놀라는 것은 위기에서 구원해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소름 끼치도록 놀라는 것이다. 놀리던 자신들은 더 큰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 때문에도 놀라는 것이다.

16절은이러한 놀라운 역사를 보고 대적들은 소름 끼치도록 놀라지만 반대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도 세단계로 점점 커진다. 먼저 즐거워 한다는 말은 놀라운 승리에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이다. 그러나 기뻐하게 하신다는 말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승리하게 하셔서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그 뒤에도 그 구원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미소를 짓게 해 달라는 것이다. 세번째는 자신들도 그렇게 구원해주실 것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은 모두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라고 찬양하게 해 달라고 했다. 환호성 뒤에 항상 미소를 지은 다음에는 하나님께 찬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쁨도 점층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마지막 최고의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은 찬양이다.

III. 끝맺는 기도(17)

지금까지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모든 이들 앞에서 함께 나누며 모든 백성들과 함께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은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주님께서 자신을 생각해 주시길 간구하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모든 백성들과 나누며 찬양하다 보면 사람들은 그것을 시편 기록자의 공로로 돌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편 기록자는 주님께서 자신을 구해 주셨고 영광의 자리에 서게 해 주셨기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공로라고 말하면서 겸손히 자신을 낮춘 것이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말이다. 1절에서는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했다. 오랫동안 참고 기다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17절 끝에서는 지체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며 기도를 끝맺고 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춘 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손길이 즉시 임하길 바라며 기도를 끝맺고 있는 것이다.

결론 및 적용

우리도 시편 기록자처럼 지난 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은 거룩한 예배나 많은 액수를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시편 1편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늘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렇게 행하면서 얻은 놀라운 기쁨을 다른 성도님들 앞에서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으로 베푸시는 사랑과 구원을 모두 함께 나누며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찬양한 뒤 우리를 지금의 고통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태도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영적 교만이다. 우리는 오직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이지만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합시다. 지금까지 인도해 주셔서 체험한 모든 은혜를 감사하며 다시한번 그러한 은혜를 체험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자.

사진출처: Christopher Porter, Feet on Rock,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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