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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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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4편

이 시편의 제목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 지은 시” 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2019. 2. 21.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34편 강해 설교

이 시편의 제목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 지은 시” 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런데 사무엘상 21:10-15절에 나오는 블레셋 왕의 이름은 아기스이다. 그러나 시편의 제목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비멜렉은 블레셋 왕들을 부르는 일반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집트의 왕들을 바로라고 부르던 것 과도 같다. 이 시에서 반복된 단어들을 연결해 보면 여호와는 악인들을 벌하시지만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시고 구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I. 나와 함께 기뻐하자(1-10)

1-10절은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는 내용이다. 아비멜렉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서 미친 척해서 겨우 살아 나고는 뭐가 그리 기쁜지 1절 시작부터 찬양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다윗은 1절에서 자신의 의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먼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라는 말은 언제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겠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함으로 하나님을 천양하겠다는 것이다. 또 "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라는 말은 찬양하는 노래가 자신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몸으로는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겠다는 뜻이다.

2절은 주님만을 경배하고 찬양하려면 자기 자랑을 하면 안되고 오직 주님 안에서만 자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이루신 일을 자신도 조금 했다고 자랑하면 안된다는 뜻이다. 다윗은 자신의 지혜로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자랑하겠다고 한 것이다.

"곤고한 사람들" 이란 자신들 스스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오직 자기들의 주인인 존귀한 사람에게 속한 것을 자랑할 수 밖에 없다. 왕인 다윗도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곤고한 자들처럼 자랑하겠다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은 자랑하지 않고 주님께서 하신 일만 자랑하기 때문이다. 왕인 다윗이 하나님만 높일 때 곤고한 사람들도 다윗과 함께 공감하며 같은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가? 3절에서 다윗은 자신과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라고 했다. 이 말은 주님을 크게 하자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위대하게 하자는 뜻이다. 어떻게 사람이 위대해 지는가? 많은 사람이 칭송하고 따르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칭송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온 세계 만민이 함께 주님을 경배하게 되면 주님이 커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만 하나님을 칭송하게 하면 주님은 작아지는 것이다. 온 세계 만민이 주님을 칭송하게 해야 주님이 커지는 것이다.

또 “그 이름을 높이세” 라는 말은 주님을 크게 하면서 또한 동시에 그 이름을 높게하자는 말이다. 주님을 위대하게 한 다음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나? 자신을 가장 겸손히 낮추어 주님을 경배하면 주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무조건 주님을 널리 알리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모두가 엎드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주님의 이름만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어떻게 주님만 크고 높게 할 수 있나? 4절에 답이 있다. 그것은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라는 말에 있다. 여는 여호와를 찾는다는 뜻이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높은 사람을 찾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도와 달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환난을 당한 사람들도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래서 4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찾은 것이고 그 때 주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두려움 가운데서 건져내 주셨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의 손에서 확 낚아 채어 건져 내셨다는 것이다.

5절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도 다윗 자신처럼 해 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환난을 당했던 다윗이 주님을 바라본 것처럼 환난을 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을 우러러 보라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바라 보라는 것이다.

또 "광채를 내었으니" 라는 말은 얼굴에 빛이 난다는 뜻이다. 이 빛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빛을 그 얼굴에 받아서 빛이 나는 것이다. 이사야 60:4-5절에서는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라고 했다. 부모를 등지고 떠나 있던 자녀들이 오랬 만에 다시 부모를 찾아 온다면 부모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그 때 자녀들의 얼굴에도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부모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가는데 “넌 누구니?” 하고 돌아선다면 아이는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다윗이 그러면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자녀가 부모를 향해 달려갈 때 부모가 자녀를 품에 안아 주며 “아이고 예쁜 내 새끼” 라고 안아 주면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건져 주시고 품에 안아 주셨기에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6절에서 다윗은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라고 했다. 그리고 건져내 주셨다는 것이다. 2절에서 곤고한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한 것도 자신이 그렇게 곤고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다른 말이 없어도 “너희들도 나처럼 부르짖어 봐!” 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절은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발견한 일반적인 진리이다. 다윗이 발견한 진리는 주님의 천사가 주님을 경외는 사람들을 빼내주신다는 것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란 주님을 크게 하고 그 이름은 높이는 사람이다. 4절에서는 확 낚아 채신다(건지셨도다) 했고 6절에서는 건져 내셨다(구원하셨도다) 했는데 7절에서는 꺼내 주신다(건지시는도다)고 말하고 있다. 함정에 빠졌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을 꺼내 주시는 모습이다.

8절에서 "너희도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고 했다. 원어는 "맛보라 그리고 보라" 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먼저 혀로 맛보고 그 다음에는 눈으로 확인해보라는 뜻이다. 우리 속담에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라는 속담이 있다. 먼저 눈으로 보고 그 다음에 맛을 보는 것이 순서인데 여기서는 그 순서가 반대로 되어있다. 이는 굶주린 사람들이 먹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굶주린 사람들은 눈으로 감상할 여유가 없다. 먼저 허겁지겁 먹어본다. 어느정도 배가 채워지면 그 다음에는 눈으로도 감상하며 “와, 대단하다!” 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귀로만 들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해 보고 정말 좋다는 것을 느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느끼면서 주님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9절의 성도들이란 말은 거룩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거룩한 사람들아! 여호와를 두려워 하라는 것이다. 주를 두려워 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10절에서 그림으로 예를 들어 설명했다. 늙은 사자는 굶주릴 수 있지만 젊은 사자는 빠르기 때문에 굶주리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젊은 사자와 같게 해 주셔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뚝 떨어뜨려 주셔서 먹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게 하셔서 먹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자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능력을 통해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것이다.

II. 나에게서 배워라(11-21)

11절은 상당히 용감한 말이다.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들이란 아들들이란 뜻이다. 그렇다고 다윗이 자기 아들들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 다윗이 먼저 인생을 살았기에 자신보다 젊은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다윗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12절은 두개의 질문이다. 첫번째 질문은 "생명을 사모하고" 이다. 이는 새번역처럼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냐?" 라는 뜻이다. 그 다음에는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라고 물었다. 새번역처럼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또 누구나?" 라는 뜻이다. 이 두가지는 누구나 다 원하는 것이다. 다윗은 마치 시장바닥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약장수 와도 같다. 지나가는 젊은이들에게 이 두가지 질문을 하여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이 두가지를 원할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주님을 경외하는가? 13절을 보면 두가지를 지키라고 했다. 먼저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라는 말은 원어에서 악으로부터 네 혀를 지키라는 뜻이다. 또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라고 했다. 원어는 "거짓말하는 것으로부터 입술을 지키라" 는 뜻이다. 악한 말이나 욕은 큰 소리로 분명하게 말하기에 혀를 지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거짓으로 모함하여 흉 보는 말은 입술을 조금 열어 소곤소곤 말하는 법이기에 입술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큰소리로 남을 비난하는 악한 말을 하지 말고 작은 소리로 남을 해치는 거짓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14절은 이제 말에서 행동으로 옮겨간다. 행동은 네 개의 명령어로 되어있다. 이는 두가지씩 묶을 수 있다. 첫째는 "악을 버리고" 라고 했다.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가다 보면 악한 일을 만나게 되어있다. 그런 때에 악과 맞서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것이다. 악과 맞서 싸우는 것이 의로운 일인 것 같지만 사실 아무 쓸모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과 싸우느라 선한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로 "선을 행하며" 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첫째 쌍은 악한 일과 싸우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피해서 그 시간에 하나님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두개의 명령어는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에 있다. 그 중 세번째 명령어는 "화평을 찾아" 이다. 이 평화는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선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원수가 된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러한 평화는 쉽게 이룰 수 없기에 계속해서 찾으라고 한 것이다. 네번째 명령어는 "따를지어다" 이다. 이러한 평화는 찾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찾았다고 해도 점점 더 멀리 달아난다. 그래서 온 힘 다해 달려서 쫓아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은 먼저 말로 남을 해치지 않고 속이지도 말아야 하고 악한 행동은 피하고 선한 일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평화의 길을 계속 찾아야 하고 찾았다면 온 힘을 다해 쫓아가야 하는 것이다.

15절은 13-14절에 대한 이유이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는 이러한 의로운 자를 눈으로 살펴 보시기 때문이다. 또 주님께서는 의로운 자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때문이다. 16절도 역시 13-14절에 대한 이유이면서 15절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은 눈으로 살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얼굴을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을 노려보시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부르짖음은 귀로 듣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신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듣고 간직했던 저들의 간구까지 완전히 지위 버리신다는 뜻이다.

또 17절은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라고 했다. 이는 그 중에도 상대적으로 적은 고통에 있는 사람이다. 18절에서 마음이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했다. 마음이 상한 자란 단순히 부르짖는 자가 아니다. 부르짖는 사람보다 그 슬픔이 훨씬 더 커서 마음이 찢어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려고 가까이 계시며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또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했다. 충심으로 통회하는 사람이란 원어에서 그 영혼이 완전히 뭉개진 사람이다. 마음이 찢어진 사람보다 더 큰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런 사람은 얼른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눈물로 부르짖을 때 주님이 낚아채 주시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사람에게는 가까이 계시며 그 영혼이 완전히 뭉개진 사람은 구원해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19절을 보면 주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 고난 가운데 부르짖으면 모든 고난에서 건져 주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건져 주시는가 하면 20절에 보면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 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라고 되어 있다. 이는 전혀 상하지 않게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또 어떻게 건져 주시는가 하면 21절을 보면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라고 했다. 악인은 그들이 행한 악이 그들을 죽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두심으로 의인을 지켜 주시는 것이다. 또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는다 고 했는데 저주를 받는다는 뜻이다.

III. 주님께 피하라(22)

22절은 이 시편의 결론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라고 했다. 속량한다는 말은 두들겨 맞고 고문을 당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노예를 값을 지불하고 사는 그림이다. 곧 죽게 될 노예를 하나님께서 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구원해 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에게로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한다고 한 것이다. 옛 주인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다가 여호와께로 달려가 그 뒤로 피하면 여호와께서 값을 지불해서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값으로 우리를 주고 사신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절대로 악이 우리를 포로로 삼고 살해할 수 없다.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구해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편의 결론은 주님께 피하라는 것이다.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있더라도 그러한 어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이니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로 달려가 피하라는 것이다.

결론 및 적용

시편 기록자는 오늘 시편을 통해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비결을 말해주고 있다. 그 비결은 환난 중에 주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을 찾아 그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영광의 주님 주님께서 기쁨으로 달려와 건져 내셔서 우리를 그 품으로 안아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은혜는 절대로 남의 말을 들음으로 알 수 없다. 우리가 직접 맛을 보고 눈으로 확인해서 경험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하신 뒤에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우리도 다윗처럼 약장수가 되어야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즐겁게 살고 싶은 사람, 좋은 일 보며 장수하고 싶은 사람 하고 불러야 한다. 그들에게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 구원의 은혜를 들은 사람도 듣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악한 말을 하지 말며 악한 일을 피하며 선한 일을 하면서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길을 찾았다면 그 평화를 잡기 위해 죽도록 달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뼈 마디 하나도 상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악인들은 악에 의해 스스로 멸망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 부르짖고 주님께 피하는 자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사셔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다. 고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는 기회이니 고난을 당할 때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 품으로 달려가 피하라는 것이다.

사진출처: U.S. Air Force photo/Tech. Sgt. Lauren Gl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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