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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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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편

시편 3편이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길 때 아침에 부른 노래라면 시편 4편은 같은 상황에서 저녁에 부른 노래이다.

2016. 11. 3.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4편 강해 설교

시편 3편이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길 때 아침에 부른 노래라면 시편 4편은 같은 상황에서 저녁에 부른 노래이다. 시편 기록자는 이제 캄캄한 밤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좁은 곳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하는 그림이다.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수많은 군대를 아침에 둘러보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중에 그렇게 포위되어 있다면 그 두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을 햇빛에 비유해서 오늘 시편을 노래한다. 햇빛과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사람들이 어떻게 서 있는지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원어를 보면 시편 기록자는 먼저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라고 외친다. 그리고 나서 “나의 의의 하나님!” 하고 부른다. “나의 의의 하나님” 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하나님은 그 언약을 충실히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언약을 충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의의 하나님” 이다. 시편 기록자는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응답해 달라고 한다.

“곤란 중에” 라는 말은 사방이 꽉 막힌 아주 좁은 곳에 시편 기록자가 갇혀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어두움에 있는데다가 아주 좁은 곳에 몸이 끼어있어 정말 답답한 상황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라는 말은 “넓게 하셨사오니” 또는 NIV 처럼 “넓게 해주세요” 라는 뜻이다. 과거에 캄캄한 밤에 좁은 곳에 갇혀 있었는데도 넓은 곳에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NIV처럼 해석하면 넓은 곳으로 보내달라는 뜻이다. 그 뒤에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라고 했으니 어떻게 해석해도 지금 현재 좁은 곳에 있는데 넓은 곳으로 보내달라는 뜻이다.

사실 넓은 곳은 안전하지 못한 곳이다. 때로는 좁은 참호 속이나 좁은 집 안에 있는 것이 더안전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 고양이들을 케이지에 넣어 병원에 데려가면 케이지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낮선 넓은 곳보다는 좁은 케이지 안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 오면 넓은 곳에서도 당장 나오게 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시편 기록자가 보내달라는 넓은 곳은 보호막이 없는 위험한 곳이 아니다. 이는 캄캄하고 좁은 곳에서 밝고 넓은 곳으로 바뀌는 그림이다. 넓은 초원에 햇살이 가득한 그림이다. 그곳에서 시편 기록자는 어린 양처럼 뛰놀고 싶은 것이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햇살처럼 비추시며 시편 기록자를 보호해 주시는 곳이다.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햇살 가득한 넓은 공원의 푸른 잔디에서 놀고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둘러보면 근처에 부모가 접는 의자를 펴놓고 그늘에서 앉아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 미국에서 부모의 보호없이 아이들이 밖에서 놀면 경찰이 데려간다. 시편 기록자가 말하는 넓은 곳은 하나님께서 햇살처럼 비추어주시며 보호해 주시는 그 가운에서 마음껏 뛰놀고 싶다는 뜻이다. 시편 3편에는 세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첫째유형의 사람들은 2절에 나오는 “인생들아” 라는 말이다. 이는 사람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이는 세상 영광을 차지하고 있는 높은 사람들을 말한다. “나의 영광” 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다윗의 영광이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왕의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 사람들의 절을 받는 모습이 바로 나의 영광이다. 그런데 다윗의 대적들이 그 상황을 바꾸어서 “욕되게” 했다. 욕되게 한다는 말은 전쟁에서 패한 왕을 잡아 벌거벗기고 매로 때리고 벌거벗긴채 묶어 끌고가면서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거리로 삼는 것 같은 그림이다. 다윗의 영광이 이제 수치가 되어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하고 구경거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헛된 일을 좋아한다는 말에서 헛된 일이란 빈껍데기이다. 그것이 귀한 열매이고 영광인줄 알고 저들은 좋아하며 좇고 있지만 그것은 빈 껍데기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도 높은 자리에 오르고 돈을 많이 벌고 큰 명예를 얻으면 그것이 영광인줄 알고 좇다가 마지막엔 망신 당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세상 사람들이 좇고 있는 거 영광은 빈 껍데기이다.

“거짓을 구하려는가” 라는 말은 원어에서 거짓을 찾는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이 헛된 일을 좋아하고 추구하다가 어려움에 닥치면 저들은 거짓을 찾는다. 거짓이란 거짓신 우상을 찾는다는 뜻이다. 나의 모친께서 예수 믿기 전에는 어떤 신도 믿지 않고 성실하고 바르게 사시던 분이셨다. 나의 선친께서 내가 중1 때 강경법원으로 전출발령을 받고 가시다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전신이 마비가 되었을 때 충남대 병원에 가도 그냥 집으로 가라고 했었다. 나의 모친께서는 용하다는 한의원도 거절했지만 끝까지 매달리셨다. 마지막에는 그렇게도 경멸하던 무당을 불러다가 굿도 하셨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거짓신이나 무당을 찾는다. 1980년에 예수님을 만난 뒤 우리 어머니는 지금껏 새벽기도 한번도 안빠지고 기도하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예수님을 모를 때에는 우리 어머니도 막다른 골목에서 거짓신을 찾으셨었다.

첫째 유형인 인생들은 햇빛으로 비유된 하나님을 등지고 대적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헛된 거짓 신을 쫓고 세상의 빈 껍데기를 쫓으며 하나님과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어두움에 있는 거짓신을 좇으며 살아간다.

3절의 “경건한 자” 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시드’ 라는 말인데 ‘인자’ 라고 번역된 ‘헤세드’ 라는 말과 어원이 같은 말이다. 헤세드란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말한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자 고멜을 아내로 취해 집을 나가면 계속 다시 데려다가 아내의 옷을 입힌 것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따라서 경건한 자란 율법을 잘 지켜서 스스로 경건한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체험한 자가 바로 경건한 자이다. 이 사람은 또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자신이 받은 헤세드의 사랑 그대로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계속해서 다시 데려다가 제자리에 놓아주고 섬기는 사람이 바로 경건한 자이다. 김관성 목사님이 배톤루지 중앙교회 부흥회에 오셔서 하신 말씀인 “밑빠진 독에 물붓기”를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경건한 자이다. 하나님께 계속 등을 돌리고 가던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을 따라 나를 배신하는 사람까지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 그게 바로 경건한 자이다.

3절에서 “너희는 알지어다” 라는 말은 “너희들 똑바로 알아둬!” 라는 식의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를 특별히 구별해 주신다는 것을 똑바로 알아두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3:1절에 보면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다음 2절에서는 유다가 배신할 것도 아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른 제자들도 계속 엉뚱한 소리를 하고 세상 영광을 구하며 따라다녔지만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끝까지 저들을 사랑해 주셨다. 그 사랑을 깨닫고 나서 저들도 그 사랑을 행하며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들 같이 경건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똑바로 알아두라는 것이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인 말은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이다. 시편 기록자는 자신이 경건한 자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기에 확신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별히 구별해 주시고 기도 하기만 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것도 똑바로 알라는 것이다.

둘째 유형은 4절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시편 기록자는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라고 했는데 원어의 뜻을 다시 풀어 쓰면 “너희는 떨어도 돼! 그러나 죄를 짓지는 마!” 라는 뜻이다. 떨어도 된다는 말은 분노가 일어나서 주체를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그림이다. 이렇게 분노하면 그 다음에는 말로 욕을 하고 저주를 내뱉게 되어있다. 그것이 바로 죄를 짓는 것이다. 시편기자는 떨어도 되지만 절대로 그 분노를 표현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잠자리에 들어도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는 앞에 나온 표현과 짝을 이루는 말이다. 이것도 다시 풀어 쓰면 “말해도 돼! 그러나 잠자리 위에서만 자기 마음 속에서만” 이라는 뜻이다. 낮 동안 일어난 분노를 밤까지 삼키고 있다가 잠자리에 누우면 그 분노는 어느 정도 사그러진 상태이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분노를 다시 돌이켜보면 물론 욕도 나오겠지만 자신의 잘못도 보게 된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잠잠할지어다” 라고 한 것이다. 자신의 잘못도 깨닫고 나면 입 닫으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반쯤만 하나님께 돌아선 사람들이다. 이들은 빛되신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했지만 반쯤만 돌아섰기에 아직도 어두운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경건한 사람 같지만 어떻게 보면 마귀 사탄 같은 사람들이다.

5절에서 “의의 제사를 드리고” 라는 말은 바로 반쯤 돌아선 사람들에게 완전히 돌아서라는 말이다. “의의 제사” 는 완전히 회개하고 드리는 올바른 제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일 원수 진 일이 있으면 화해하고 돌아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분노를 품은 사람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서서 하나님의 영광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달아야 한다. 그 다음에야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번째 유형은 6절에 나오는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라고 말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선 사람들이다. 영광의 하나님의 빛을 완전히 받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자 다시 의심의 구름이 끼기 시작한 사람이다. 어려움이 계속되자 의심의 안개가 가득 끼다 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어두운 밤 좁은 곳에 계속 갇혀 있다 보니 “누가 구해줄까?” 하고 걱정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큰 문제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알고 대처하기에 문제가 안된다. 그러나 이미 은혜를 체험했던 사람이 의심의 구름에 싸여 영광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의심의 구름을 전염시킨다.

그래서 그 뒤에 이어 시편 기록자는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얼굴을 들어” 라는 말은 다시 해가 뜨게 해 달라는 그림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떠올라 어둡고 좁은 곳에 갇혀있는 자신에게 환히 비추어 달라는 것이다. 염려하는 사람은 마치 저녁에 해가 진 뒤에 밤이 깊어지면 다시는 해가 뜨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해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불끈 솟아오르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어 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고 사는 사람의 기쁨을 7절에서는 햇곡식과 새포도주가 풍성한 기쁨에 비유했다. 햇빛을 많이 받은 곡식과 나무들이 열매를 많이 맺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서 인도와 보호를 받는 사람이 빛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어두운 밤에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큰 기쁨 가운데 있다. 그래서 8절에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라는 것이다.

빛되신 주님께 등을 돌린 사람들은 햇빛을 보지 못하는 식물들처럼 죽어버린다. 빈껍데기와 거짓신들을 좇기 때문이다. 주님께 반쯤 돌아선 사람들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살아가기에 빛이 부족해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완전히 돌아섰지만 의심의 안개가 가득한 사람도 역시 빛 부족해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4:17절에서 “나를 본받으라” 라고 했고 또 이어서 “우리를 본 받은 것처럼 그와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고 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받고 빛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달려가는 자들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등을 돌리고 사는 사람들이나 반쯤 돌리고 양다리 걸친 사람들이나 안개가 가득 낀 것 같은 사람들에게도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그 본보기는 우리가 모든 일이 잘되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캄캄한 밤 같은데다가 꼼짝도 못할 상황에 있더라도 시편 기록자처럼 평안히 눕고 자면서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안전히 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날이 밝으면 해가 다시 찬란하게 비추듯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를 비추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사진출처: https://pixabay.com/p-690198/?no_redi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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