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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0편

시편 30편에서 시편 기록자는 깊은 우물에 던져진 것 같고 스올에 던져진 것과도 같았던 자신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

2019. 2. 12.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30편 강해 설교

시편 30편에서 시편 기록자는 깊은 우물에 던져진 것 같고 스올에 던져진 것과도 같았던 자신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건져올려 주셨다는 찬양이다. 자신의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은 자신의 수의를 벗겨 주시고 나들이 옷으로 갈아입히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구원의 기쁨을 다른 거룩한 자들과 함께 나누며 찬양하는 내용이다. 오늘 말씀을 현재 우리가 찬양하는 태도와 비추어 보고 은혜를 깨닫고 함께 찬양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

I. 죽음에서 건져주신 은혜를 찬양(1-3)

1절은 원어에서 “찬양하렵니다, 오 여호와여!” 라는 말로 시작한다. 찬양이란 하나님을 높인다는 뜻이다. 시편 기록자는 여호와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건져 올려 주시고 내 대적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건진다는 말은 출애굽기 2:16-19절에서 “미디안의 제사장의 딸들이 물을 길러왔다” 고 할 때 쓰인 말이다. 이는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여호와께서 자신을 건져 올리셨다는 뜻이다. 새번역에서 수렁이란 말은 원어에는 없는 말인데 의미를 살리기 위해 첨가한 말이다. 창세기 37:24절에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물이 없는 우물에 던져 넣었다는 것과도 같은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적들이 사망의 깊은 우물에 던져버린 것을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건져 올려 주셨으니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 올려드리겠다는 것이다.

이 원수는 실제로 우물에 넣은 대적들이 아니다. 시편 기록자는 병에 걸려 죽게 되었거나 심각하게 위독한 상태에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치료해 주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2절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이라고 부르며 “내가 여호와께 울부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고쳐주셨습니다” 라고 한 것이다.

3절에서도 “여호와여!” 라고 부르며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라고 했다. 이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뜻이 아니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는데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통해 구조되었다는 뜻이다. 1절에서 깊은 물에 빠진 것은 깊은 샘물에 빠진 그림이었는데 3절에서는 땅 속 깊은 곳인 스올에 빠져 있는 그림이다. 둘 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을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려주시는 그림으로 비유한 것이다.

또 3절 뒷부분에서는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라고 했다. 새번역은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라고 라고 했다. 원문의 뜻은 아예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했다는 뜻이 아니라 수많은 시체 더미들 사이에 쓰러져 있다가 살아나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우리 어머니의 친척 분 중에는 실제로 시체 더미들 사이에서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625 때 퇴각하던 인민군들이 산에다 땅을 파라고 해서 모두가 땅을 팠는데 그 안에 서라고 하더니 모두 사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분은 총에 맞지 않았는데 그냥 죽은 척하고 쓰러졌다는 것이다. 인민군들은 총검으로 하나씩 찔러 죽은 것을 확인했는데 이분은 허벅지를 찔렸는데도 소리도 내지 않고 그냥 참았다고 한다. 그들은 흙으로 대충 덮고 퇴각을 했고 그 시체 더미들 속에서 물길러 가는 아낙네를 발견하고 소리쳐서 살아났다고 한다. 3절 뒷부분은 다 죽은 줄 알았던 시체 더미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그림이다.

II. 찬양으로 초대(4-12)

1절의 찬양이란 말은 높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4절의 찬송이란 말은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한다는 말이다. 누구에게 찬양하자고 초대를 하는가? “주의 성도들아” 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 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이란 히브리어로 ‘하시드’ 라는 말인데 ‘인자’ 라고 번역된 ‘헤세드’ 라는 말과 같은 말에서 온 말이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체험한 자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한결같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절대로 율법을 잘 지키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던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들 같은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배신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경건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함께 찬양하자고 초청하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체험한 사랑은 다른 경건한 자들도 함께 체험한 사랑이기에 함께 찬양하자고 초청하는 것이다.

5절은 왜냐하면 이란 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4절의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주님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기 때문이다. 잠깐인 노염과 영원한 은총이 비교된다. 주님의 노염이란 주님의 콧김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바로 주님의 콧김이다. 분노하셔서 콧김을 내 품으시는 것은 잠깐이시고 다시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분노하셔서 콧김을 내품으실 때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는 것이다. 드러면 영원한 은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짝을 이루는 말은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고 했다. 역시 슬픔도 하룻밤 뿐이고 그 다음에는 찬란한 아침을 맞는다는 것이다. 밤새도록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며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찬란한 아침을 주시고 구원의 기쁨을 큰 소리로 외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깊은 스올에 빠졌던 것과 같은 죽을 위기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구해 주셔서 찬란한 아침을 맞게 하신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6-7절은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위기를 나누고 있다. 6절을 보면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잘될 때는 자만심에 빠져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자신이 잘해서 이룬 성과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죄이다. 이러한 자만심은 바로 하나님 대신 자신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비추어 볼 때 자만심은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우리도 시편기록자와 똑같다. 모든 일이 다 잘되고 형통하는 것이 축복이 아니다. 그렇게 형통할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셨다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척 하지만 사실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마음이 숨어있다. 겉으로만 찬양을 하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위기에서는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7절은 . “여호와여!” 라고 부르는 말로 시작한다. 시편 기록자는 여호와를 향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라고 고백한다. 원어는 “당신의 은총으로 내 산은 굳게 서 있었다” 라고 먼저 말한다. 이는 다윗의 왕국이 크게 강성해지고 재산도 많이 늘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산과 같이 되었던 때를 회상하는 것이다. 자신의 산이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은 것이 자신의 능력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는 자신의 성공이 자신이 잘해서 그렇다고 자신을 찬양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원어는 바로 이어서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라고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자신이 이룬 산인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게서 고개를 돌려버리자 즉시 재난이 닥쳤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덕이라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더라도 똑 같은 은혜를 누리여 한다. 만약 그러한 은혜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축복을 스스로 이루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시편 기록자가 받은 고난은 의롭게 살다가 핍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만함 때문에 받은 것이다. 교만한 마음을 고쳐 주시려고 병들어 죽을 위기까지 끌고 가셨던 것이다. 그렇게 죽을 위기를 겪고 나서야 자신이 잘될 때 자신이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라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짜 위기는 어려움을 당할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잘되는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할 때이다.

8-10절은 이전에 겪었던 위기의 순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했던 때를 되새기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누리고 사느냐것이 은혜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교만을 깨닫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자체가 은혜인 것이다.

8절은 원어에서 “당신께, 오 여호와여!”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여호와를 부르며 큰 소리로 주님께 부르짖은 것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깨닫고 돌아서서 주님께 부르짖는 순간이 바로 시편 기록자가 두고 두고 기억하고 찬양하고 싶은 감격의 순간이다. 주님께서 시편 기록자를 돌아보시자 이어서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기를" 이라고 한 것이다. 또 다음에는 여호와 대신 ‘아도나이’ 께 은혜를 간구했었다고 한 것이다. 아도나이는 주인이란 뜻인데 여호와 거룩한 이름 대신에 부르던 호칭이다. 성전에서 여호와를 애타게 부른 것이 먼저이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처지를 말씀드리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했던 것이다.

9절은 10절에서 실제 구할 은혜를 말씀드릴 내용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라는 말은 직역하면 자신의 피가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이다. 다음 단계는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이다. 이는 내가 만약 앞에서 말한 깊은 우물이나 스올에 내려간다면 그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라는 것이다. 또 피를 흘리고 구덩이로 내려간 다음에는 다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신실하심을 선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유익이란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제 찬양하려는 시편 기록자가 그대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버린다면 하나님은 손해보는 장사를 하는 것이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과거에 자신이 그렇게 자신을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주님께 간구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살려주셔야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고 하나님과 담판을 지었던 것을 회상한 것이다.

이처럼 9절에서는 자신을 살려주셔야 주님께도 유익이라고 말한 뒤 10절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을 살려달라고 한다. 먼저 “들어주세요 여호와여” 라는 말로 10절을 시작한다. 들어달라고 간구 한 뒤 먼저 “은혜를 베풀어 달라” 고 한다. 자신이 잘했으니 살려달라는 것이 아니다. 언약에 근거한 한결 같은 사랑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잘한 것 하나도 없지만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또 다시 “오 여호와여!” 라고 부른 뒤 계속 다음 간구가 이어진다. 그 다음 간구는 “나의 돕는 분이 되어 달라” 는 것이다. 10절도 역시 하나님께 간구했던 자신의 기도를 회상한 것이다.

11절은 그렇게 간구를 해서 응답을 받은 기쁨을 되새기는 장면이다. 5절에서 밤의 슬픔과 아침의 기쁨이 대조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통곡과 기쁨의 춤이 대조하고 있다. 밤에 통곡하는 장면과 아침에 기쁨의 춤을 추는 장면을 대조한 것이다. 또 이를 다시 슬픔의 상복과 기쁨의 나들이 옷을 대조하고 있다. 슬픔의 상복이란 수의를 입고 땅에 묻혔던 모습이다. 그런데 이제 다시 살아나 그 수의를 벗게 하시고 나들이 옷으로 갈아 입히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니 12절에서는 내 영혼이 악기를 연주하겠으며 잠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영혼이란 원어에서는 영광이다. 나들이 옷을 갈아입은 자신의 모습이 빛이 나기에 그 빛나는 모습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하고 절대로 입다물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이어서 2절과 같이 “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을 연이어서 부른다. 그렇게 두 번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원한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이다.

결론 및 적용

우리의 문제도 시편 기록자처럼 교만이 문제이다. 우리가 잘된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자신이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악이다. 이는 마치 길거리에 버려져서 죽게 된 것을 데려다가 치료해 주고 먹이고 입히고 학교도 보내서 성공하게 해 주었더니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성공했다 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과도 같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은혜를 베풀고도 그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스스로 만족해 하며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악이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먼저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은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시작이다. 그 거룩함은 우리도 우리의 원수들을 용서해 주는 것을 통해 점점 성장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용서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 스스로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가 좋은 때가 절대로 아니다. 그때는 교만에 빠져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던 때이기 때문이다. 또 돌아보면 수의를 입고 땅에 묻힌 것과 같은 절망감에 빠졌던 때도 있을 것이다. 그 때 한없이 절망에 빠져 낙심하며 죽어가면 진짜 멸망의 순간이다. 하지만 그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서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면 그 때가 정말 은혜의 순간이다.

우리에겐 아주 짧은 시간이 다시 주어진 셈이다. 그 시간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만 높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삶이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동안 혼자서 찬양하면 안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은혜를 깨닫도록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서 함께 찬양해야 한다.

사진: Magnificient Sunrise,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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