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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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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7편

이 시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2017. 4. 18.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이 시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1-6절인데 다윗이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확신을 선언하는 내용이다. 둘째 부분인 7-13절은 다윗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내용이다. 마지막 부분은 14절인데 제사장이 예배자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하는 내용이다.

다윗이 선언하는 확신인 첫째 부분은 1-6절이다.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라는 말로 시작한다. 시편 23편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한 것과 똑 같은 구조이다. 어째서 여호와를 “빛과 구원” 이 두가지로 비유했을까? 빛과 구원이 어떻게 연결될까? 여호와가 빛과 구원이시라고 한 뒤 한 말을 보면 실마리가 풀린다. 이어지는 말은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이다. 여기서 두려워 한다는 말은 감정적인 두려움이다.

첫째 다윗이 여호와를 빛이라 한 이유는 다윗이 어두움에 있어 대적을 파악할 수 없을 때에도 여호와가 빛이라는 것이다. 시편 23:4절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게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했다. 어두움 가운데서 대적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빛되신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다윗이 여호와를 구원이라 한 이유는 이제 대적이 보이는 상황이다. 대적의 위치나 숫자를 알 수 없을 때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빛되신 여호와께서 비추어 주시니 엄청난 대적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다윗은 독안에 든 쥐처럼 아주 좁은 곳에 갇혀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말은 “넓게 만든다” 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좁은 장소에 끼여 있는데 건져 내셔서 넓고 안전한 장소로 옮겨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지만 실제 상황은 적들의 화살이 날아오고 이어서 적들이 총공격을 해오는 상황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라고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능력이란 말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강한 성이나 요새를 말한다. 상황은 정말 위급하다. 하지만 다윗은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라고 말한다. 무서워한다는 말은 1절 앞부분에 나온 두려워한다는 말보다 훨씬 더 강한 말이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대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 오는 심리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1절 뒷부분의 무서워한다는 말은 실제 화살이 날아오고 적들이 총공격해오는 상황에서 오는 공포감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자신의 생명을 지켜 실 강한 성벽이요 요새가 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뒤로 얼른 숨으면 되기 때문이다.

2절은 1절과는 반대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1절에서는 먼저 대적들이 다윗을 포위해서 진을 치고 있는 그림이 먼저 나오고 대적들이 공격해 오는 장면은 뒤에 나왔다. 그러나 2절에서는 대적들이 공격하는 장면이 먼저 나오고 포위해서 진을 치고 있는 장면이 나중에 나온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흔히 나오는 교차 배열 구조(chiasmus)이다. 글이 아닌 말로 의사소통하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기억장치이다.

2절은 적들이 공격해 오는 그림이다. 1절은 전쟁터의 그림으로 대적을 묘사했다. 그러나 2절은 다윗을 잡아 먹으려고 달려드는 사나운 맹수로 묘사하고 있다. 2절 앞부분은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라는 말로 시작한다. 악인이란 행실이 악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들 뜻대로 사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실제 처한 상황은 전쟁터의 상황은 아니다. 악한 자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을 맹수가 공격해 오고 있는 모습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2절 뒷부분에서 악인은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 로 바뀐다. 악인들을 좀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대적이란 말의 어원은 학대와 고문을 하며 죽이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원수 라는 말은 적대감을 품고 대적하고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악인들은 다윗을 현재 괴롭히고 있고 또 적대감을 품고 대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실족하여 넘어졌다 했다. 실족이란 말은 비틀거리는 모습이고 넘어졌다는 말은 완전히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머리를 다치는 모습이다. 이들은 다윗을 해치려고 단거리 선수처럼 전력을 다해 달려오다가 걸려서 비틀거리다가 꽈당 넘어진 것이다. 전력으로 달려오던 힘이 걸려 넘어지면 그 힘만큼 강하게 땅에 메쳐지는 것이다. 사실은 연속동작인데 슬로우 모션처럼 구분해서 묘사한 것이다.

3절은 다시 전투 장면으로 바뀐다. 그런데 실제 공격모습이 아니라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라는 말에서 군대라는 말이나 진을 친다는 말은 같은 말에서 온 말이다. 하나는 명사이고 하나는 동사일 뿐이다. 따라서 진이 대적하여 진을 칠지라도 라는 식의 말이다. 공격대형으로 다윗을 포위한 군대가 텐트를 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두렵지 않다 했다. 두렵다는 말은 1절 앞에 나온 말과 같은 말로 심리적인 두려움이다. 적이 실제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포위하고 텐트를 친 상태이다.

또 3절 뒷부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라는 말은 진을 친 군대가 일어나서 공격 준비를 한 상태입니다. 명령만 떨어지면 총공격을 할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라는 말은 그래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확신을 선포한 뒤 다윗은 4-6절에서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 앞에서 한마음을 품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4절의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에서 바라는 것과 구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바란다는 말은 요청한다는 뜻으로 기도한다는 말과 같은 말로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구한다는 말은 간절히 찾는다는 말이다. 전쟁터에서는 생명을 구해달라고 간구하는 모습처럼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기도하며 간절히 간구하는 것은 한 가지 곧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이다. 죽는 날까지 항상 여호와의 집에 살길 간구하는 것이다.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하길 원하는 것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 이다.

먼저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라는 말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름다움’ 이란 “좋다” 는 말에서 온 말이다. 시편 141:6절에서 “내 말이 달므로” 라는 말에도 쓰였다. 잠언 15:26절과 16:24절에서는 “선한 말” 이라는 말에도 쓰였다. 따라서 이 말은 성전 건물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여호와의 달콤한 말씀을 듣는 것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성전에서 선포되는 여호와의 달콤한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머릿 속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또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 이란 말에서 사모한다는 말은 원래 나눈다 구별한다는 말에서 온 말이다. 레위기 13:36절에서는 “누른 털을 찾을 것 없이” 라는 말에서는 찾는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 레위기 27:33절에서는 “ 그 우열을 가리거나” 라는 말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지 구별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따라서 이는 앞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들은 여호와의 달콤한 말씀들 중에 어떤 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인지 묵상하면서 찾는 것을 말한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는 것이므로 새번역처럼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라고 할 수도 있다.

5절은 원어에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왜 그렇게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며 살길 원하는가 하면 이란 뜻이다. 5절에서는 환난 날에 보호해 주시는 장소가 세번 바뀐다. 첫째는 “그의 초막에 비밀히 지키시고” 이다. 비밀히 지키신다는 말은 출애굽기 2:2절에서 모세를 비밀리에 숨긴 것과 같은 말이다. 또 초막이란 말은 덮는다는 말에서 온 말이다. 출애굽기 37:9절에서는 그룹의 날개로 덮은 속죄소를 가리키는 말로 썼다. 출애굽기 33:22절에서는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가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어 두었다가” 라는 말에서 덮어 둔다는 말에서도 나온다. 따라서 첫째 그림은 환난의 날에 좁은 틈에 넣어 두시고 임시로 주의 날개나 손으로 위를 덮어 주셔서 급히 숨겨 주시는 모습이다.

둘째 그림은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에 나온다. 원어에서 장막과 숨긴다는 말은 같은 말에서 온 말이다. 직역하면 “숨기시는 곳에 숨기시며” 라는 뜻이다. 시편 18:11절에는 “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라는 말에서 ‘숨는 곳’ 이란 말에서 나온다. 시편 91:1절에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라는 말에서 ‘은밀한 곳’ 이라는 말에서도 나온다. 첫번째는 임시로 덮어 보호해 주시는 곳이라면 이곳은 숨어서 생활이 가능하도록 장기간 보호해 주시는 곳이다.

셋째 그림은 “높은 바위에 두시리로다” 에 나온다. 이는 높은 바위 꼭대기에 요새를 지어놓으시고 그 위에 두신다는 뜻이다. 맨 처음에는 급한 위기 때 임시로 바위 틈에 숨기시고 그 손으로 덮어 주셨고 둘째는 장기간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에 숨겨 보호해 주셨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숨기시지 않으신다. 높은 바위 절벽 위에 안전한 장소를 지어 놓으시고 그곳에 두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보며 하나님과 의논하며 살아가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단계적으로 지켜 주셔서 결국 가장 안전한 곳에 세워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 높은 바위는 시온 산 꼭대기에 있는 예루살렘 성이고 그 안에 있는 여호와의 성막이다.

6절에서는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라고 했다. 원수들이 완전히 자신을 포위하고 있지만 더 이상 숨지않고 당당히 머리를 높이 든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신을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기에 높은 바위 위의 요새인 하나님의 품에서 자신을 포위한 적들을 내려다 보겠다는 것이다. 또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라고 했다. 이는 여호와의 장막에서 기쁨으로 함성을 지르며 희생제물을 드리겠다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기에 원수들을 내려다 보며 머리를 높이 치켜 들겠다고 한 것이다. 전쟁에서 패하면 적들 앞에서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다. 승리를 확신하고 무릎 꿇은 적들을 상상하며 머리를 치켜 든다고 한 것이다. 또 주님의 장막에서 환호성을 울리며 주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이다. 또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찬송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적들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보호하심 안에서 승리의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회중들 앞에서 선포한 다윗의 확신이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보호하심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둘째 부분인 7-13절은 다윗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내용이다. 7-10절은 일반적인 기도이다. 원어에서 7절은 “들어주십시오, 여호와여” 라는 말로 시작한다. 언제 들어 달라는 것인가? 다윗이 소리 내어 큰 소리로 부르짖을 때 들어달라는 것이다. 그 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응답해 달라는 것이다. 8절에서 다윗은 “내 얼굴을 찾으라” 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윗 자신의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내가 주의 얼굴을 찾았나이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9절에서는 자신에 대해 분노하시지 말아달라고 삼단계로 요청을 한다. 첫째는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는 분노의 첫째 단계이다. 둘째는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이다. 이는 당신의 종에게 분노의 콧김을 내뿜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얼굴을 숨기는 것보다 한단계 더 진노하신 것이다. 셋째를 말하기 전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라고 말한다. 과거에도 그렇게 도와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에 감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나를 버리지 마소서” 라고 말한다. 버리는 것이 최고의 분노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라고 고백한다.

10절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라는 말은 실제 다윗의 육신의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왕권을 내어준 사울이 자신을 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적인 부모인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라고 했다. 영접한다는 말은 원어에서는 수확한다는 말이다. 쓸모없는 쭉정이를 버리는 사울과 다윗을 알곡으로 여겨 수확하시는 하나님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곡식 단을 끌어 안으시듯 자신을 그 팔로 안아 주신다는 것이다.

11-13절은 특별한 기도제목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안아 주셨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11절은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왕의 역할 잘 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는 것이다. 먼저 가르쳐 달라는 말은 원어에서 화살을 쏜다 또는 돌을 던진다는 뜻으로 쓰던 말이다. 이 말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는 것에 쓰이고 또 비유적으로 율법의 가르침을 주시는 것에도 쓰인 것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던져 주시듯 주의 길을 던져 달라는 것이다.

둘째 기도는 인도해 달라는 것이다. “주의 도” 라는 말에서 도는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평탄한 길에서 길은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율법을 가르쳐 주시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삶으로 실천하며 살아갈 때 평탄한 길로 인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원수들 때문이다.

12절은 자신을 그 원수들에게 넘겨 주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원어는 좁은 틈에 넘겨주지 말라는 뜻인데 대적들의 손아귀에 잡히는 것을 뜻한다. 그 다음에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자신이 대적들의 손아귀에 잡히게 되면 거짓 증인들이 자신을 대적해서 일어날 것이고 자신을 향해 악을 토한다는 것이다.

13절은 “내가 산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을 확실히 믿었도다” 이다. 기도가 끝나고 자신의 확신을 다시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신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14절인데 제사장이 예배자인 다윗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두가지이다. 첫째 여호와를 항상 기다리라는 것이다. 위기에 처해 있을 때와 도움이 필요할 때는 항상 나타나셔서 도우실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강하고 담대하라 했다. 하나님께서 항상 승리하게 하시고 대적들을 정복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과거에 이미 구하셨고 앞으로도 구하실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도 과거에 우리를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현재 고난도 이기도록 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고백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도록 하자. 그리고 그 확신을 근거로 하나님께 간절히 도우심을 구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피난처 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 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신다. 그 도우심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던져주신 하나님 말씀의 본래의 뜻을 따라 바른 길을 갈 때 얻게 되는 것이다. 오직 주의 말씀을 듣고 주만 의지하고 그 말씀이 인도 하시는 대로 따라가자. 그 길이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와 인도를 받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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