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편도 순례자가 예배하러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은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자격의 핵심은 자신이 거룩하고 완전하다는데 있지 않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주신 완전하신 말씀을 따라가고 있다는데 있다. 또 그렇게 따라가면서 하나님 앞에 속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을 얻은 수많은 회중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찬양을 드리겠다는 것이다.
1-3절은 시편 기록자가 하나님 앞에서 숨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내용이다. 원어에서 1절은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라는 말로 시작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재판관이시고 통치자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재판해서 무죄선고를 해 달라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하나님께 자신을 재판해 달라고 하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먼저 시편 기록자는 자신이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 라고 했다. 하지만 완전함이란 말은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켰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다는 것이고 그 완전하신 말씀 안에서 행했다는 뜻이다. 이어서 나오는 말을 보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어지는 “흔들리지 아니하고” 라는 말은 본래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는 흔들림없이 주님 안에서 신뢰해 왔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완전함 안에서 걸어왔다는 것은 완전하신 하나님 말씀인 율법 이라는 길 위를 벗어나지 않고 그 길을 잘 따라 걸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잘해서가 아니고 여호와를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을 잡고 의지하며 걸었기에 넘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1절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좁은 길을 걸어가는 그림이다. 그 길 양쪽은 모두 낭떠러지여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는 아찔한 절벽 같은 길이다. 시편 기록자가 걸어가야 하는 완전한 길은 바로 그런 길이다. 그 길은 자기 혼자서는 걸을 수 없다. 금방 현기증을 느끼고 길 옆으로 발을 헛디뎌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손을 잡아 주시기에 그분을 의지해서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미끄러져 넘어지지않고 완벽하게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1절의 초점은 자신이 완벽하게 율법을 지켰다는데 초점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따라 걸었기에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손을 잡아 주셔서 절벽 아래의 멸망의 길로 떨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온전히 살아왔다고 해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겉으로만 온전히 따라 사는 척 했는지 아니면 그 속마음까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했는지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2절에서 순금을 시험하는 그림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 놓는다.
먼저 여호와를 부르며 “나를 살피시고” 라고 말한다. 살핀다는 말은 눈으로 자세히 본다는 뜻이다. 금 세공사가 순금인지 확인하는 첫 단계는 눈으로 보고 색깔로 구별하는 것이다. 만약 구리가 섞여 있다면 색깔이 다를 것이다. 둘째는 ‘시험하사” 이다. 이는 이로 깨물어 보고 긁어도 보아 도금인지 속까지 금인지 확인하는 단계이다. 하지만 이 검사도 여전히 피상적이고 깊은 속까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금을 두껍게 입혀 놓았다면 이러한 검사로도 완전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셋째는 “내 뜻과 양심을 단련하소서” 이다. 단련하소서 라는 말은 높은 열로 녹여서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불로 녹여 본다면 아무리 두껍게 도금을 했어도 다 드러나기 마련이다. “내 뜻과 양심” 이란 원어에서 콩팥과 심장이다. 콩팥이란 감정이 자리하는 곳이고 심장이란 생각이 자리하는 곳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시편 기록자는 자신의 속사람인 생각과 감정까지 다 드러내서 검사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은 겉으로만 하나님을 따르는 척 도금한 금 같은 신앙이 아니라 속까지 다 순금 같은 신앙이라는 것이다.
3절은 원어에서 왜냐하면 이란 말로 시작한다. 3-5절은 앞에서 말한 대로 자신이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증거를 대는 내용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긍정적인 표현과 부정적인 표현으로 증명을 하고 있다.
먼저 3절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3절은 먼저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라고 했다. 인자하심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 라는 말인데 한결 같은 사랑이라는 뜻이다. 항상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눈 앞에 두고 바라보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편 기록자가 구약성경의 율법서와 예언서를 통해 본 것은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수많은 명령들이 아니다. 그 말씀 안에 담긴 큰 그림인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바라본 것이다. 헤세드의 사랑은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죄인들을 참아 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이 죄를 지었을 때에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용서해 주신다는 것만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이다. 절대로 자신이 완벽하게 선하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또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라고 했다. 진리라는 말은 신실함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옳다. 이는 하나님께서 항상 변함없이 성실하게 언약을 지키신다는 것을 믿고 그 언약의 말씀을 따라 걸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눈으로는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본 것이다. 그러면서 그 발은 항상 성실하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 걸은 것이다. 그렇게 믿었기에 자신에게도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결 같은 사랑을 바라보며 약속의 말씀을 따라 걸은 것이다. 그렇게 한결같은 사랑을 바라보며 약속의 말씀을 따라 걷는 자가 순금 같은 신앙이지 외형적인 경건을 행하는 자가 순금 같은 신앙은 아닌 것이다.
4-5절은 악인들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서 자신과 비교한다. 자신은 악인들과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먼저 4절에서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도 아니하였사오니” 라고 했다. “허만한 사람” 이란 말에서 허망하다는 말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뜻으로 주로 우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앉는다’ 는 말은 함께 거주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드러내놓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는 함께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는 말에서 “간사한 자” 란 숨긴다는 뜻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하나님만 제일로 섬기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금으로 살짝 도금을 한 사람들과도 같다. “동행한다” 는 말은 본래 간다는 뜻인데 이는 성전에 예배하러 간다는 뜻이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마음 속에는 우상이 들어있는 자들이다. 순금 같은 신앙을 가진 시편 기록자는 이런 도금된 금 같은 신자들과는 함께 예배 드리러 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는 5절에서 계속 증거를 제시한다. 먼저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라고 했다. 악인이란 말에서 악이란 좋다는 뜻의 반대말이다. 좋다 라는 말은 좋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악이란 하나님의 성품과는 반대가 되는 자들이다. 이들은 행동으로 드러나게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기 보다는 악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척 하지만 사실 하나님을 미워하고 이웃도 미워하는 위선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서도 미워하는 자들이기에 그런 자들과 예배하는 것 조차도 미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나온 악인이란 말은 드러내 놓고 악을 행하는 범죄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품이 악한 자들과는 함께 예배하기를 미워했지만 행동이 악한 자들과는 “같이 앉지도 아니하리이다” 라고 했다. 드러내놓고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런 악한 자들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도 대칭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4절에서는 헛된 것을 좋아하는 자들 즉 드러내놓고 우상숭배하는 자들이 먼저 나온다. 5절에서는 드러내놓고 악을 행하는 범죄자들이 나중에 나온다. 그러한 자들은 드러내 놓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드러내 놓고 하나님을 거부한다. 그런 자들과는 이웃하며 함께 살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그 안쪽인 4절 뒷부분에는 “간사한 자들” 즉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이 나온다. 이어서 5절 앞부분에서도 행악자가 나오는데 이는 성품이 악한 자들이다. 진짜 조심해야 할 사람들은 이들처럼 겉으로는 거룩한 척 하면서 사실은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성전에 나와 예배하는 척하며 거룩한 척 하는 자들이기에 이런 자들과는 함께 예배하러 가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진짜 경계하는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우상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금도금 된 신자 같은 간사한 자들이다.
시편 기록자는 이처럼 하나님만 따라 걸었다는 것을 증명한 뒤에 6-8절에서는 성전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의식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6절에서 먼저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원어를 직역하면 “내가 순결함 안에 손을 씻는다” 라는 뜻이다. 당시 성전 문 앞에 물그릇이 있었다. 성전에 들어가기 전 그 물로 먼저 손을 씻어야 했던 것이다. 손을 씻는 것은 죄악된 행동을 하는 손을 씻는 것이다. 하지만 그 행동의 근원인 심장과 콩팥까지 깨끗이 씻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그러면 성전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들어가서는 “주의제단을 두리 다니며” 라고 했다. 제단은 하나님의 식탁을 뜻하는데 하나님의 임재와 자비의 상징이다. 그 제단을 돌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모습이다. 제사를 지낸 후에는 그 음식을 함께 나누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식탁교제를 상징한다. 시편 기록자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시편 기록자가 위선자들과 함께 예배하러 가지도 않았고 드러내놓고 우상숭배하는 자들과는 이웃에 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7절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의식이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죄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7절에서는 “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고” 라고 했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 감사를 큰소리로 외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라고 했다. 말한다는 말은 손가락으로 꼽으며 하나씩 증거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감사를 큰 소리로 외치고 또 감사해야 할 놀라운 일들을 하나씩 손으로 꼽아가면서 전한다는 것이다. 이는 명절에 모인 많은 예배자들 앞에서 창조와 출애굽과 언약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꼽아 가면서 감사를 외치는 모습이다. 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짐한 후 8절에서는 여호와를 부르며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라고 했다. 여기서 시편 기록자가 사랑하는 것은 두가지이다. 먼저 “주께서 계신 집”이란 피난처라는 뜻이다. 시편 기록자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집으로 피하겠다는 것이다. 이어서 또 사랑하는 것은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 이다. 머무는 곳이란 텐트라는 뜻으로 성막을 가리킨다. 그 성막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 두가지 표현은 둘 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뜻한다. 하지만 그 초점은 다르다. 주께서 계신 집은 시편 기록자가 피할 곳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은 영광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 표현의 강조점은 성막이 아니다. 그 성막에는 시편 기록자가 달려가 안길 피난처이신 주님이 계시기에 사랑한다는 것이다. 또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이기에 사랑한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성막을 떠나신다면 그곳을 아무리 거룩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꾸며 놓는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고향 집과도 같다. 고향집이 아무리 그리워도 부모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필자가 작년에 아들 내외와 한국에 방문했을 때 전에 우리 가족이 함께 살던 대전 둔산의 아파트 옆을 지난 적이 있다. 필자가 아들에게 우리가 살던 집이라 하자 아들은 한번 쳐다보고 한 두 마디 하고는 끝이다. 과거에는 멀리 나갔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엄마 아빠를 부르며 들어오곤 했던 곳이다. 그러나 그 집에는 필자의 부부가 머물러 있지 않기에 필자의 아들 딸에게 더 이상 큰 의미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건물인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예배당 건축을 성전 건축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면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건물 자체가 성전은 아닌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순금 같은 신자들이 모이면 숫자가 적어도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므로 그곳이 성전이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건물을 세우고 수만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해도 겉으로만 거룩한 척하는 도금된 금 같은 목회자와 성도들로 가득하다면 그곳은 성전일 수 없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과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기록자가 사랑하는 성막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기 때문이다. 성막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는 것이다. 절대로 이것을 혼동하면 안된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곳으로 전락시켰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고 이방민족들로 하여금 그 성전을 허물게 하셨다.
8절에서 시편 기록자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다. 우리도 이 시편 기록자의 마음을 느끼고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을 사랑해야한다. 만일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면 4절에 나온 간사한 자이고 5절에 나온 악인이다.
9-12절은 무죄를 증명한 후 간구하는 기도이다. 먼저 9절은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라고 했다. 영혼이란 숨을 쉬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고 생명이란 살아 있다는 뜻이다. 자신은 죄인들이나 살인자들과는 다르니 그들과 같이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10절은 그 이유를 설명한 내용이다. 죄인과 살인자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먼저 “그들의 손에는 사악함이 있고” 라고 했다. 사악함이란 악한 계획들을 들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바벨탑을 세우려는 계획이나 의인들을 해치려는 계획 같은 것을 뜻한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지 않기에 자신들의 계획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록자 같이 진실된 사람들을 해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는 악인들은 의인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들의 거짓이 의인들 때문에 드러나기 때문에 해치려 하기 마련이다. 또 “그들의 오른손에는 뇌물들이 가득하오나” 라고 했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뇌물을 받고 의인을 해치려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누가 사악한 자들 즉 악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자들인가? 이들은 드러내 놓고 우상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자신들 스스로가 계획을 세우는 자들이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권세와 명예와 물욕을 채우는 자들이다.
11절은 그러한 악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시편 기록자 자신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라고 했다. 이는 1절과 마찬가지로 완전함 안에서 걸으려 한다는 뜻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똑바로 흠이 없이 걸으려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신을 구해 달라는 것이다. 구해 달라는 말은 죄에게 사로 잡혀있는 상태에 있는 시편 기록자 자신을 값을 지불하고 풀어 달라는 뜻이다. 또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말은 풀어 준 뒤에도 은혜로 대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거룩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12절은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라고 말한다. 평탄한 자리는 많은 회중들이 함께 서서 예배하는 성전 뜰을 가리킨다. 그곳에서 자신처럼 진실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많은 무리들과 함께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주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을 축복한다는 뜻이다. 또 평평한 곳에 서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흠이 없고 정직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의 소망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겉과 속이 똑같이 하나님만 완전히 의지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따라서 가는 자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길 원하는 것이다. 또 그러한 사람들과 이웃하면서 함께 복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 기록자가 실제로 그러한 사람들을 완벽하게 구별해서 따로 떨어져 살았다는 뜻이거나 그런 사람들하고만 예배하며 살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되길 소망하며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도 악한 자들과 섞여서 살고 있다. 교회 안에는 시편 기록자처럼 순금 같은 신자들도 있지만 겉과 속이 다른 도금된 신자들도 있다.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섞여있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하셨다. 세상과 완벽히 분리되어 사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섞여 살지만 그런 악한 자들과는 삶에서나 예배에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거룩한 자들과는 함께 진실된 교제를 나누며 함께 진실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도금된 가짜 금 같은 신자들과는 분명히 거리를 두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겉만 번쩍이는 금이 아니라 속까지 다 순금인 사람들과 함께 진실된 믿음의 교제를 나누고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손꼽아 증거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다 우리 주님의 빛나는 영광으로 가득채워 그 빛을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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