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편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위기에 빠진 시편 기록자가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구원 받아 하나님 말씀을 따라 흠없고 똑바르게 살길 원하는 내용이다. 시편 기록자가 바라는 구원은 자신 만이 아니라 자신의 자손들과 자신이 속한 신앙공동체 전체이다. 이 시편은 교차 배열법(chiasmus)으로 되어 있다. 이는 마치 미술시간에 물감을 짜 넣고 접어 접은 면을 중심으로 대칭이 되도록 만든 데칼코마니와도 같다. 그 중심의 접은 면에 해당하는 구절은 11절의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이다. 8-14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고백하는 부분인데 11절의 둘레를 감싸고 있다.
그 양쪽 밖에는 시편 기록자의 기도가 있다. 이 시편은 죄를 용서 받고 목을 빼고 하나님을 기다려 영접하여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길 기도하는 내용 그 양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시편 전체를 지배하는 그림은 길이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에게 오실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는 것이 이 시편을 지배하는 그림이다.
1-7은 기도이다. 1절의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는 원어에서 “내 영혼을 주를 향해 들어 올립니다” 라는 뜻이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오시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는 모습이다. 이는 인내하며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모습이다.
왜 그렇게 주님이 오시길 목을 빼고 기다리는가? 2절을 보면 시편 기록자는 대적들에게 큰 위협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을 빼고 기다리던 시편 기록자는 2절에 보면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라고 했다. 이는 죽게 된 위기에서 목을 빼고 하나님을 기다리다가 하나님께서 오시니 그 품에 완전히 안기어 있는 모습이다. 시편 기록자가 하나님 품에서 하는 말은 먼저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이다. 이는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발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또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라고 했다. 따라서 시편 기록자가 부끄러움을 당하는 상황은 대적에게 패하는 경우이다. 앞에서 한 말을 말 바꾸어 다시 말한 것이다.
3절은 시편 기록자의 확신이다. 그렇게 까치발 들고 목을 빼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는 자들의 반대는 까닭없이 속이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시편 기록자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신이 수치를 당할 위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4절은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라고 한 것이다.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도를 보여주시고 길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주의 도” 라는 말에서 도는 길이란 뜻인데 비유적으로 쓰일 때는 삶의 방식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방식을 보여달라는 말은 알려 달라는 뜻이다. 또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라는 말에서 길은 생명이나 사망에 이르는 길이라는 뜻이다. 생명에 이르기 위해 계속 따라가야 하는 길이다. 보이신다는 말은 알려주신다는 뜻이지만 가르쳐 달라는 말은 계속 반복해서 알려 달라는 뜻이다. 어떻게 알려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가? 앞에서 말한대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보호해 주셔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지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망하는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알려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5절에도 4절과 비슷한 말 두개가 짝을 이루어 나온다. 이는 4절에서 알려주시고 반복해서 가르쳐 주신 다음 단계인 것이다. 먼저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이다. 지도하신다는 말은 발을 내 딛게 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에 발을 내 딛게 하셨다. 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을 내 딛게 하셨다. 발을 내 딛을 곳은 주의 진리이다. 4절에서 알려 주시고 반복적으로 알려주셔서 완전히 익히게 하셨다. 이제 실제로 그 진리의 길에 발을 내 딛게 해 달라는 것이다.
또 “교훈하소서” 라는 말은 계속해서 발을 내딛어 그 진리 안에서 계속 반복해서 걷게 해 달라는 뜻이다. 따라서 먼저 주님의 길을 알아야 한다. 한번만 알아서는 안되고 계속 반복해서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실제 진리 안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한번 만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발을 내딛어서 완전히 익혀지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반복해서 익힌 후에는 주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행하는 것과 그 행함을 반복해서 익혀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주의 말씀을 반복해서 배우고 반복해서 행할 수 있나? 원어의 6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옵소서” 라고 했다. 자신의 힘으로 주의 말씀을 배우고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긍휼이란 말은 원래 자궁이란 말이다. 자신의 자궁으로 품고 있다가 낳은 아이라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말이 추상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뜻으로 쓰인다. 이와 짝을 이루는 말은 “주님의 인자하심” 즉 헤세드이다. 어머니의 마음과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인내하며 헤세드의 한결 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셔야 가능한 것이다.
왜 그렇게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해 달라 하는가? 그것은 “영원 전부터 있었사오니”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이 두가지 속성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었다. 그 두가지를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또 그 말씀을 행하고 또 행해도 실수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긍휼하심과 한결 같은 사랑으로 참아주시지 않으면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7절에서는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라고 부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항상 그렇게 용서해 주신 것에 근거해서 자신의 죄와 허물도 기억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죄란 사사기 20:16절에서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라는 말에서도 나온다. 물매를 던지면 한번도 실수하지 않고 정확히 목표물을 맞춘다는 뜻이다. 따라서 죄, 틀림이 있다는 말은 목표물을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이 비유적으로 쓰이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말한다. 하지만 허물이란 말은 왕에게 반역을 일으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을 일으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죄가 하나님에 대한 소극적인 반역이라면 허물은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반역이다. 젊은 날 시편 기록자가 그랬다는 것이다. 젊은 날 자신은 하나님을 벗어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기 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죄와 허물은 기억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대신에 자신에 대한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따라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주님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죄와 허물은 인간의 악한 속성이라면 한결 같은 사랑과 선하심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시편 기록자가 젊은 시절 하나님께 죄를 짓고 거역했지만 언약으로 자녀가 되었기에 그 언약을 근거해서 부모의 마음으로 인내하며 자신에게 말씀으로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 반역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면 사랑으로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자녀이기에 그러한 사랑을 계속 베풀어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8-14절은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을 노래한 것이다. 기도를 마친 시편 기록자는 예배에 참석한 회중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하고 있는 장면이다. 8-10절은 의로운 사람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인들이지만 돌이켜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다.
8절에서는 그 하나님이 선하실 뿐 아니라 정직하시다는 것이다. 정직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죄인들이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는 것이다. 7절에서 제 길을 벗어난 죄인을 바른 길로 가도록 바로잡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9절에 나온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온유한 사람이다. 9절에는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라고 했다. 지도하심이여 와 가르치시리로다 라는 말은 말은 5절에서 “지도하시고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말과 똑 같은 말이다.
지도한다는 말은 길을 벗어난 죄인을 다시 손을 이끌어 다시 바른 길 위로 발을 들여놓게 하시는 그림이다. 가르쳐 달라는 말은 계속 그 길을 걷도록 훈련시켜 달라는 말이다. 이는 길을 벗어나 질척이는 진창에 빠진 아이를 다시 이끌어 바른 길에 올려 놓는 그림이다. 또 벗어 나려고 하면 다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서 계속 그 길을 가도록 지켜보며 바르게 걷도록 하는 부모의 모습과도 같은 그림이다.
누구를 그렇게 바른 길로 다시 올려 놓으시는가? 바로 온유한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이란 성격이 온순한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이란 뜻이다. 하나님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하나님만 목을 빼고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불쌍히 여겨 바른 길에 올려 놓으신다는 것이다.
또 10절에서는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 라 했다. 언약이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말하고 증거란 성경 말씀에 나타난 높은 기준과 분명한 경고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언약을 지키고 그 언약 안에 들어있는 높은 수준까지 다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는 율법이 말하는 최고 수준까지 지켜야만 된다는 뜻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는 전 후를 보면 바로 풀린다. 8절에서는 길을 벗어난 시편 기록자를 계속 바른 길에 올려 놓으시고 바르게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 10절에서는 “여호와의 모든 길은 인자와 진리로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길의 모든 길은 곧 진리와 인자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해서 인자 즉 한결 같은 사랑으로 참아 주시는 것이다.
11절에서도 시편 기록자는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라고 했다. 11절은 이 시편의 중심 축이다. 시편 기록자가 완벽하게 율법을 지켜서 그런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악이 크지만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용서를 받고 진리의 길로 인도함 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12절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을 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그가 선택해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 했다.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의 긍휼하심과 한결 같은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사람에게 진리와 한결 같은 사랑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13절에서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라고 했다. 이는 오해하기 쉬운 번역이다. 원어는 그의 영혼이 선하심 가운데 터를 잡고 살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이 땅에서 땅을 차지하고 편안히 산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항상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지 땅에서 평안히 잘 산다는 뜻이 아니다. 또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라고 했다. 이는 실제 땅을 가나안 땅을 상속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비유이다.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안에서 사는 그 땅을 그 자녀들도 상속 받는다는 뜻이다. 부모가 때로는 실수하면서도 항상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힘입어 살면 그 자손들도 보고 배워 그 선하심 안에서 사는 법을 상속 받게 된다는 뜻이다.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라고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안에서 사는 사람들과 늘 다정하게 의논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말을 들어 주시고 또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정하게 조언을 해 주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라고 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게 하신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것을 알려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의 눈은 항상 여호와만 바라 본다 했다. 항상 여호와께 눈을 두고 한번도 눈을 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걸려 넘어지면 어쩌나? 하지만 시편 기록자는 그런 염려 하지 않고 세상을 보지 않고 언제나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 기록자의 발이 원수들의 그물에 걸린다 해도 주님께서 뽑아 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그들의 발이 그물에 걸렸을 때에도 뽑아 내 주셨다. 바벨론의 포로에서도 그 발을 뽑아 내 주셨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뽑아 내 주실 것이기에 주님만 바라 본다는 것이다.
16-22절은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16절은 원어에서 “내게 돌이키사” 라는 말로 먼저 시작한다. 이제 1절의 까치발 들고 목 빼고 기다리는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돌아와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한다. 왜냐하면 시편 기록자가 외롭고 괴롭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말은 홀로 있다는 뜻이고 괴롭다는 말은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도 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또 17절을 보면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라고 했다. 근심이란 말은 외롭고 불쌍한데다가 그 마음이 좁은 틈에 갇혀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근심 가운데 있다고 했기에 이 시편에 나타난 시편 기록자의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다. 그 마음이 깊은 고통의 골짜기에 끼어 있기에 그 마음의 고통에서 분리시켜 꺼내 달라는 뜻이다.
이 고통은 자신의 죄로 인한 고통이다. 18절에 보면 “내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라고 했기 때문이다. 시편 기록자의 괴로움과 근심을 살펴 보아 달라 하고 나서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보시고’ 라는 말은 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쓰이던 말이다.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상을 볼 때도 이 말을 썼다. 18-19절은 둘 다 이 말로 시작하는데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을 이해해 달라는 뜻이다.
그 고통은 18절에서 곤고와 환난이다. 곤고란 말은 고통을 주며 강제로 복종하게 한다는 뜻이다. 환난이란 말은 강제로 힘든 노동을 시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채찍으로 때리며 굴복시키고 강제로 고통스러운 노동을 시키는 그림이다. 이어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죄가 시편 기록자의 주인노릇을 하면서 째찍으로 때리고 괴롭히는 모습이다.
19절도 역시 보아달라는 라는 말로 시작한다. 18절에서는 자신의 괴로움과 근심을 살펴보아 달라 했지만 19절에서는 원수들을 살펴보아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들의 숫자가 많고 또 심히 미워한다 했기 때문이다. 심히 미워한다는 말은 최고로 미워하는 사악한 증오이다. 원어는 최고로 악한 미움으로 미워한다며 같은 말을 두번 반복해서 그 미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최고의 미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최고로 사랑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감정을 나타낸다.
이렇게 많은 원수들이 시편 기록자에게 불타는 적개심을 드러낸다면 그 다음에는 생명이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20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자신의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한 것이다. 지켜달라는 말은 감시해 달라는 뜻이다. 이어서 구원해달라는 말은 계속 감시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위험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으로 확 낚아채 달라는 뜻이다. 그래서 자신이 대적들의 손에 의해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원문을 보면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오고 “내가 주께 피하오니” 라는 말이 이어진다. 1절에서는 주님을 목 빼고 기다리다가 주님이 오시자 그 품을 의지했다고 했다. 이제 주님을 그 주님을 피난처로 삼아 주님 안에 피하겠다는 것이다.
이 대적들이 누구일까? 21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라고 했다. 성실이라는 말은 흠이 없이 완벽하다는 뜻이다. 바르다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길이 똑바르고 아무런 장애물도 없다는 뜻이다. 8절에서 하나님이 정직하시다는 말에서도 나왔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는 마치 왕을 맞이하기 위해 걸림 돌이나 쓰레기 하나도 없이 다 치워놓고 평탄하게 해 놓은 길 같은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오시게 하려면 그 길을 평탄하게 하고 걸림돌도 다 치워야 하는 것이다. 4절에서 주의 도와 주의 길이라는 말에서도 길의 그림언어가 나왓고 9-10절에서도 도와 길이 나왔고 12절에서도 길이 나왔다. 흠이 없고 똑바르다는 말은 이 시편에 나타난 이러한 길의 그림언어와 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
이는 죄가 하나도 없고 똑바른 상태가 아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작정하는 것을 말하는 그림언어이다. 시편 기록자는 자신이 완벽하게 회개하고 바른 태도로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적들은 시편 기록자 자신 안에 있는 죄와 탐욕이다.
마가복음 1:2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는 것도 역시 시편 25:21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침례요한을 보내신 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여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한글성경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있지만 21절 끝에 왜냐하면 이라는 말과 함께 “내가 주를 바라오니” 라는 말이 나온다. 왜 그렇게 성실과 정직으로 보호해 주시길 원하는가 하면 자신이 주님을 바란다는 것이다. 바란다는 말은 간절히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 말은 시편 56:6절에서 악한 자들이 의인을 죽이기 위해 기다릴 때 썼다. 이는 마치 낚시꾼이 낚싯대를 던져놓고 고기를 기다리는 기다림과도 같고 덫을 놓고 사냥감이 잡히길 기다리는 것과도 같은 기다림이다. 이 말이 하나님께 쓰이면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히 기다린다는 뜻이 된다. 내 아내가 어릴적 장날이면 학교에서부터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문의 장에 갔다 오실 때 생선 한 마리라도 사오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다가 없는 충북 내륙에 살던 아내는 아버지를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다 했다. 시편 기록자는 자신이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을 맞이하길 기다리고 있기에 자신의 마음의 길을 완벽하고 평탄하게 지켜 달라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3절에서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상속해 주실 것이라 했다면 22절에서는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부르짖는다. 여기서 구원해 달라는 말은 값을 지불하고 구해 달라는 것이다. 그 환난은 17절에서 시편 기록자가 갇혀있던 좁은 틈인 고난이다. 시편 기록자가 속한 신앙공동체 전체도 값을 지불하셔서 자신이 끼어있던 그 죄악의 틈에서 구해달라는 것이다.
시편 25편의 핵심구절은 11절의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반복해서 가르쳐 주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게 하시고 반복해서 행하게 하셔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고 다 지킨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구원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11절처럼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회개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향했다 하더라도 또 다시 죄악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고 탐욕이 들어와 주님을 우리 마음 안에 모실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또 해야 하는 기도는 회개한 마음을 계속 지속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또 죄인이지만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을 우리 자손들이 볼 때 우리 자손들도 하나님의 그 선하심 안에 살게 되는 것이다. 또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 전체가 우리로 인해 그렇게 구원을 받게 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 인해 내 자손들과 내가 속한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 영원히 터잡고 살게 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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