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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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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4편

시편 24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 길을 찾아 온 순례자가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작한다.

2017. 3. 26.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24편 강해 설교

시편 24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 길을 찾아 온 순례자가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작한다. 이어서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순례자와 제사장 사이에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이 이어진다. 마지막 부분은 예배할 자격을 얻은 자가 하나님은 승리의 왕이시라고 찬양하며 이 시편을 마친다.

먼저 1-2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1절은 짝을 이루는 댓구로 되어 있다. 먼저 땅과 그 안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안에 살고 있는 것들이 대조가 된다. 땅과 세계가 어떻게 다른가? 땅은 모든 육지를 가리킨다. 하지만 세계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모든 육지와 그 안에 가득한 생물들이 여호와의 것이고 또 사람 사는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다 여호와의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모두 믿는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뒤섞여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듯 구별하실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2절은 원어에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1절에서 나온 땅과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왜 여호와의 것인가 하면 이란 뜻이다. 그 이유는 먼저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이다. 1절에서 나온 땅을 바다 위에 세우셨다는 것이다. 세우셨다는 말은 바다 위에 떠 다니던 땅을 밧줄로 단단히 고정시키는 그림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땅들을 바다 위에 고정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 모든 동식물들이 가득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또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라고 했다. 이는 1절의 사람들이 사는 세계와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을 강 위에 세우셨다는 뜻이다. 오늘날은 어디에나 사람들이 살지만 고대에는 주로 강 가에서 살았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들이나 각 지방의 중심지들은 대부분 강을 끼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계를 강 위에 세우셨다고 한 것이다. 사실 세계라는 말 보다는 우리 말로 고을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특히 건조한 중동지방에서는 강이나 큰 호수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강이나 바다는 또 혼돈이나 악의 세력들을 상징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혼돈과 악의 세력들을 정복하시고 질서있게 만드셔서 모든 생물들과 사람들이 살게 하셨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홍해 바다를 가르신 것도 나일강을 다스리신 것도 역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3-6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순례자가 이렇게 찬양하며 예루살렘 성문에 도착한 상태에서 제사장과 묻고 대답하는 모습을 노래했다. 3절은 먼저 순례자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인가?” 라고 질문한다. 여호와의 산은 시온 산이고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거룩한 산에 있는 예루살렘에 오를 자격이 있는 자가 누구인지 물은 것이다. 또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라고 이어서 질문한다. 그의 거룩한 곳은 시온 산 위에 있는 성막이나 성전을 가리킨다. 그 곳에 들어가 서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군인가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제사장이 대답한 것이 4-6절에 나온다. 4절은 거룩한 곳에 설 수 있는 자격이다. 4절은 ABBA 형식으로 되어 있다. 먼저 제사장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라고 답했다. 여기서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이 대조된다. 깨끗한 손이라는 말에서 깨끗하다는 말은 손에 가진 것을 다 털어 버렸다는 뜻이다. 손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행하는 죄를 상징한다. 손으로 다른 사람에게 행한 모든 죄를 다 회개하고 쏟아 버려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이 거룩한 곳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청결한 마음이란 본래 반짝 반짝 빛이 나도록 연마한 금속을 뜻하는 말이다. 칼이나 화살촉에 끼어있는 녹을 다 제거해서 햇빛에 빛이 나는 그림언어이다. 마음을 뒤덮고 있는 녹 같은 탐욕과 우상숭배를 다 갈아 없애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찬란한 빛을 내는 마음이 바로 청결한 마음이다. 따라서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다.

그 다음에 대조되는 구절은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와 “거짓 맹세를 하지 아니하는 자” 이다.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는 앞에서 나온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 이는 우상에게 마음이 팔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오직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두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향한 청결한 마음은 계속 닦아내지 않으면 탐욕과 우상숭배라는 녹으로 가려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녹슨 것들을 다 제거하고 하나님을 향한 청결한 마음을 하나님께 보이는 사람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그 마음을 찬란하게 빛이 나게 하는 것이다.

또 구약에서 우상숭배는 흔히 간음에 비유된다.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팔려 있으면서 남편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남편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녹으로 완전히 덮여 있어 그 청결한 마음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세상의 남편이나 아내들은 한번 녹슨 마음은 아무리 닦아내도 받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한결 같은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은 그러한 녹을 다 제거하고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받아 주시는 것이다.

또 거짓 맹세를 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시 사람에게 행하는 죄이므로 4절 맨 앞에 나온 깨끗한 손과 연결이 된다. 앞에서는 깨끗한 손은 행위로 이웃을 속이지 않는 손인데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자는 말로 이웃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안쪽에는 청결한 마음과 거짓 신들을 경배하지 않는 것이 있고 행위와 말로 이웃을 속이지 않는 것이 그 바깥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으로나 예배하는 행위로 하나님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또 행위로나 말로 이웃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 바로 거룩한 성소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5절은 그런 사람이 받게 되는 혜택을 말하고 있다. 첫째 4절과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여호와로부터 오는 복을 받는다. 여기서 복이란 물질의 복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이다. 이러한 ‘복’과 짝을 이루는 말은 ‘의’ 라는 말이다.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라고 했다. 구원의 하나님이란 재판관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의라는 말도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4절에서 말한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여호와께서 말씀을 들려 주시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재판하셔서 죄없다고 선포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복과 의는 사람의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6절에서 말하고 있다. 먼저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라고 했다. 원어는 족속이 아니고 “세대” 라는 뜻이다. 세대란 한 시대에 살아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앞으로 계속 다가올 모든 세대들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찾는다는 말은 찾아가서 듣는다는 말이다. 열왕기하 1:2절에서 아합이 바알제붑에게 물어보라고 한 말에서도 같은 말이 나온다. 고민이 있는 사람이 상담가를 찾듯 하나님을 찾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시편 기록자의 세대가 바로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또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라고 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고 그 앞에 나아가 경배를 드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려 경배하여야 하는 것이다.

7-10절은 갑자기 떠들석한 개선 행진의 모습으로 바뀐다. 그래서 이 부분은 앞부분과는 다른 시편인데 후에 하나로 합쳐졌다고 보는 이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시편은 늘 하나의 시편으로 불리워졌다는 증거가 분명하기에 하나로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군대는 이처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로 이루어지는 군대이다. 이제 이 시편에 등장하는 순례자는 이러한 하나님을 경배할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되 단순히 하나님을 경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승리하신 하나님의 개선 행렬에 함께 참여하여 함께 환호하며 기뻐 찬양하고 경배하게 된 것이다.

7절은 하나님의 궤를 앞세우고 전쟁터에 나갔던 왕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행렬의 모습이다. 좀 더 정확한 배경을 찾는다면 사무엘하 6:12-19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궤가 돌아오는 모습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예루살렘을 떠났던 궤가 오랜만에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시편에 등장하는 순례자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함께 외치고 있다. 그 내용은 복음성가로도 불리우는 내용이다. 먼저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라고 명령한다. 또 명령형의 형태는 다르지만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라고 다시 반복한다. 왜 그렇게 문을 열라고 반복하는가?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8절에서 문지기가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라고 묻자 하나님의 군대가 된 순례자가 대답한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오” 라고 대답한다. 강하다는 말은 적과 힘을 겨루면서 상대를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능한 이란 말은 승리한 뒤에 위엄있는 태도로 높은 자리에 서 있는 용사의 모습이다. 또 이어서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라고 했다. 앞에서 능하다는 말과 같은 말을 다시 반복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위엄있게 높은 자리에 서 계신 곳은 전쟁터라는 것이다. 따라서 싸움에서 늘 상대를 압도하고 승리하셔서 높은 자리에 우뚝 서시는 용사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군대들은 단지 따라 다니며 환호를 하고 전리품을 얻을 뿐이다. 문지기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자 9절은 모든 여호와의 군대들이 다시 문을 열라고 합창을 하는 모습이다. 동사의 명령형은 바뀌었지만 그 의미는 변함이 없다.

10절에서 문지기는 또다시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라고 묻는다. 이에 대한 대답은 “만군의 여호와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라고 대답한다. 만군의 여호와란 군대의 주님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군대는 1-2절에 나온 바다와 강의 모든 혼돈의 세력들을 물리치시고 승리하는 군대이다. 하지만 그 거룩한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힘에 있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영광의 왕이란 언제나 항상 승리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왕이시라는 뜻이다.

이 시편의 기록자는 자신이 믿고 경험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고 또 모든 인간들이 사는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의 전쟁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전쟁은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셔서 홀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 위한 전쟁이다.

그분 앞에 나아가 그분을 경배할 수 있는 자는 더 이상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왕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분을 믿고 헛된 것에 마음을 분산시키지 않는 청결한 마음을 하나님께 보여야 한다. 또 올바른 행실과 정직한 말로 이웃을 대해야 한다. 이 시편에 나타난 두가지 자격은 결국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그 자격을 완전히 얻었으니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군대이다. 항상 승리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따라가는 그리스도의 군대이다. 우리도 승리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들어가시도록 큰소리로 외치며 찬양하는 삶을 살자.

사진출처: wikimedia, Golden Gate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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