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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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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시편 23편은 시편 1편과 함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편 일 것이다.

2017. 3. 20.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23편 강해 설교

시편 23편은 시편 1편과 함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편 일 것이다. 이 두편의 시편들이 담고 있는 그림언어가 아주 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은 목자로 비유된다. 언뜻 보면 1-4절은 목자이신 하나님의 그림이고 5-6절은 잔치를 베푼 주인의 그림인 것 같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목자에서 잔치의 주인의 그림으로 바뀐다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목자이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은 나를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며 최고의 손님으로 높여주시니 영원히 하나님만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겠다는 것이다.

먼저 인도하시고 먹이셔서 새 힘을 얻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라는 말은 풀밭에서 풀을 뜯게 한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 풀밭으로 인도하여 풀을 뜯게 해 주시는 분이 여호와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부족함이 없는가?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떠돌 때 주신 만나를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출애굽기 16:1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거둘 때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고 했다. 욕심껏 더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부족함이 없게하신 것이다. 그 여호와가 바로 다윗 자신의 목자시니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백이다.

왜 부족함이 없는지 이유는 2절에서 밝힌다. 그 이유는 먼저 푸른 풀밭에 누이신다는 것이다. 눕게 하신다는 말은 잠자는 모습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잠자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이 동물들에게 쓰일 때에는 다리 쭉 뻗고 땅바닥에 엎드려 편안히 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풀을 실컷 뜯어먹고 나서 풀밭에 다리 뻗고 누워 편안히 쉬는 그림이다. 아무리 실컷 먹게 해도 그 다음에 쉬지도 못하게 하고 계속 걸어가게 하든지 일만 시킨다면 정말 힘든 삶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컷 먹게 하실 뿐 아니라 여유있게 쉬게 하신다는 것이다. 푸른 풀밭에 눕게 하셔서 느긋하게 먹고 편안히 쉬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또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했다. 쉴만한 곳이란 말은 특별한 장소에 정착한다는 뜻이다. 이 말이 추상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전쟁을 승리로 마치고 돌아와 쉬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안식일을 뜻하는 말과 같은 말로 쓰인다. 하지만 안식이라는 말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 쉴만한 곳이라는 말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장소에서 편안히 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쉴만한 곳이라는 말에 물가 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뜨거운 사막 길을 걷는 여행자가 시원한 바위 그늘에서도 쉴 수 있지만 그 쉬는 장소에 맑은 물까지 흐르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이다. 목자가 양을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데려와 거기서 편안히 쉬게 하는 그림이다. 이번에는 풀밭에서보다 좀 더 오랫동안 편안히 쉬게 하시는 그림이다.

물론 이것은 비유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마음 깊이 와 닿는 비유는 아니다. 우리는 건조한 사막에서 양을 키우며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정말 가슴 깊이 와 닿는 비유이다. 목자의 가장 중요한 일은 1-2절에서 보면 먹고 마시게 해주고 쉬게 해 주는 일이다. 양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먹고 마시고 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쉬기만 할 수는 없다. 편안히 쉬면서 먹고 마셔서 새 힘을 얻었다면 다시 목자를 따라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3절에 보면 목자를 따라 길을 가는 그림이 나온다. 3절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했다. 이제 또 다른 풀밭과 물을 찾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양 떼를 이끌고 계속 새로운 목초지와 물을 찾아 다녀야 했다. 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내 영혼을 되돌린다” 라는 뜻이다.

사실 이 시편은 푸른 초장부터 시작하기에 우리는 편안한 그림만을 연상한다. 하지만 다윗 당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사람 아무도 없다. 건조한 이스라엘에서 푸른 초장은 바로 집 옆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떼들은 뜨거운 사막길을 몇시간동안 걸었을 것이다. 어쩌면 하루종일 걸었을지도 모른다. 케네스 베일리는 이와 같이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을 뻔 했던 경험을 “사포 두장을 함게 맞대고 문지르는 것 같은 느낌”(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124) 이라고 했다. 그런 목마름을 견디다가 마침내 푸른 초장에 도착했을 것이다. 어디서나 푸른 풀을 볼 수 있는 우리는 시편 23편 앞에 이러한 그림을 넣어서 읽어야 한다. 그래야 내 영혼을 되돌린다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내 영혼을 되돌린다는 말은 이처럼 목이 말라 죽을 위기에 있던 시편 기록자를 다시 이전에 힘이 넘칠 때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함께 되돌려 놓는다는 말은 비유이기에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구약 성서에서 되돌린다는 말이 비유적으로 쓰일 때는 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돌아와 새힘을 얻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쓰였다. 이 시편을 쓴 다윗도 정말 힘든 사막 길 같은 길을 지나왔을 것이다. 이제 여호와의 인도하심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것이 소생시킨다는 말의 뜻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물도 마시고 쉬고나니 이젠 출발하기 전처럼 회복이 되었다. 하지만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 풀은 다 먹어 치웠고 이제 다시 새로운 풀밭을 찾아 목자를 따라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한 것이다. 이제는 또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시각이라는 것이다. 왜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이동해야 하는가? 이스라엘의 풀밭은 남진이 부른 그림 같은 집이 있는 골프장 같은 초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막인데 그 중에 간간이 푸른 풀들이 바위 틈 사이에 조금씩 있다. 하루종일 걸으며 부지런히 풀을 뜯고 물을 마셔야 겨우 살아 남을 수 있을 뿐이다.

의의 길이란 바른 길이고 양떼를 살리는 길이다. 만약 목자가 잘못된 정보에 따라 양떼를 잘못 인도했다면 양떼는 모두 다 죽게 된다. 하루종일 걸어 갔는데 그곳에 풀도 없고 물도 없다면 배고프고 목마른 양떼들은 다시 소생하지 못하고 모두 굶어죽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풀밭과 물이 있는지 아신다. 만약 우리가 여호와 우리 주님을 따라가다가 멸망한다면 우리 주님의 이름이 욕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따라 가는 그 길은 다른 목자들이 알지 못하는 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어리석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알지 못하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이르게 해 주시기에 모두가 감탄을 하며 우리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바른 길은 항상 넓고 평탄한 고속도로는 아니다. 그래서 4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이러한 길이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이라고 한 것이다. 전에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바위 절벽 사이에 있는 아주 깊은 협곡이다. 얼머나 깊은지 죽음의 그늘의 골짜기라고 말한다. 대낮에도 아예 햇빛이 들지 않을만큼 깊은 골짜기이다. 이런 곳은 다른 동물들에게 잡혀 먹히기 쉬운 곳이고 사람이라면 강도를 만날 수도 있는 곳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우리네 인생 길도 때로는 그렇게 깊은 어두움의 골짜기 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목자는 뜨거운 불볕 더위로 부터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로 인도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길이 지름길이기에 그리로 인도했는지 모른다. 그러니 아무리 위험하게 보이는 길이라도 목자만 믿고 따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항상 옳은 길로 인도해 준 목자가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두려움이 없다고 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인가? 그것은 주께서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막대기는 양들을 해치려는 짐승들을 때리는 막대기이지만 양들에게는 숫자를 셀 때 쓰고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데 쓰이는 보호용 막대기이다. 또 지팡이는 끝이 구부러져서 다른 길로 가는 양을 그 고리로 목을 걸어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이처럼 막대기와 지팡이는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이 지팡이는 몸을 지탱해 주는 지팡이이기도 하다. 에스겔 29:6절에는 이집트를 “갈대 지팡이” 라고 했다. 7절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손으로 너를 붙잡으면 너는 갈라지면서 오히려 그들의 어깨를 찢었다. 너를 의지하면 너는 부러지면서 그들이 몸도 못 가누고 비틀거리게 하였다” 라고 했다. 갈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겨우 서니 갈대가 갈라져서 죽창처럼 어깨를 찔러 찢었다는 것이다. 또 갈대 지팡이에 의지하면 부러져서 넘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이집트는 아주 강한 나라이지만 이스라엘이 의지할 지팡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의지하는 여호와의 지팡이는 정말 믿고 몸을 맡길만한 지팡이라는 것이다.

이제 다윗은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했다.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를 의지하고 가서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아니다. 이번에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인 다윗을 위해 잔치를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끝까지 잘 따라왔기 때문이다.

5절에는 먼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잔치상을 차려주셨다고 했다. 이는 주님께서 원수들을 완전히 결박해서 무릎을 꿇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다윗은 그 잔치에 최고의 손님으로 참석한 것이 분명하다. 기름을 부어 주셨다고 햇기 때문이다. 다윗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도착하면 그 손님에게 기름을 부어 주었다. 그 기름이 얼굴을 타고 내려와 수염 끝으로 뚝뚝 떨어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승리하게 하시고 다윗을 최고의 귀빈으로 맞아 주시는 모습이다. 또 포도주가 잔에 가득 차서 흘러 넘친다 했다. 나쁜 의미로 쓰일 때 잔은 진노의 잔이다.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진노의 잔이다. 하지만 좋은 의미로 쓰일 때는 축복을 상징한다. 잔에 포도주가 넘치듯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흘러 넘친다는 것이다.

이제 승리의 잔치는 끝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끝나지 않았다. 6절에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라고 했다. 다윗은 잔치 자리에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 날 지켜주신 하나님은 앞으로 죽는 날까지 계속 동일하게 지켜 주실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다. 선하심이란 좋다는 말이고 인자함이란 헤세드 즉 한결 같은 사랑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고 인자하셔서 한없이 날 참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졸졸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다윗이 한 마리 양처럼 여호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래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 새 힘을 얻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두려워하지 않고 통과했다. 그런 다윗에게 잔치상을 베풀어 주셨다. 이젠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따뜻한 햇살 아래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보호해 주는 엄마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졸졸 따라 다니시면서 지켜주신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잘못된 길로 간다면 거기로 가면 안된다고 하나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막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졸졸 따라 다니시며 인도하시는대로 가면 하나님의 집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성전에 들어가 거기서 예배를 드리겠다는 뜻만은 아니다. 항상 낮에 항상 주님과 함께 다니며 동행할 뿐 아니라 밤에 잠자는 순간에도 주님과 함께 있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온종일 주님과 함께 지내며 영원히 살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의 가족도 항상 함께 있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가족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다. 다윗은 길을 걸을 때에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제 잠자는 그 순간에도 일어나는 그 순간에도 여호와와 함께 있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영원히 지속하겠다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 고양이 하비를 보면서 함께 거한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한다. 우리 고양이 하비는 항상 나와 함께 있길 원한다. 새벽에 일어나 말씀 묵상을 할 때면 내 무릎에 앉는다. 기도하는 자리로 몸을 옮기면 내 앞서서 먼저 달려간다. 내가 기도하기 위해 앉으면 내 무릎에 앉는다. 내가 화장실에 가도 역시 따라온다. 피곤해서 거실 소파에 누우면 내 배위에 올라와 그르릉 거린다. 식사할 땐 저도 식탁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고개만 식탁위로 내민다. 침대에 누워도 역시 따라온다.

어떻게 우리 하비처럼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고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사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 말씀의 참 뜻을 가르쳐 주셨다. 그 분의 말씀을 우리 머리와 가슴에 담아두고 항상 그 말씀이 인도하는대로 따라가야 한다. 어디를 가든지 그 말씀이 인도하는대로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따라가는 길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타는 듯한 사막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따라가야 한다.

사진출처: flicker.com, The Good Shepherd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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