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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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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편

이 시편에서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있어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2017. 3. 2.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22편 강해 설교

이 시편에서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있어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에게도 멸시를 받던 상황에서 죽은 시체와 같이 되었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응답을 받았기에 모든 민족 모든 계층 모든 세대들에게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며 함께 찬양하자고 촉구했다. 이 시편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도 대부분 일치한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이 시편의 여러 부분들을 암송하셨다.

1-5절은 시편 기록자가 고난 가운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1절은 원어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말로 시작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 버린다는 말은 멀리 혼자 둔다는 뜻이다. 창세기 39:6절에서 요셉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겼다는 뜻으로 쓰였다. 시편 기록자는 어째서 모든 것을 자신 혼자서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지 외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를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둘 때는 부모가 가까이서 지켜 보는 법이다. 하지만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지켜 보지도 않고 계신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찌감치서 지켜 보시지도 않고 계신다고 느꼈다. 그래서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라고 한 것이다. 신음 소리는 사자의 울부짖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이 사람에게 쓰일 때는 슬픔 가운데서 울부짖는 소리이다. 얼마나 멀리 계시는가 하면 시편 기록자가 큰 소리로 울부짖는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멀리 계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불렀는가? 2절에 보면 “내 하나님” 이라고 부르며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라고 했다. 이는 낮에 한번 부르고 밤에도 한 번 불렀다는 뜻이 아니다. 낮에 하루종일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고 또 밤이 새도록 불러도 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고백이 3절에 이어진다. 이렇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래도 주님은 거룩한 분이시고 이스라엘의 찬송 위에 앉아 계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정말 놀랍다.

왜 그렇게 이스라엘의 찬송 위에 앉아 계신 분이라 하는가? 4절에 보면 “우리 조상이 주를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라고 했다. 의뢰한다는 말은 안전한 피난처로 여기고 주님께 몸을 맡기고 의지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니주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5절은 조상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했는지 말하고 있다. 5절 앞부분은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라고 했다. 조상들은 주님께 부르짖었으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고난 중에 구해달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는 뜻이다. 고난 중에 주님을 찾고 부르짖었더니 구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상들은 주님을 의지했고 조상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주님을 의지했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원수들에게 포로가 되었다면 수치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편 기록자가 자신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를 했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았던 것 같다. 6절에서는 자신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이란 말은 개인으로서 한 남자 라는 뜻이다. 이어 나오는 사람들의 비방거리라는 말에서 사람들이란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비방거리이고 또 “백성들의 조롱거리” 라 했다. 이는 백성들 즉 공동체 전체가 시편 기록자를 하찮은 존재로 경멸한다는 뜻이다.

7절은 이처럼 시편 기록자를 보는 모든 사람이 다 시편 기록자를 조롱한다 했는데 이는 말로 조롱한다는 말이다. 또 “입술을 비쭉거리며” 라는 말은 원어에서 입술을 분리시킨다는 뜻이다. 조롱하고 경멸할 때 입술을 위 아래를 분리시키는 모습이다. “머리를 흔들며” 라는 말은 열왕기하 19:21절에서 앗수르 왕에 대해 예언하는 말씀에서 나온다.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라고 했다. 말로 조롱하고 입술을 비쭉 거릴 뿐 아니라 몸짓으로도 조롱한다는 것이다.

그 조롱하는 말이 8절에 나온다.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이라는 말에서 ‘의탁한다’ 는 말은 본래 굴러간다는 뜻이다. 여호와께로 굴러간다는 뜻이기에 의지한다고 번역한 것이다. 명령형이기에 연결하여 직역하면 “여호와께 굴러가라!” 라는 뜻이다. 또 “그가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는 “여호와가 그를 구하게 내버려 두어라!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를 기뻐하신다!” 라는 뜻이다.

이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9-10절은 아기 때부터 여호와만 의지했다고 고백한다. 9절은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이라고 고백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분도 여호와시고 엄마 젖을 빨던 아기 때부터 여호와만 의지하게 하신 분도 여호와시라는 것이다. 10절은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이라 했다. 이와 대조되는 구절은 어머니 뱃속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모태 안으로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 이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태에 있을 때부터 태어날 때와 젖을 먹을 때까지 언제나 나의 하나님이시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다는 고백이다.

11절은 그러니 멀리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난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재난이란 좁은 곳에 갇혀 끼여있는 모습이다. 이제 곧 시편 기록자 자신은 꼼짝도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도와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12-18절은 좁은 곳에 갇히는 재난이 무엇인지 그림처럼 설명한 부분이다. 12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첫째로 대적들을 황소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많은 황소 떼가 자신을 완전히 에워싸며 움직이는 동영상이다. 황소들은 가장 크고 힘이 센 동물들이다. 특별히 바산은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시리아로부터 빼앗은 골란고원이다. 이스라엘의 다른 땅들과는 달리 항상 푸른 풀들이 마르지 않는 최고로 비옥한 땅이다. 바산의 황소들이란 그 땅에서 자란 황소들은 가장 튼튼하고 살찐 소들이다. 이러한 바산의 황소들의 포위하는 동작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두려움을 넘어서서 절망감이 엄습하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시편 기록자는 대적들을 사자에 비유하고 있다. 앞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포위한 대적들이 힘이 세기에 황소같다고 한 것이다. 이제 둘러싼 대적들은 시편 기록자를 공격할 차례이다. 사납게 달려들며 공격해오는 대적들의 모습이 사자와 같이 사납다는 것이다. “내게 그 입의 벌림이 찢으며” 라는 말은 그 날카롭고 강한 이빨로 시편 기록자를 사정없이 갈기갈기 찢어놓는 그림이다. 또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라는 말은 이러한 동영상에 생생한 서라운드 음성이 더해진 모습이다. 사자 같은 대적들은 무섭게 으르렁 거리며 사정없이 찢어발기고 있다.

14절에 보면 이렇게 공격을 당한 그 다음의 모습을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라고 했다. 사자 같은 고양과 맹수들은 사냥감의 급소를 단숨에 물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 물같이 쏟아졌다는 말은 사냥감을 갈기갈기 찢어놓자 낭자한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쳐 바닥에 흥건하게 흐르고 있는 모습이다. 또 “뼈는 모두 어그러졌으며” 라는 말은 피가 다 쏟아진 후에도 사자가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붙잡고 그 이빨로 물어 뜯어 그 살이 뼈와 함께 마디마디 마다 분리되는 그림이다. 특히 심장을 노리고 갈비뼈를 떼어내는 모습이다.

그러면 갈비뼈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심장이 드러나게 된다.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라는 말에서 마음이란 심장이란 뜻이다. 단단하고 힘차게 펌프질하던 심장 마저도 피가 다 빠지고 늘어진 모습이다. 그 늘어진 심장의 모습이 초가 녹듯 녹아버렸다는 것이다. 사자 같은 대적들이 갈비뼈를 다 뜯어내고 심장도 물어 뜯어 그 심장 마저 흐물흐물해졌다는 것이다. “내 속에서 녹았으며” 라는 말은 나의 가슴 안에서 녹아 버렸다는 뜻이다. 갈비뼈가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등뼈와 부러진 갈비뼈 사이에 심장은 머물러 있다. 그 심장이 힘없이 늘어진 상태를 내 가슴 안에서 초처럼 녹아 내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표현은 실제 일어난 사실이 아니고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제 사자는 실컷 먹고 물러갔다. 그 상태가 16절이다.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같고” 라는 말은 시편 기록자의 힘이 불에 구운 질그릇처럼 바싹 말랐다는 뜻이다. 힘이란 피에서 나오는 것인데 사자가 뜯어 먹고 버리고 간 뒤 시간이 흘러 힘의 근원인 피가 질그릇처럼 말라버렸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되는 구절은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이다. 피가 말라버렸기에 혀도 입천장에 말라 붙어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황소와 사자로 표현된 대적들 때문이다. 그런데 시편 기록자는 갑자기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라고 말한다. 죽음의진토 속에 두셨다는 것은 땅을 파고 묻었다는 뜻이 아니다. 버려진 시체가 말라 붙는 동안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피와 뒤범벅이 된 모습이다. 사실 이렇게 된 것은 대적들 때문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나 시편 기록자는 그렇게 하신 것은 대적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셨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멀리 계시더라도 부르짖을 때 들릴만한 거리에 계셨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고난의 끝은 아니다. 이제 사막의 청소부인 들개들이 16절에 등장한다. 사자가 뜯고 나서 말라 붙은 시체 같은 시편 기록자를 개들이 뜯으려고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12절에서는 황소 떼가 둘러쌌다 했는데 이번에는 개들이 완전히 에워싸고 빙빙 돈다. 이 개들이 누구인지 이어서 설명한다. 이들은 “악한 무리” 라고 표현한다. “나를 둘러” 말은 그물을 던져 에워싸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빙빙 돌던 개들은 시편 기록자를 완전히 에워싸고 잡았다. 그 다음 동작은 시편 기록자의 수족을 찔렀다 했는데 개가 손과 발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물어 구멍을 뚫었다는 것이다.

17절은 이제 뼈 마디 하나하나가 다 셀 수 있을만큼 앙상하게 드러났다. 손과 발까지 다 물어뜯어 구멍을 뚫었으니 손과 발의 뼈 조차도 다 드러나게 된 것이다. 왜 개들은 손과 발을 물어 뜯는가? 사자가 중요한 부위는 다 먹어치우고 갔기에 남아있는 부분은 그런 부분 밖에 남지 않았다. 원수들은 이러한 시편 기록자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지만 아직도 남은 것이 있다. 이처럼 완전히 뜯겨진 시체에게 남은 것은 벗겨놓은 옷이다. 18절은 이 겉옷마저도 원수들이 나눈다 했다. 겉옷은 이불처럼 쓰이던 것이기에 꿰맨 자리를 뜯어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기에 나눌 수 없어 제비를 뽑아 당첨된 사람이 갖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도 시편 기록자는 기도한다. 첫째 기도는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이다. 이 말은 1절과 11절에서도 나왔다. 문제는 자신의 살이 다 뜯기고 뼈가 다 분해된 것 같은 고난이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이다. 그래서 멀리하지 마옵소서 라고 한 것이다.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 다음 기도는 “나의 힘이시여, 속이 나를 도우소서” 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면 그 다음에는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도 이와 같아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회복이다.

이제 앞에서 나온 동물들이 반대 순서로 나온다. 완전히 파괴된 시편 기록자가 회복되는 모습은 파괴된 순서와는 반대로 진행된다. 이는 마치 앞에서 나온 동영상을 거꾸로 빠르게 돌리는 모습이다. 먼저 개들은 시편 기록자의 뼈에 남아있는 살을 먹으려고 물어 뜯고 머리를 흔들며 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개들이 물러가게 하셔서 이제 개들이 뜯기 이전 상태로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다. 21절 앞부분에서는 사자의 입에서 구해달라 했다. 이는 사자가 물어 뜯고 갈비뼈를 산산조각 내기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들소의 뿔에서 구해달라 했다. 앞에서는 바산의 황소들이 포위한 모습까지만 나왔었는데 아마 황소들에게 뿔로 들이받는 모습이 생략된 것 같다. 황소에게 받혀 중상을 입은 것을 사자가 달려들어 물어 뜯어 숨통을 끊어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들소의 뿔에서 건져 주시면 공격을 받기 이전의 상태가 된다. 이렇게 완전한 회복을 위해 단계적으로 기도하고 나서 21절 뒷부분에서는 기도를 들어주셨다 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도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료해 달라고 할 때도 이렇게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처를 입은 순서와는 반대로 가장 위급한 것부터 회복시켜 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는 막연하게 뭉뚱그려서 하면 안된다. 영적 회복을 위해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서 그것부터 구해야 하고 나머지도 위급한 순서대로 구해야 한다.

22-26절은 응답을 받은 시편 기록자가 드리는 감사의 기도이다. 22절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라는 말에서 선포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들을 순서대로 손가락을 꼽겠다는 뜻이다. 앞에서 기도를 단계적으로 했기에 그 단계마다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 하나 세며 선포하겠다는 것이다. 먼저 가까운 형제들에게 주께서 응답해 주신 순서대로 손가락을 꼽으며 간증하겠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는 “예배 드리는 회중 한 가운데서 찬양하렵니다” 라고 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예배하는 자리에서 찬양으로 간증하겠다는 것이다.

그 찬양의 내용은 23-26절에 나온다. 23절은 먼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라고 촉구한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란 유대교에 입교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23절 뒷부분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 대신 야곱의 모든 자손들에게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고 촉구한다. 야곱의 자손들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자들이 다 모여 모두 함께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것이다.

24절은 왜냐하면 이란 말로 시작한다. 왜 모두가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하는 지를 설명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라고 했다. 여호와께서는 고통 받는 자들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싫은 내색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싫어한다는 말은 얼굴에 싫은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에서 얼굴을 숨긴다는 말은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상을 쓰며 싫은 표정을 드러내지도 않으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 “흥, 꼴도 보기싫다!” 라며 고개를 돌리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 대신 하나님은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라고 했다. 인상쓰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으시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다면 하나님은 따뜻하고 자상한 표정으로 팔을 벌리시고 안아 주시며 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그 다음 순서는 찬양이다. 대단한 숫자의 회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찬송하겠다는 것이다. 찬송을 드린 다음에 할 일은 “주를 경외하는 자들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이다. 이는 서원한 희생제물을 바치겠다는 것이다.

26절은 서원한 제물을 바친 뒤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 장면이다. 단순히 음식만 나누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나서 그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다. 제물을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다. 제물을 나누어 먹는 것도 예배의 일부분이다. 이 예배는 시편 기록자가 회복된 것을 감사하는 예배인데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참여해서 먹고 마시며 찬양하는 자리이다.

27-31절은 이 시편의 마지막 결론을 맺는 찬양이다. 결론의 찬양은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또 4차원으로 진행된다. 먼저 2차원의 면이다. 27절은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들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라고 했다. 이는 세상 모든 민족이 다 주님께 나와 주님을 경배할 것이라는 것이다. 28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라고 했다. 주권이 주님께 있고 주님께서 온 세상 모든 나라들을 모두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렇게 온 세상 만민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 드리길 원하는 이유가 29절에 나온다.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라고 했다. 모든 풍성한 자는 원어에서 “모든 살찐 자들” 이다. 고대에 살찐 자들은 신분이 높은 자들이다. 이는 26절의 가난한 자들의 반대말이다. 가난한 자들만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다. 살찐 권세자들도 회개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겸손히 예배하고 함께 먹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라고 했다. 이는 먹을 것이 없이 굶어 죽어가는 자들을 말한다. 이는 2차원의 면이 수직으로 배열된 모든 사회 계층을 말하기에 3차원이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할 자들은 두 종류이다. 하나는 배부른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죽어가는 자들이다. 배부른 자들은 가장 높은 자들이고 부족한 것이 없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교만이 하늘에 닿아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또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자는 하나님을 예배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하지만 이처럼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할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라는 것이다. 살찌고 교만한 자는 겸손해지고 죽어가는 가장 낮은 자는 다시 살아나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다.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모든 평면이 위 아래로 배열된 입체로 이러한 입체가 시간으로 움직이는 4차원까지 나온다. 30절에서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라는 말에서 후손이란 원어에서 씨앗이란 뜻이다. 현재 뱃속에 있는 태아들이 주님을 섬길 것이라는 뜻이다. 또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라는 말은 다가올 세대들이란 뜻이다. 아직 태중에 있지도 않은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세대들까지도 “주를 전할 것이며” 라고 했다. 주를 전할 것이라는 말은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손가락으로 꼽는다는 뜻이다. 이는 섬긴다는 말보다 더 구체적이고 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고 하나씩 손가락으로 꼽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31절은 30절의 다가올 세대들과 연결되는 말이다. 다가올 세대들은 와서 자신들이 손가락으로 꼽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백성들에게 선포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이다. 어떻게 다가올 세대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백성들에게 선포하는가?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대로 전달하여 선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으로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달되고 있고 계속해서 선포되고 있다.

시편 기록자는 모두가 다 조롱할 만큼 고난 가운데 있었으면서도 모태에서부터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했다고 고백한다. 이는 실제 모태에서부터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드려서 여호와만 의지했다는 표현이다. 하나님만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자신의 상황이 황소에게 받혀 중상을 입고 사자에게 갈기갈기 찢기고 개에게 뼈에 붙은 고기까지 다 뜯길 만큼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고난의 역순으로 순서대로 점차 회복시키실 것을 믿었다.

모든 것이 다 회복되었기에 감사 기도를 드리고 형제들과 예배하는 모든 회중들 앞에서 손가락을 꼽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셨기에 앞으로 틀림없이 그렇게 될 줄 믿고 손가락을 꼽으며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모든 민족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세대들까지 다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게 되고 함께 주님을 섬기며 전할 것이라 했다.

이 시편에는 예수께서 인용하신 부분들이 나온다. 예수님의 고난과도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무조건 예수님께 비추어 읽으면 안된다. 먼저 시편 기록자가 본래 기록한 그 고난의 상황과 문맥에 나타난 그림언어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고난 중에서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고 대적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시편 기록자의 본래 마음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죽어가는 상황에서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아무런 응답도 없을 때에도 이 시편 기록자의 마음을 함께 느끼며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완전히 다 뜯기고 뼈만 남은 시체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 시편 기록자의 마음을 공감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이 시편에 비추어 읽을 수 있다. 예수님도 그렇게 고난을 당하시고 모든 백성들의 조롱을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뼈까지 다 뜯기고 옷까지 빼앗긴 시편 기록자와 같은 상태가 되셨다. 예수님의 고난을 이처럼 잘 나타낸 시편도 없다.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를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리셨다. 그 주님이 온 세계 만방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 뿐 아니라 우리의 자손들과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세대들까지 빈부 귀천 민족에 상관없이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도록 해야 한다.

사진출처: wikimedia: Israel Defense Forces - The Golan He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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