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편은 “주여 들으소서 응답하소서” 라는 성가곡을 통해 익숙한 시편일 것이다. 이 C단조의 성가곡의 전주가 인상적이다. 밑음인 4분음표의 C음이 군화 발자국처럼 저벅저벅 울리는 가운데 반음씩 올라가는 다른 음들과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두려움과 결연한 의지가 뒤섞인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 곡을 작곡한 Eugene Butler는 이 시편을 잘 이해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 시편은 전쟁터에 나가는 왕에게 승리를 주시길 기원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과 긴장감은 왕과 또 함께 하는 군인들만 느낀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지면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남자들은 대부분 죽고 여자들은 성폭행을 당한 뒤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런 긴박한 위기에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는 것이 이 시편의 배경이다.
1-5절은 왕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장면이다. 원어에서 1절은 “네게 응답하시고” 라는 말로 시작한다. 언제 응답하시길 기도하는가 하면 “환난의 날” 이다. 환난이란 좁은 틈에 끼어 꼼짝도 못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전쟁터에 나가 적들과 싸울 때 좁은 틈에 끼어 꼼짝도 못하고 죽을 위기에 빠졌을 때 당신이 간구하시면 여호와께서 들어 주시길 원한다는 것이다. 덫에 걸렸고 사냥꾼들의 발걸음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는 상황에서 기도하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위기에 빠진 왕의 기도를 들으셨다면 그 다음에는 보호해주셔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호하는가? NIV, ESV, 새번역은 1절 뒷부분을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원어의 본래 뜻은 개역처럼 “높이 드시며”이다. 이는 마치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독수리를 다른 짐승들이 잡아 먹으려 할 때 어미 독수리가 내리꽂듯 날아와 낚아 채어 다시 높은 곳에 올려놓는 그림이다.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왕을 그렇게 구하셔서 높은 절벽 위의 평평하고 안전한 바위 위에 내려놓아 달라는 간구이다. 위기에 처한 야곱을 구해 주시고 도와주셨던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왕을 위기에서 구해 달라는 것이다.
2절은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라고 했다. 이는 증원군을 보낸다는 군사적 용어이다. 여호와높은 곳에 왕을 올려놓으셨지만 위급하기에 임시방편으로 피신시켜 놓으신 것 뿐이다. 이제 성소에 계신 여호와께서 증원군을 보내어 왕을 도와 주셔야 하는 것이다. 미완료 과거 동사는 계속해서 끝없이 파견해 달라는 것이다. 끝도 없는 여호와의 군대들이 왕을 구하러 달려올 것이다.
2절 뒷부분에서는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란 말이 이어진다. 이는 뒤로 기댈 수 있도록 밀어 준다는 뜻인데 주로 후방에 있는 병참부대가 군대에 식량과 무기를 보내준다는 뜻이다. 증원군을 보내놓고 만약 보급이 끊기면 모두 굶어 죽을 수 밖에 없기에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원해 주시길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성소가 아니라 시온이다. 시온은 예루살렘이기에 예루살렘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물자들을 끊임없이 왕과 그 증원군들에게 보내달라는 것이다. 먼저 증원군이 앞서 가고 그 뒤에 병참부대가 식량과 무기들을 싣고 끊임없이 뒤 따라 가는 그림이다.
3절은 갑자기 제물을 바치는 모습으로 나온다. 전쟁터의 그림에서 갑자기 제사의 그림으로 바뀐 것이 엉뚱한 것 같지만 사실 계속해서 전쟁터의 그림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무엘상 7:9-10절에 보면 미스바에 모인 백성들을 블레셋이 공격하려 하자 사무엘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또 13:9-12절에 보면 전쟁터에서 사무엘이 와서 번제를 드리기로 했는데 기다리던 사울이 직접 드리는 장면도 나온다. 3절은 이처럼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또 번제를 기쁘게 받아 달라는 것이다.
적에게 포위된 왕이 드리는 모든 제물과 번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면 왕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이 그 다음 순서이다. 그래서 4절에서는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라고 한 것이다. 왕의 소원은 왕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왕을 낚아채듯 구해서 안전한 곳에 올려 놓으신 하나님은 작전 계획까지도 왕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 전략이 그대로 성취되어 적을 완전히 물리치게 해 달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략에 따라 왕이 작전을 펼쳐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면 다음 순서는 승전보를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전달할 차례이다. 승리의 소식을 전할 전령은 말을 타고 정신없이 달려 예루살렘에 남아서 기도하던 사람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5절에서는 왕을 위해 기도한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큰 소리로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중에 또 다시 기쁨의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왕과 승리한 군대들이 군기를 앞세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소식이다. 군기는 오직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만 들 수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적군들은 제일 먼저 군기를 빼앗아 꺾고 가져갈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에 패하고 겨우 살아 남은 패잔병들은 군기를 높이 들 수 없다. 이렇게 전쟁의 위기에서 완전한 승리까지 기원한 후 5절 끝부분은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길 원하노라” 라고 마무리하며 간구하고 있다.
6절은 이러한 기도를 통해 깨달은 것을 선언하는 내용이다. 원어에서 6절은 “이제 내가 아노니” 라는 말로 시작한다. “아! 이제 나는 완전히 알았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완전히 안 이유를 이어서 말한다. 그 내용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야이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과 같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며 이 시편을 계속 불러왔다.
그런데 앞에서는 성소에서 도우시고 시온에서 붙드신다고 했는데 깨닫고 나니 하나님은 단지 성소와 시온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라고 덧붙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실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 분이 아니시다. 역대하 6:30절에 나온 솔로몬의 기도를 보면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늘에서 들으시고” 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은 거룩한 하늘에서 성소와 시온을 지켜보시는 분이라는 것을 시편 기록자는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왕이 어디에 있든지 그 거룩한 하늘에서 항상 지켜 보시며 그분의 오른 손으로 왕을 구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갇혀 계신 분이라면 심각한 문제이다. 기껏해야 증원군과 보급품을 보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한 하늘에서 모든 것을 다 지켜 보고 계시기에 더욱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7-9절은 이러한 간구의 결론이다. 7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병거, 어떤 사람들은 말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병거와 말은 오늘날 기갑부대와 같은 것이다. 병거와 말을 많이 가진 나라가 무조건 이기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시편 기록자와 또 함께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만 자랑한다고 한 것이다. 자기의 군대의 힘을 의지하는 세상의 힘있다고 자랑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승리는 군대의 힘에 달려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8절에서는 군대의 힘을 의지한 대적들은 엎어지고 넘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편 기록자와 그 백성들은 넘어졌다가도 일어서고 굳게 선다는 것이다.
9절은 마지막으로 여호와여!라고 부르며 왕을 구해 달라고 간구한다. 이어지는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라는 말은 두가지로 서로 다르게 번역되고 있다. 개역은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번역해서 양쪽을 다 노렸다. 영어의 RSV와 한글 새번역은 “우리가 부를 때에 주께서 응답해 주세요” 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영어의 ESV는 “우라기 부를 때에 그가 대답하게 하소서”로 번역했다. 개역은 ‘그가’ 라는 말을 빼 놓아서 양쪽 다 가능하게 했기에 필자가 어정쩡하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문맥상의 의미로 보면 ESV처럼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이 대답하게 하소서” 라고 해야 맞다. 만약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왕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이스라엘을 노리던 적들이 사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이겼다 해도 적들은 또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니 승리를 기도하면서도 한마디 덧붙인 것은 왕도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왕이 살아 돌아와서 백성들이나 신하들이 “왕이시여” 하고 부르면 왕이 “무슨 일인지 말하라” 하고 대답하게 해 달라는 뜻이다.
이 시편은 시작부터 끝까지 전쟁터의 장면이다. 이 그림을 전쟁터의 순서대로 연결하지 못하면 이 시편은 수박의 겉도 만져보지도 못하고 넝쿨만 붙잡고 수박이 이렇게 생겼다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왕과 군대들이나 남아서 성전에 모여 온 맘 다해 기도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하게 가슴 졸이며 애를 태우고 긴장한다. 전쟁에서 왕이 패하면 곧 적국의 왕과 군대들이 예루살렘에 들이닥쳐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짓밟고 사로잡아가서 종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은 죽이거나 종으로 삼을 것이다. 그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이런 기도를 노래로 남긴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전쟁을 했나? 하나님께서 대신 싸울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 준비 없이 나가 싸웠나? 그리고 기도만 했나? 그렇지 않다. 군사들은 늘 전쟁을 대비해서 최선을 다해 훈련하고 무기를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면 안된다. 승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은 전쟁 준비를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제물과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고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전쟁 준비를 하라고 맡겨 주셨는데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악하고 게으른 종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도 긴박한 영적 전쟁터에 서 있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은 앞에 나가서 하나님 말씀을 들고 싸운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모든 성도들은 스위스식 예비군이 되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다 전선에 나가 싸울 사람들이다. 다만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이 현재 현역으로(Active Duty) 나가 싸우고 있는 것 뿐이다. 성도들도 언제든지 나가 싸울 수 있도록 말씀으로 가득 채우며 무장하고는 뒤에서 물질과 기도로 예비역(Reserve Duty)과 병참부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적 전쟁은 하나님을 믿느냐 안믿느냐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탄도 전략을 바꾸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했기 때문이다. 개종한 마귀와 그 졸개들은 하나님 말씀을 본래 뜻대로 전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살짝 바꾸거나 때로는 그대로 사용하더라도 필요한 부분만 사용한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사탄의 졸개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님 말씀에서 도덕적인 교훈만 골라 가르친다. 그러면서 다른 종교도 배척하지 않고 인정하고 손을 잡는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신학자와 목회자들을 마음이 트인 신자들이라고 칭찬을 하고 신문에 연일 보도한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본받고 따라야 할 훌륭한 스승일 뿐이다. 이들에겐 하나님의 말씀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자유주의자 뿐 아니라 스스로 보수라고 하는 자들도 가진 자들에게 빌붙어서 뜯어 먹으며 약한 성도들에게는 무당과 같은 영적 권위로 겁을 주어 조종하면서 번영과 복만 떠든다면 자유주의자들과 다름이 없다. 문제는 실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에 있는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자들과 어떻게 전쟁 준비를 할까? 이런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떠드니 일반 성도들은 알 길이 없다. 우리들의 무기는 병거와 말이 아니다. 우리의 무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온 힘다해 우리 마음 속에 채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혜가 목회자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가득 채워야 한다. 목회자는 주석 보면서 성도들에게는 아는척 한다면 교사가 참고서 펴놓고 읽으면서 아는 체 하는 것과도 같다. 모든 성도가 다 전투에 참가할 군사이다. 한국의 예비군은 진짜 군인은 아니지만 미국의 예비군은 진짜 군인이다. 풀타임 군인이 아니고 파트타임 군인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들도 미국의 군인들처럼 모두가 다 전투병력이다. 예비역도 유사시에는 모두 다 전선에 투입되는 것이다. 그만큼 모든 성도들이 말씀으로 훈련 받고 채워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또 어떻게 전투 준비를 할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니 그저 기도만하고 팔짱을 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구경만 해야 할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면서 헌금도 봉사도 안하시는 분들이 툭하면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 라고들 말하면서 팔짱을 끼고 거룩한척 한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정성을 다해 제물과 번제물을 드려야 한다. 성소에서 나오는 증원군들이나 시온에서 나오는 구호물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의 헌금에서 나온다.
요즈음 십일조가 성경에 없으니 폐지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십일조는 구약시대처럼 율법은 아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이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가난한 성도들은 십일조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옳다. 말라기의 한부분을 인용해서 십일조 드리면 수십배로 뻥튀기 해 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사기이다. 십일조를 드리면 그만큼 자기 삶이 불편해 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드리면 잭팟이 터진다고 하면 그건 축복이 아니고 도박일 뿐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십일조라는 말이 안 나오는 것은 폐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하여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완전히 폐지 되었다면 할례에 관한 논쟁보다 더 뜨거운 전쟁이 신약성경에 등장해야 옳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십일조가 아니라 전재산을 드리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닐 만큼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은 것이지 십일조가 폐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주인노릇 하려다 보니 가장 큰 걸림돌이 십일조이다. 세상에서는 알아주는데 교회와서 십일조를 안하면 인정받지 못하니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아닌가? 아니라면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헌금 내역과 소득 내역을 공개하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헌신하지 않으면서 마치 선지자이고 개혁자 행세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이고 회칠한 무덤일 뿐이다.
모두가 하나님 말씀으로 준비하여 언제든지 증원군이 되어 함께 나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우리가 가진 지식과 재물과 재능으로 최선을 다해 훈련하고 인선에서 싸우는 현역들을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준비는 단지 펌프의 마중물일 뿐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마중 물을 붓고 온 힘 다해 기도로 펌프질 하면 한없이 솟아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특별히 모든 교회의 목회자들과 선교지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 젊은 목회자들이 자녀들에게 최소한의 먹을 것 입을 것도 공급해 주지 못해 힘들어 하다가 목회를 포기하고 세상 직업을 갖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일선에 나가 싸우는 군사들이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구해 주셔서 높고 안전한 곳에 올려 달라고 기도하자. 물질과 재능을 보급하는 병참부대가 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증원군과 보급품을 끝없이 터져 나오는 샘물처럼 보내주실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성도들이 말씀으로 부지런히 무장해서 언제든지 증원군이 되도록 훈련하며 준비하자.
사진: 로마에 있는 티투스의 개선문 부조, 유대 로마 전쟁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물건들이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