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편은 시편 기록자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기뻐하고 사랑하며 그 말씀을 사모하는지 그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물 안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솜씨를 찬양하고 뒷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율법 안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을 자로 설 수 있는지를 노래하고 있다.
시편 기록자는 1-2절에서 하나님 지으신 하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솜씨를 노래한다. 1절에서 하늘은 눈에 보이는 파란 하늘이다. 눈에 보이는 파란 하늘은 찬란한 햇빛이 가득한 하늘이다. 그 찬란한 햇빛과 푸른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 같다는 뜻이다. “선포한다” 라는 말은 본래 손가락을 꼽으면서 숫자를 세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도대체 동그라미가 몇 개야? 우와!” 라며 감탄하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엄청난 숫자를 말로 묘사할 수 없기에 손가락을 꼽으면서 감탄하는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다. 영광이란 찬란한 빛이 아주 많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얼마나 찬란한지 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다.
또 궁창이란 눈에 보이는 하늘 그 위의 하늘이다. 특별히 밤하늘 달과 별이 박혀있는 검푸른 궁창을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에 감탄하고 있다. 우리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추석 다음날 지리산 거림골에서 야영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거림골의 하늘에는 어느 한구석에도 빈틈이 없을만큼 별들이 하얗게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한 우리 딸은 “와, 징그럽다!” 라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시편 기록자도 양을 치면서 들판에 앉아 바라보았던 팔레스타인의 하늘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솜씨가 정말 오묘하고 놀랍다는 것이다.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했는데 나타낸다는 말은 높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선포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밤새도록 양을 돌보다가 밤하늘의 오묘함도 보았을 것이고 새벽에 찬란히 빛나는 햇빛도 보았을 것이다. 찬란한 햇빛과 화려한 밤 하늘의 별빛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솜씨를 생각한 것이다.
2절에서 “날은 날에게 말하고”에서 말한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건천인 와디에 물이 흐르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성 기후이고 건조기후 지역에 속하기에 봄부터 가을까지 와디는 그냥 평범한 골짜기일 뿐이다. 그러다가 이 와디는 겨울철 우기가 되면 갑자기 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온 들판을 적시는 강물이 된다.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에 강물이 흐른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햇빛에 빛을 받아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을 상상해 보라. 그 강물에 양떼를 데리고 가서 먹이던 다윗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날은 날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메마른 골짜기에 강물이 흐르듯 흘러 나온다는 것이다.
또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준다 했다. 밤 하늘의 달과 별들이 하나님의 엄청난 지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의 손과 그 손의 솜씨를 보며 하나님의 지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낮의 하늘과 밤의 하늘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3절에서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른 소리도 없다 라고 한 것이다. 언어란 직접 대화한 것을 말한다. 또 말씀이란 말한 내용 그 자체를 말한다. 직접 대화도 그 말한 내용을 전하는 내용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 조차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 대화에서 간접대화로 목소리로 점점 내려오면서 소리도 점점 작아지는 점강법이다. 아무 소리도 안들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들어 놓은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의 솜씨와 지식을 알 수 있다. 가구를 아주 멋지게 잘 만들었다면 그 사람이 목공에 대한 솜씨와 지식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낡은 집을 아주 잘 고치는 사람이 있다면 집의 수리에 대해서는 대단한 솜씨와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단한 전자제품을 만든 사람이 있다면 전자공학에 대한 솜씨와 지식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의 글 솜씨와 그 지식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보고 하나님의 솜씨와 지식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솜씨와 지식은 말로 전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6절은 그 하나님의 말씀과 지식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간다며 말로 전해지는 듯 묘사했다. 4절에서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에서는 “그들의 줄자는 온 땅을 다 잰다” 라는 뜻이다. 새번역과 개역개정 모두 줄자를 70인역과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역과 영어의 NIV에 따라 소리라고 의역했다. 히브리어 원어에서 3절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식이라는 줄자가 온 땅을 다 재고 지나간다는 말이다. 줄자로 땅을 재려면 그 땅들을 모두 다 손으로 짚으며 발로 밟고 지나가야 한다. 그렇게 온 땅들에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또 그 말씀은 세상 끝가지 이른다 했다. 앞에서는 2차원의 면에 고루 퍼지는 모습이지만 이번에는 직선으로 뻗어나가 다다를 수 없는 먼 곳에까지 전달되는 모습이다. 앞에서는 온 땅 구석구석 다 재고 지나간다는 평면적인 그림이지만 세상 끝까지 라는 말은 더 이상 다다를 수 없는 땅끝까지 다다른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3절에서 강물처럼 흘러나오던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이 한없이 흘러나가 땅끝까지 전달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직접 듣고 배우지 않아도 모두가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알게 된다. 이를 자연계시라고 한다.
이렇게 자연 만물을 통해 온 세상에 퍼져 나가는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것인지를 해에 비추어 묘사했다. 4절 뒷부분에서는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라고 했다. 저녁에 해가 서산 너머로 지는 모습을 하늘에 텐트를 쳐서 해가 밤에 잠을 자게 하셨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텐트는 단순한 텐트가 아니라 신혼부부의 신방인 텐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 텐트를 치고 살던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신랑인 해는 밤에 하나님께서 쳐 주신 텐트에서 첫날 밤을 지냈다. 5절에서는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을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기뻐하고 라고 한 것이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신부와 텐트 안에서 첫날 밤을 지내고는 너무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린 채 싱글벙글 밝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이는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을 깨닫고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다.
또 “그의 길을 달리는 장사 같아서” 라는 말은 전쟁에서 적장의 목을 베고 승리한 용사가 그 칼을 들고 환호하는 자기 병사들의 앞을 달리며 기뻐하는 모습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월드컵 축구의 결승전에서 경기 종료 1분 전에 역전 골을 날린 선수가 환호하는 관중석 앞을 달리며 손을 흔드는 모습과도 같다.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을 깨달은 기쁨이 얼마나 큰 지를 묘사한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을 아는 기쁨이 전부는 아니다. 6절의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라고 했다. 자연 만물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은 모든 땅에 빠짐없이 비추는 햇빛과도 같아서 아무도 그 빛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교만한 자들이 있을 뿐이다. 특별히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미천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엄청난 영광과 솜씨를 거부한다.
7-9절은 이제 하나님의 이러한 엄청난 영광과 솜씨가 말씀 안에서 분명히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다양한 면을 자세히 구분해서 묘사하고 있다. 먼저 7절에는 율법과 증거가 나온다. 여호와의 율법은 원어에서 여호와의 토라인데 모세오경을 뜻한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해서 영혼을 소성시킨다는 것이다. 소성시킨다는 말은 생명을 되돌려 준다는 뜻이다. 사막에서 물이 없어 입이 타들어가며 탈수증으로 죽어가던 사람에게 물과 음식을 먹게 하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영혼이라는 말은 살아있는 생명이란 뜻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은 아니다. 물과 음식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물과 음식이 그 생명을 다시 되살리는 것처럼 여호와의 토라를 날마다 잘 먹고 마시고 마음에 새겨 따라 살면 죽어가던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또 여호와의 증거는 말씀에 나타난 높은 기준과 분명한 경고를 말한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서 어떤 수준의 경건을 요구하시는가를 알려준다.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지도 알려준다. 주님의 증거는 그래서 우둔한 자를지혜롭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나타난 높은 기준과 분명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 따라 산다면 우둔한 자도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 기준에 따라 좋은 학교를 졸업했느냐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로 현명함을 따지려 한다. 하지만 지혜란 그렇게 얻어지지 않는다. 세상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높은 기준과 분명한 경고들에 귀를 기울이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서 살다보면 누구보다도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일제시대에 국민학교를 다니다 말았다. 한글은 야학에서 배워 읽을 줄만 아는 분이셨다. 1980년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해서 최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날마다 성경을 펴놓고 전력을 다해 성경을 읽으신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찾아서 계속 들으신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하시는 필자의 어머니는 지금 세상 어떤 교수나 학자보다 더 지혜로우시다. 두 아들이 신약학 박사인데 두 아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하실만큼 성경을 정확히 아시고 그 말씀에 따라 지혜롭게 사신다. 여호와의 증거가 배움이 없는 필자의 어머니를 그렇게 지혜롭게 만드신 것이다.
8절의 여호와의 교훈은 본래 목자가 양들을 꼼꼼하게 살핀다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세한 부분까지 알려주셔서 세심하게 돌보고 계시는 말씀을 가리킨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의 자세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알려주시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교훈들이 정직하다고 했는데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똑바로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똑바로 세워져 있다 라는 말은 무조건 자로 그은 듯 일직선으로 세워졌다라는 뜻은 아니다. 정직이란 말은 토기장이가 만든 토기를 보고 참 똑바로 잘 만들어졌다라며 기뻐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사진작가가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참 잘찍었다라고 스스로 기뻐하는 모습이다. 설교자가 하나님 말씀을 연구해서 선포하고는 스스로 참 똑바로 잘 전했다 라고 기뻐하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교훈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감탄할 만큼 그렇게 똑바로 잘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바른 교훈들을 따라 사는 우리들을 보고 하나님께서도 토기장이처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도 그러한 하나님의 기쁨을 알고 함께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 여호와의 계명이란 명령을 내리시는 분명한 말씀의 권위를 말한다.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 라고 분명히 경고하시는 말씀의 권위이다. 그 말씀의 권위가 순수하다는 말은 아가서 6:10절에서 “해처럼 눈부시다” 라고 할 때도 나온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밝고 깨끗해서 투명하게 잘 보인다는 뜻이지 단순히 순진하거나 위생적으로 깨끗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음에 나오는 “눈을 밝게 하시도다” 라는 말이 순수하다는 말의 뜻을 분명히 다시 설명해 준다. 여호와의 계명이 해처럼 밝게 빛난다는 뜻이다. 물론 순도 백퍼선트의 금과 같기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하나니 말씀의 권위가 우리의 갈길을 비추어 주어 잘 보고 따라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9절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란 주님의 두려움이란 뜻이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티없이 맑다는고 했는데 이는 구약의 레위기에 나오는 제의적인 정결을 뜻하는 말이고 위생적으로 깨끗하다는 뜻은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정결한 제물과도 같이 정결해서 하나님 기뻐 받으신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법도란 현명한 재판을 내린 기록이란 뜻이다. 주님의 법규는 참되어서 한결같이 바르다 했다. 참되다는 말은 믿을만하다는 뜻이다. 또 “다 의로우니” 라는 말은 공정한 재판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현명한 재판기록인 하나님의 판례들은 믿을만하고 다 공정하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현명하신 재판들은 의인들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인들은 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때로는 일시적으로 악인들이 형통하는 듯 하지만 결국 악인들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하나님 말씀의 다양한 면들은 모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다양한 면을 모두 다 설명하고 묘사한 뒤 10절에서는 이 말씀들이 금보다 순금보다 더 탐스럽다 했다. 순금보다 훨씬 더 갖고 싶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변함없는 금속은 순금이다. 그 가치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말씀들은 순금보다 훨씬 더 영원한 가치가 있어서 갖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이다.
금과 순금과 짝을 이루는 댓구는 꿀과 송이꿀이다. 꿀보다 더 달콤하고 또 송이꿀 보다 더 달콤하다는 것이다. 송이꿀이란 이스라엘 사막의 바위틈에서 발견한 벌집에서 주르르 흐르던 꿀이다. 하나님 말씀들을 간절히 갖고 싶을 뿐 아니라 그 말씀들의 달콤함은 꿀보다도 송이꿀보다더 더 달다는 것이다.
11절은 이렇게 말씀을 갖고 싶어하고 그 말씀을 송이 꿀보다 더 달콤하게 느끼는 사람이 받을 상이다. 이렇게 간절히 사모하여 갖고 또 그 맛을 진정으로 느끼며 간직하는 사람은 그 말씀에 따라 경고를 받고 그것들을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러한 자들을 보고 잘 만들어진 도자기를 보듯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깨닫지 못한 죄이다. 말씀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고 범한 죄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12절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라고 질문한다. 아무도 말씀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잘못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완벽하게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말씀을 다 깨닫지 못해 지키지 못한 죄가 있다면 그런 죄는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달라는 뜻이다.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고 그 맛을 느끼며 실천하고 있기에 모르고 지은 죄가 있다면 용서해 주시고 그 죄를 없애달라는 것이다.
13절은 모르고 지은 죄와는 반대로 죄인 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 안에 거하면서 그 말씀의 권능으로 막아주시고 죄의 손아귀에 다시는 잡히지 않게 지켜 달라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시편 기록자는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라고 했다. 정직하여 라는 말은 흠이 없이 완벽하다는 뜻이다. 새번역처럼 “온전하게 되어서” 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어에 가깝고 개역은 지나친 의역을 했다. 죄가 하나도 없어서 온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 달콤한 맛을 느끼며 그 말씀대로 지키지만 미처 알지 못해서 범하는 죄들은 하나님께서 막아 주시기에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4절은 이렇게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하게 된 결과를 말한 것이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자신의 마음 속의 생각까지도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길 바란다는 것이다. 믿는 자가 자신을 말씀에 복종시켜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 기뻐하시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마음 속의 생각들까지도 주님 기뻐 받으시길 바란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참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도 정말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시편 기록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마음 속의 생각까지도 말과 동일하게 하나님 기뻐 받으시길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놀라운 지식과 솜씨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또 하나님은 자세한 지식과 섬세한 솜씨로 말씀을 기록해 주셨다.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과 솜씨를 엄청난 크기의 초고층 건물을 지은 지식과 솜씨라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마치 금세공사가 눈에 안보일 정도로 작고 세세한 부분까지 아로새긴 지식과 솜씨와도 같다. 이러한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주관하실 뿐 아니라 지극히 작고 미약한 우리 각자에게 까지도 말씀으로 세심하게 배려를 하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숨기거나 감출 수 없다.
햇빛 아래 모든 것이 드러나듯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다 드러난다. 이제 그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죽어가는 자에게 생명을 주고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지혜롭게 하신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하시고 우리의 눈을 밝혀 바른 길을 보게 하신다. 이러한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갖고 싶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세상 어떤 음식보다 더 맛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지식보다 실천을 강조하지만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실천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으로 충만함 받으라고 강조했다. 말씀을 아는 것이 정말 귀하고 그 맛이 꿀송이보다 달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사람의 실천은 의무감에서 눈가림만 하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주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가득 채우는 일이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양을 먹이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길이다. 순금보다 더 귀하고 꿀보다 더 달콤한 말씀을 알게 하지 않으면서 사회 봉사만 강조하는 것은 분명 주객이 전도된 일이다. 또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목회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든지 먼저 그 귀한 가치를 알고 그 맛을 아는 사람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목회자의 인도를 따라 모든 성도가 가르쳐 그 가치를 깨닫고 그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사진: wikimedia, Diego Maradona celebrating his second goal scored to England during the 1986 FIFA World C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