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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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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alms

시편 18편

1-3절은 복음성가에도 있는 유명한 부분이다.

2017. 2. 2.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18편 강해 설교

1-3절은 복음성가에도 있는 유명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위기에 빠져있는 자신을 지켜 주시고 건져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기에서 건져 주실 뿐 아니라 강하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라 자랑하면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한다. 전체적인 그림은 전쟁터의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 승리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실제 날카롭게 대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시편 기록자와 거짓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척 하는 간교한 자이다.

1절은 원어에서 “내가 주님 사랑하나이다”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사랑이라는 말은 ‘라함’인데 자궁이라는 뜻도 있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사랑을 느낄 때 쓰던 말이다. 또 이 말은 하나님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겁고 친밀한 사랑을 하나님께 표현할 때도 썼다. 사랑한다고 말한 뒤 1절 끝부분에서 나의 힘이라 했다. 그 뜨거운 사랑은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셔서 자신을 살려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2절에서 7개의 보호막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시편 기록자의 7중 보호막이라는 것이다. 첫째 보호막은 “나의 반석” 이다. 반석이란 본래 바위가 쪼개어진 절벽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품은 마치 쪼개어진 절벽과도 같다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를 쫓아오던 대적들은 그 절벽을 뛰어 넘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보호막은 요새이다. 요새란 전쟁을 위해 높은 곳에 튼튼하게 벽으로 쌓아 만든 진지를 말한다. 높은 바위 위에 돌을 쌓아서 만든 보호막이다.

셋째 보호막은 구원자 라고 했는데 원어의 뜻은 피하게 하는 자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바위이시고 요새라 하더라도 피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넷째 보호막은 피할 바위이다. 이는 숨을 곳이 있는 바위 틈을 말한다. 다섯째는 방패이다. 방패는 쏟아지는 적의 불화살을 막아주는 것이다. 여섯째는 구원의 뿔이다. 뿔이란 말은 광채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힘 센 동물의 뿔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부분에서는 비유적으로 힘이란 뜻으로 쓰였다. 일곱째 보호막은 산성이다. 산성이란 높고 안전한 장소라는 뜻이다. 3절은 하나님이 이렇게 7중의 보호막으로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주님을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는 것이다. 그분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고 자신을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실 분이시라는 것이다.

4-6절은 시편 기록자가 처한 위기의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사망의 줄”이란 사냥꾼이 설치한 줄로 된 덫이다. 빠져 나가려 하면 더 조여드는 그런 덫에 걸렸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와 짝을 이루는 표현은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이다. 개역개정은 지나치게 의역을 했다. 원어는 새번역처럼 “죽음의 물살이 나를 덮쳤으며” 차라리 원어에 가깝다. 물살이란 와디라는 건천을 말한다. 평소에는 물 한방울 없는 골짜기이지만 숲이 없는 건조한 지역인 이스라엘에서는 우기가 되면 갑작스럽게 물이 불어나 엄청난 속도로 소용돌이치며 흘러 닥치는대로 파괴한다. 마태복음 7:24-25절에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말이 바로 이 와디의 홍수를 말하는 것이다.

5절의 스올의 줄은 앞에서 동물을 잡는 덫에 비유한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스올에 빠져 완전히 멸망하게 하는 덫이란 뜻이다. 또 “사망의 올무” 란 새를 잡는 덫처럼 갑자기 덮치는 장치이다. 4-5절에 나온 말들은 모두 다 갑자기 닥친 멸망할 위기를 말한다. 6절 앞부분의 “내가 환난 중에서” 라는 말은 좀은 바위 틈에 끼어 꼼짝도 못하고 죽게 된 그림이다. 앞에서 말한 여러가지 위기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그 성전에서 자신의 간구를 들어 주셨고 자신의 부르짖음이 주님의 귀에 들렸다는 것이다.

시편 기록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이 일어나 임재하시는 모습이 7-19절에 나온다. 이는 마치 헐리우드 영화의 극적인 장면보다 훨씬 더 생생한 그림이 가득하다. 먼저 7절에서는 “이에 땅이 진동하고” 라고 했다. 진동한다는 말은 ‘가아쉬’ 인데 술취한 사람이 갈지자 걸음을 걷듯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모습이다. 땅이 그렇게 앞 뒤로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이어 나오는 “요동하며” 라는 말은 ‘라아쉬’ 인데 지진으로 인해 요란하게 흔들리는 것을 뜻한다. 또 이는 완전히 익은 밀밭의 이삭들이 흔들리는 모습이다. 땅이 그렇게 흔들리고 떨린다면 엄청난 두려움을 온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8절은 다분히 시각적이다. 코에서는 연기가 솟아 오른다. 이는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낸다. 입에서는 모든 것을 다 태워 삼킬만한 화염이 쏟아져 나온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 그 화염에 의해 숯덩이들이 산소 용접하는 불꽃에 녹는 쇳덩이처럼 불꽃을 튀기며 하얗게 달아 오르는 모습이다. 마치 어릴적 보았던 용가리 라는 영화에 나오는 불을 뿜는 공룡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생겼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임재하시는 모습을 그림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역시 엄청난 두려움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모습이다.

9절에서는 주님께서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라고 했다. 하늘을 드리우신다는 말은 하늘을 활시위처럼 잡아당기는 모습이다. 텐트를 치려고 기둥을 세워 텐트를 잡아 당기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활시위처럼 하늘을 잡아 당기신 후 당겨진 하늘 사이로 화살처럼 내려오시는 것이다. 그 발 아래에는 구름이 깔려 있다. 이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빽빽한 구름이다. 하지만 10절을 보면 하나님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10절은 그룹을 타고 날아오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오신다 했다. 구름은 단지 하나님을 완전히 가리는 구실이다. 7절에서는 제자리에서 떨리는 모습이고 8절도 제자리에서 불을 뿜으시며 준비운동을 하시는 모습이라면 9-10절은 본격적으로 아주 빠르게 움직이시는 모습이다.

11절은 시편 기록자를 돕기 위해 임재하신 하나님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라고 했다. 흑암으로 하늘에 텐트를 치셔서 가리셨다는 것이다. 또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신다 했다. 이는 마치 출애굽기에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 시내산에 임재하신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구름으로 벽을 만드시고 흑암으로 지붕을 만드셔서 그 처소를 삼으셨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12절에서는 “ 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라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밝은 광채가 우박처럼 또 불붙은 석탄처럼 그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모습이다. 이는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시편 기록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13절은 이제 그 우렁찬 소리를 들려준다. 그 소리는 우렛소리(천둥소리) 같다.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높이시며 불붙은 우박과 또 석탄 덩어리를 쏟아 내신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모습은 시각과 청각으로 느끼게 한다.

14절은 대적들을 직접 공격하시는 모습이다. 화살을 쏘아서 원수들을 흩으신다 했는데 그 화살은 번개 화살이다. 번개화살이 떨어지자 대적들은 놀라서 정신없이 도망간다. 15절은 흩어진 대적들을 주님께서 꾸짖으시는 모습이다. 그 꾸짖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바다도 두려워서 그 바닥을 드러내고 땅도 역시 두려워서 그 기초를 모두 드러냈다는 것이다. 바다가 그 바닥을 드러낸 이야기는 출애굽기에서도 나온다. 하나님은 시편 기록자를 구하기 위해 바다들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바다도 두려워 그 바닥도 드러내고 땅도 그 기초를 드러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을 완전히 물리치신 것이다.

대적들을 완전히 물리치신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를 구하시는 모습이 16절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손을 내미셔서 시편 기록자를 움켜 잡아 많은 물에서 건져내 주셨다. 많은 물은 시편 기록자가 빠져있던 고난을 뜻하는 말이다. 고난의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 시편 기록자를 건지시는 모습은 마치 헬리콥터에서 줄사다리가 내려오고 구조대원이 손을 내밀어 시편 기록자를 잡은 모습과도 같다. 하나님의 손에 잡혀 하늘로 오르면서 이제 자신을 죽이려던 그 물들을 내려다 보면서 말한 것이 17절이다. 그렇다면 시편 기록자가 빠져서 허우적 거리던 물은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들이다. 18절에서는 이러한 원수들이 마치 와디의 홍수처럼 덮쳤지만 자신은 주님께 기대어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절에서는 7-18절을 요약해서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넓고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으셨다는 것이다. 이제 헬리콥터는 시편 기록자를 넓고 안전한 땅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강한 원수들과 미워하는 자들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 자신을 구출해 주신 것만해도 큰 감격이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안전한 땅에 내려 놓으신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다. 그 감격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므로” 라고 했다. 기뻐하신다는 말은 ‘하파쯔’ 인데 자신이 하나님께 매력 덩어리라는 것이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보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흐뭇해 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1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애틋한 마음으로 가슴 깊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하나님과 시편 기록자는 서로 그렇게 기뻐하시고 좋아하는 관계이다.

이렇게 자신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뭔가 선물을 주지 않으실까? 우리도 정말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주고 싶은데? 그래서 20-30절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한다.

20절은 하나님께서 두가지 이유로 자신에게 보상해 주신다 했다. 첫째는 의롭다는 것이다. 의롭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말이다. 대적들은 시편 기록자를 죄인이라고 거짓 고소를 하지만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없는 것을 보시고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둘째는 손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말은 앞에서 죄가 없다는 말을 좀더 세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손으로 행한 죄가 없어 손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21절은 원어에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왜 자신이 그렇게 의롭고 손이 깨끗한지 설명한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라고 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가르치는 길을 그대로 따라 갔다는 것이다. 또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했다.. 어떻게 하나님의 길을 떠나지 않았나? 22절에는 두 가지를 지켰다고 답을 하고 있다.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에서 규례란 하나님께서 현명한 재판을 내린 기록들을 앞에 두고 그대로 따라 갔다는 뜻이다. 또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라고 했다. 율례란 말씀을 실천하도록 다발로 묶어 새겨 자손 대대로 전달한 것을 말한다. 날마다 정해진 말씀대로 실천했다는 뜻이다.

얼만큼 실천했나? 23절에서는 먼저 “완전하여” 라고 했다. 아무런 흠집도 없이 완벽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라는 말씀과 하지 말라는 말씀들을 아는 한 모두 다 지켰다는 뜻이다. 또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라는 말에서 죄악이란 하나님 말씀을 왜곡시켜 어기면서도 자신은 지키는 것처럼 꾸미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완전한 자와 죄악을 범하는 자의 차이는 거룩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수하게 순종하느냐 아니면 그 말씀을 비틀어 열심히 지키는 척하지만 사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느냐의 차이이다.

24절은 그렇게 한 시편 기록자에게 20절에서 말한 것과 같다. 차이는 24절에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 지켜 보시고 의롭고 손이 깨끗하다 하여 상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롭고 손이 깨끗한 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25절에는 추가적인 요구사항이 나온다. “자비로운 자” 란 하시딤이다. 이는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인 헤세드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하여 한결 같은 사랑으로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도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으로 대하신다는 것이다. 또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함을 보이시며” 라고 했다. 이 두가지는 모두 언약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언약을 성실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두에게 다 차별없이 그렇게 대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26절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구별해서 대하시는지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깨끗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깨끗하심을 보이시고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신다 했다. 깨긋한 사람이란 주의 말씀의 본 뜻을 따라 정직하게 따라가는 순수한 사람들이다. 이 반대말인 사악하다는 말은 사실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어서 그 빈틈을 찾아 악을 행하면서도 사람들 앞에는 스스로 거룩하다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들 마음대로 꽈배기처럼 꼬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도 똑같이 꽈배기를 꽈서 선물하신다는 것이다.

27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27절에서는 곤고한 백성과 교만한 눈이 대조된다. 곤고한 백성이란 가난하고 힘이 없어 억압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그러한 고통에서 건져 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눈을 높이 치켜뜬 교만한 눈은 낮추셔서 굴복시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을 그 행한대로 구별해서 대하신다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28절도 역시 왜냐하면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의 등불을 켜시기 때문이다. 등불이란 눈을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그 길을 보는 눈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두운 길을 밝혀 바른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깨끗한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간교한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눈이 어두워져 있기에 말씀을 비틀어서 자신들을 변호하는데만 사용하고 실제로는 따라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도 그렇게 대하신다는 것이다.

29절도 역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셔서 “적군을 향해 달리며” 라고 했다. 문자적인 뜻은 군대의 위로 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적군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나서야 그들의 시체 위로 달릴 수 있기에 완전한 승리를 뜻한다. 또 담을 을 수 있다고 했다. 어떠한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손이 깨끗한 사람들을 깨끗하게 대하시는 방법이다. 간교한 사람들이 이기는 것 같지만 사실 최후 승리는 깨끗한 사람들이다.

30절은 20-29절을 요약해서 순종하는 자에게 어떻게 상을 주시는지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흠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은 언약을 완벽하게 지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순수하다는 것은 완벽히 제련된 순도 100 퍼센트 순금 같은 것을 말한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에게는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셔서 완벽하게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상이다.

31-45절은 그러한 주님을 자랑하는 내용이다. 역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왜 하나님만이 흠도 없으시고 완벽하게 진실하셔서 약속을 지켜 주시는가 하는 내용이다. 먼저 하나님만이 참된 진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구원의 반석이라는 것이다. 반석이란 말은 2절에서 “피할 바위” 라는 말의 바위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오직 하나님 만이 나의 피할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이다.

32절에서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를 띄우시며”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강한 힘을 주신다는 말이다. 또 자신의 길을 안전하게 지켜주신다는 말은 가는 길에 아무런 걸림돌도 없도록 길을 치워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길을 치워주셨다면 다음에 할 일은 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33절에서는 자신의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 하시고 높은 곳에 안전하게 세워주신다는 것이다. 사슴이 바위 절벽들을 뛰어 올라 다른 맹수들이 오지 못하는 높은 절벽에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것처럼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순히 힘을 주셔서 사슴처럼 달려 피하게만 하시는 것은 아니다. 34절에서는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했는데 원어는 손을 전쟁을 위해 훈련시키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구하신 뒤에는 강하게 훈련시켜서 용사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편 기록자가 말하는 것은 진짜 전쟁의 용사가 아니다. 말씀의 용사이다. 얼만큼 강하게 하시는가? 그 팔로 놋쇠로된 활도 구부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또 싸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방어무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구원의 방패를 주신다는 것이다. 대적의 어떠한 공격도 막아낼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오른 손으로 자신을 붙잡아 주신다는 것이다.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겸손히 복종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왕의 시종무사가 왕자에게 무술 수업을 시키는 모습과도 같다. 몇번씩 쥐어 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참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겸손히 시편 기록자를 참아 주면서 끝까지 훈련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큰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36절에서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발 디딜 곳을 넓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원래는 아슬아슬한 절벽 길 같은 곳에서 걸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길을 넓혀 주셔서 미끄러지거나 떨어질 염려 없이 마음껏 달릴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는가? 37절에서는 원수를 뒤쫓아 가서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않았다고 했다. 38절에서는 대적들이 자신의 발 아래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무찔렀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술 수업을 받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되다 보니 대적들에게 널리 소문이 났다. 39절은 “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라고 했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가 싸우러 나가면 자신을 치려고 일어선 자들이 싸우기도 전에 시편 기록자의 발 아래 무릎을 꿇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편 기록자에게 가까이 있던 적들이어서 도망갈 수 없었기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또 40절에서는 “내 원수들에게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라고 했다. 이들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도망가던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하셨다는 것이다. 41절에서는 이러한 대적들은 아무리 부르짖어도 구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42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그러한 대적들을 쳐 부수었는데 바람 앞의 먼지처럼 완벽하게 부수었고 길의 진흙처럼 완벽하게 밟아 이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는 침략을 위한 전쟁의 승리가 아니다. 43절에서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라는 말은 대적들이 먼저 공격해 와서 시편 기록자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 시편 기록자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렇게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시고 그 소문이 널리 퍼지게 하셔서 알지도 못하는 멀리 떨어진 백성들까지도 자신을 섬기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자이시고 보호자 이실 뿐 아니라 훈련시키셔서 완전한 승리를 이루게 하시고 최고로 높여 주신 것이다. 44절은 많은 사람들이 싸우기도 전에 소문만 듣고 복종하고 이방사람들도 굴복한다는 것이다. 45절은 이방 자손들이 쇠잔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온다 했다. 견고한 곳은 아무도 공격할 수 없는 견고한 요새를 말한다. 그런 자들이 만약 요새 안에 머물러 있다면 공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도 두려워 스스로 나와서 항복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46-50은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것이다. 46절에서 여호아는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역시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높이자고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를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 때문이다. 또 47절은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의 원수를 갚아 주셨고 모든 백성들을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셨다. 48절에서는 자신을 구해 주시고 높이 들어 주셔서 포악한 자들에게서 건져 주셨다는 것이다. 16절에서 높은 곳에서 손을 내미셔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49절은 그러므로 모든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시편 기록자가 공개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방 나라 라는 말은 시편 기록자에게 굴복한 모든 나라들이란 뜻이다. 50절은 하나님은 큰 구원을 안겨 주신 분이시라고 했다. 죽음의 위기에서 큰 구원을 주셨다는 것은 결국 대적들을 완전히 무찔러 이겼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편 기록자가 죽었을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윗과 그 자손 왕들에게 한결 같은 사랑을 영원무궁토록 베푸시는 분이라 했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말하는 것이다. 다윗과 그 자손들이 다윗처럼 그렇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께로 피한다면 하나님은 한결 같은 사랑을 영원 무궁토록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보면 그 자손들은 이 시편과는 달리 악인들의 길로 가서 완전히 멸망했다.

시편 18편에 나타난 내용은 한편의 긴 대하 드라마와도 같다. 자신이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전쟁터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그렇게 들어 주신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등불 삼아 따라 갔기 때문에 위기에서 구해 주시고 큰 승리를 안겨 주시며 대적들이 완전히 멸망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강하게 훈련시켜 주신 것도 말씀으로 강하게 훈련시켜 주신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성경 구절대로 그대로 지키며 바르게 살면 되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들이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들인 척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 시편에 나온 사악한 사람들이고 교만한 눈들이다. 예수님을 대적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가짜 경건을 실천하는 척하는 사람들이었다. 골로새 교회에서 율법을 강조하며 거룩한 척 했던 사람들이 바로 사악하고 교만한 눈들이다.

마가복음 10:1-12절에 보면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면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본래 하나님의 말씀은 남자들이 불륜을 저질러 놓고는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마구 버리기에 주신 말씀이다. 버리려면 최소한 이혼증서라도 써주고 버려서 다시 재혼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당시 이혼한 여자는 살아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가지고 꽈배기를 꼬아서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들을 마구 버렸던 것이다. 사람들 보기엔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간음을 해서 돌에 맞아 죽었어야 할 자들이 율법을 자신들의 방패로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의 본래의 뜻을 따라 이혼할 수 없다고 못박으셨다. 예수님 당시 율법을 지킨다는 자들이 바로 사악한 자들이고 교만한 눈들이다.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의 빈틈을 찾는 신자들이 있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은 폐지 되었으니 이젠 십일조 하라고 가르치는 목사들은 엉터리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예수님 당시 율법으로 꽈배기 꼬던 바리새파와 서기관들과 똑 같은 자들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시 하던 것은 할례와 십일조이다. 할례 폐지를 주장했을 때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엄청나게 있었고 그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십일조 이야기가 없으니 폐지 되었다고? 만약 그랬다면 신약성경에 십일조 떼어먹는 도둑놈들이라고 정죄하며 죽이려던 유대주의자들과의 충돌이 수도 없이 나와야 한다. 왜 신약성경에 십일조에 대한 말이 없는가?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자기들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내놓은 내용이 나올만큼 그렇게 헌금했기에 십일조를 가지고 논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울이 사례비 받지 않고 복음 전했으니 오늘날 목회자들도 역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사례비 받는 목회자들은 다 도둑들 취급하는 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가난한 빌립보 성도들이 주는 헌금은 받아 사역을 했다. 하지만 부유하고 높은 권력자들이 있던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들의 돈을 받지 않은 것이다. 받으면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고 그들의 권위 아래에 들어가야 하는 사회 시스템 때문이다.

구약을 보면 타락해서 악한 시대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십일조를 떼어먹어서 레위인들이 모두 살길을 찾아 간 이야기가 나온다. 목사는 주일 설고 30분 수요예배 설교 30분만 일하고 나머지는 논다고 생각하는가? 똑바로 알라. 지구상의 어떤 대 학자도 철저하게 연구하고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전할 사람은 없다. 필자는 10년동안 죽기 살기로 목숨걸고 성경을 어떻게 바르게 해석할지 공부를 했지만 주일 설교 한편을 위해 25-30시간을 쏟아 공부하지 않으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 만약 자비량 목회가 옳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전달되지 않고 교회는 사라진다. 자비량 목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는 것이지 그것이 법은 아니다.

말씀을 꼬투리 잡아서 빈틈을 찾으려는 사람들아! 정신 차리고 하나님 말씀의 본래 뜻을 찾아라. 그렇지 않으면 시편 18편에 나오는 사악한 자들 교만한 눈들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멸망시키신다. 하나님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며 하나님의 품에 피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한결 같은 사랑을 베푸셔서 높이신다.

시편 강해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