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편은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의 대관식의 장면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 1-2편이 원래 하나의 시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편 2편의 끝부분이 “복이 있도다” 라는 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시편에 담겨있는 그림은 전혀 다른 그림이다.
시편 1편은 물가에 심기워 결실을 맺는 나무의 모습이지만 시편 2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군대처럼 모여들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많은 군대들과 대치하고 있는 하나님 편은 “기름부음 받은 자” 혼자이다. 하지만 기름 부음 받은 자는 혼자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야’ 이다. 메시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 라는 말이다. 신약성서 기록자들은 이 메시야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인용했다. 이 시편 1편이 복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노래한 것이라면 시편 2편은 어떤 사람들이 멸망할 자들인지를 노래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1절에서 ‘나라들’ 과 ‘민족들’ 이다. 개역은 ‘이방 나라’ 라고 했지만 원어는 그냥 ‘나라들’ 이란 뜻이다. 나라들이 분노한다는 말은 여러 나라의 많은 군대들이 모여들어 큰 소리로 소란을 부리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림이다. 또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라는 말은 민족들이 모여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림이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림과 와 작은 소리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림이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그림은 1절에서는 소리였는데 2절에서는 모양으로 바뀌었다. “세상 군왕들이 나서며” 는 세상의 임금들이 각자 자기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전투대형을 펼치고 메시야를 대적하고 있는 모습이다. 또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는 로마총독과 같은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 메시야를 대적하는 모습이다. 역시 두 그림이 대조된다. 하나는 큰 무리가 모여 전투대형을 펼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무리가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림이다.
3절에서는 1-2절에서 나온 무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행동을 개시한 내용이다. “맨 것을 끊고” 라는 말은 예레미야 22:24절에서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빼어버린다는 말에서 나온 말과 같은 말이다. 족쇄를 벗어버리겠다는 것이다. 또 ‘결박을 벗어버리자” 라는 말은 출애굽기 32:19절에서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던져 버렸다 했을 때 던졌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하나는 빼 내는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던져버리는 그림이다.
저들은 이러한 맨 것과 결박이 자신들을 노예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보호하기 위한 도구이다. 미국에서 보면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서 어린 아이를 개처럼 끈으로 매서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이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호세아 11:4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은 다른 길로 가지 못하도록 매놓고 이끄신 것인데도 악한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같다고 보고 결박을 벗어 던지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도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그림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발전되는 모습을 이어지는 그림으로 표현해서 한도막의 동영상과도 같이 표현한 부분이다. 먼저 4절에서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라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가당치 않은 행동에 기가 차서 헛웃음을 치시는 그림이다. 바로 이어서 ‘비웃으시리로다’ 는 헛웃음을 치신 다음에 말로 조롱하신다는 뜻이다. 5절은 한걸음 더 나아가 “분을 발하여” 라고 했는데 이는 코에서 뜨거운 콧김이 증기 기관차의 연기처럼 나오는 그림이다. 그 다음에는 “진노하사”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온 세상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호통을 치시는 그림이다.
그러나 이처럼 진노하신 하나님의 다음 행동은 정말 놀라운 반전이다. 이렇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직접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진노로 심판하시지 않고 왕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7절에서 이 왕이 직접 나타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 ‘전한다’ 라는 말은 원래 숫자를 센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칙령을 하나하나 세어가면서 선포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시온에 세운 왕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는 말이다. 8절은 이 왕이 구하기만 하면 그 요청을 무조건 다 들어 주시겠다는 말이다.
이제 9절에서 드디어 심판이 선포된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인 메시야는 철장으로 대적들을 깨뜨리는데 질그릇을 깨듯 한다 했다. 이는 삼국지 연의에서 장비가 장판교에서 조조의 대군들을 무찌르는 모습과도 같다. 메시야 혼자서 세상 모든 왕들과 총독들의 군대들을 질그릇 부수듯 하신다는 것이다. 질그릇들이 철장에 맞아 와장창 와장창 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림이다. 이처럼 세상을 심판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은 계시록(2:27; 12:5; 19:15)에도 나와있다. 10절에서는 메시야가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이제 최후의 통첩이다. 듣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질그릇처럼 요란한 소리가 나며 깨어질 것이다.
11-12절은 어떻게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해 준 것이다. 이 것도 역시 연결되는 그림으로 보아야 한다. 첫번째 가져야 할 행동은 “여호와를 경외함” 이다. 먼저 마음으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기라 했다. 두번째 단계는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라고 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감격하여 떨며 진정한 기쁨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단계는 “아들에게 입맞추라” 라고 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발 앞에 엎드려 그 발에 입을 맞추며 복종하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나타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살 것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진노할 것이고 너희가 길에서 망할 것이라 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곧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입맞추라고 한 뒤에 다시 여호와께서 등장하는 것이다. 메시야와 여호와가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라는 말은 원어에서 “그의 콧김에 신속하게 불이 붙을 것이다” 라는 뜻이다. 진노의 콧김이 여호와로부터 나오면 금방 그 콧김에 불이 붙어 모두 다 불살라 버릴 것이라는 말이다. 앞에서는 메시야가 와장창 깬다고 경고했는데 이번에는 콧김에 불이 붙어 모두 다 불살라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경고이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라는 말로 이 시편을 마친다. 여호와를 두려워 섬기며 떨고 즐거워하는 자들이 메시야의 발 앞에 엎드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춘 자들이 이제 메시야의 뒤로 숨은 그림이다. 메시야의 뒤로 피하는 것이 곧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바로 와장창 깨지지 않고 여호와의 콧김에 타지 않을 자들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한 것이다.
마가복음 1:14-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선포하신 말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신약성서의 기록자들은 예수께서 그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오늘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이라” 는 말은 마태복음 3:17에서 예수님의 침례 장면에서 나오고 마태복음 17:5절의 변화산 사건에서도 나온다. 사도행전 13:33 부활을 말할 때에서도 나온다. 세상 왕들과 권력자들이 메시야를 반대한 것은 헤롯과 로마총독의 반대에서 나타나 있고 계시록에도 여러 차례 나온다.
오늘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매신 것과 결박을 끊어버리자 한다. 마음껏 모든 쾌락을 누리고 자유롭게 살자 한다. 오늘날 동성애를 주장하는 자들도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이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박은 인도와 보호를 위한 것이지 노예로 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모두 다 와장창 부서지고 그 진노의 콧김에 다 불타버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엎드려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그 뒤로 피하는 자들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뒤로 피하는 자들만이 복있는 자들이다.
John Martin The Destruction of Sodom and Gomorrah, 1852
https://en.wikipedia.org/wiki/John_Martin_(painter)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cR8MoKunhv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