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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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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6편

시편 16편 기록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2017. 1. 19.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시편 16편 강해 설교

시편 16편 기록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 위기는 죽음의 위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죽음의 위기가 아니다. 그 위기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혼합해서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온 것이다.

1절은 찬양도 없이 다짜고짜 “나를 지켜 주소서” 라고 외친다. 이는 아주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정신없이 쫓기다가 숨을 헐떡이며 지켜 달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지켜달라는 말은 재산이나 양떼 같은 것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잘 지키는 것을 말한다. 밑도 끝도 없이 지켜달라 했기 때문에 그 이유가 나와야 옳다. 그래서 원어에서는 왜냐하면 이란 말이 이어진다. 왜 지켜 달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라고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주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다는 뜻이다.

1절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해하면 자신을 죽이려는 대적들을 피해 정신없이 하나님께로 피하는 모습이다. 그 모습은 마치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는 모습과도 같다. 이사야 4:6절에서도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 이라는 부분에서 같은 말이 나온다. 시편 기록자는 뜻하지 않은 비바람 같은 위기를 만나 하나님의 그늘 아래로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짜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가는 모습이 아니다. 이어지는 내용에는 시편 기록자를 죽이려는 대적이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맥을 통해 살펴보면 이 위기는 육신적인 위협이 아니라 영적인 위기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영적 위기가 무엇인가? 이어지는 2절에 나온다.

2절은 시편 기록자 자신의 말이 아니라 가상의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편 기록자와 대화하는 사람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대표로 나선 한 사람이다. 먼저 2절에서 이 사람은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 밖에는 자신에게 좋은 일은 없다고 말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만이 진짜 좋은 것들이라는 말이다. 참으로 신실한 신앙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이어지는 3절도 역시 시편 기록자와 마주 대화하고 있는 사람의 말이다. 물론 실제 대화가 아니라 시편 기록자가 상상의 인물과 대화한 내용이다. 이번에는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라고 했다. 성도들이란 말은 원어에서 거룩하다는 뜻의 복수형인 ‘카도쉼(קדושימ)’ 이다. 카도쉬(קדוש) 라는 말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룩한 사람들을 가리킬 킬 때에는 카도쉬를 쓰지 않고 주로 “하시드(הסיד)” 를 썼다.

시편 89:5-7에서도 카도쉼이 나온다. 이는 신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신들의 모임 중 어떤 신들도 하나님 같은 신이 없다라는 뜻으로 나온다. Craigie도 3절의 카도쉼은 신들을 가리키는 말이라 해석했다(Peter Craigie, 157). 그런데 땅에 있는 카도쉼이라 했기에 땅에 세워진 우상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시편 전체의 문맥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게 해석해야 말이 된다. 그렇다면 2절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이고 3절은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섬기던 땅에 있는 우상들에 대한 견해를 말한 것이다.

이러한 우상들은 존귀한 자들이라 했다. 존귀한 자들이란 말이 사람을 가리킬 때에는 권력을 가진 귀족들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나훔 2:6; 3:18). 그런데 이 말은 시편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그렇다면 주변 나라에서 섬기던 신들도 권능을 가진 신들이라는 뜻이다. 시편 기록자의 가상의 대화 상대자는 하나님외에는 좋은 일이 없다고 한 그 입으로 이번에는 다른 신들도 권능을 가진 신들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 사람은 이러한 신들을 향해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라고 했다. 즐거움이란 말은 하나님이나 사람을 만나 느끼는 기쁨의 감정을 뜻하는 말이다. 창세기 34:19절에서 세겜의 아들 하몰이 야곱의 딸 디나를 사랑함이라고 한 말에서도 같은 말이 나온다. 하몰이 디나를 보고 기쁨의 감정이 막 용솟음쳐 올랐던 것을 묘사한 말이다. 또 삼상 18:22절에서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하기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라는 말에서도 나온다. 따라서 이 말은 사람이나 하나님을 만날 때 기쁨의 감정이 마구 솟아 오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 나의 주님이시고 최고 좋은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 라고 말한 것이고 바로 이어서 “이방신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쁨이 용솟음 쳐 오르지!” 라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양다리도 이런 양다리는 없다.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이방신들을 함께 놓고 양다리를 걸치다니…. 그러나 양다리 정도가 아니다. 표현된 감정을 비교해 보면 하나님은 좋다 라고만 했다. 그러나 이방 신들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즐거움이 넘친다 했다. 그렇다면 말로만 하나님이 좋다고 한 것이고 사실은 이방신들이 더 좋다는 뜻이다.

이러한 양다리는 출애굽기에서부터 말라기까지 끊임없이 나온다. 가나안의 이방신들을 섬기는 일은 많은 경우 음란한 성행위와 연결되었다. 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 성행위를 하면 신들도 자극을 받아 성행위를 하게 되어 비가 내린다고 했다. 따라서 이러한 이방신들을 섬기기 위해 음란한 성행위를 드러내 놓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훌륭한 신앙고백을 해 놓고는 이방신들은 즐거움이 그들에게서 온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답변을 들은 시편 기록자는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이는 그 사람 뿐 아니라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과 가까이 하면 자신도 그렇게 영적으로 죽게 될까 염려하여 정신없이 하나님께 피한다고 1절에서 말한 것이다.

4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이러한 자들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그 경고는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라는 말이다. 원어는 “슬픔은 많아질 것이다”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앞에서 다른 신들을 보면 연인을 만난 듯 기쁨이 가득하다 했기 때문에 이런 자들에게는 기쁨대신 슬픔이 아주 많아질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이는 마치 남편과 사는 것이 실증이 나서 젊은 애인을 만나는 여인에 비교할 수 있겠다. 이 여인은 남편보다 젊은 애인이 너무 좋아서 즐거움이 그에게서 나온다 라고 외친다. 그래서 남편과 이혼하고 젊은 애인과 결혼하려는 여인에게 “슬픔이 아주 많아질 것이다” 라고 경고하는 것과도 같다. 전보다 더 나빠지고 악몽 같은 삶이 될 것이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들” 이라 번역된 말은 원어에서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첫째로 정신없이 서둘러 달려간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젊은 애인이 너무 좋아 정신없이 서둘러 그에게 달려가는 것처럼 이방신들을 경배하는 곳에 가려고 정신없이 서둘러 달려가는 것이다. 영어의 ESV, NIV, NLT, RSV 등은 서둘러 달려간다는 뜻으로 번역했다. 이는 다른 신들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쁨이 있다 라고 한 말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또 다른 뜻은 맞바꾼다는 뜻일 수도 있다. 히브리어는 본래 자음만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맞바꾼다는 말은 결혼 지참금이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고대 근동에서 며느리를 맞아 들이면 딸을 며느리로 준 그 부모에게 돈을 보냈다. 딸을 돈과 맞바꾼 것이다. 앞에서 하나님도 좋지만 다른 신들은 기쁨이 있다 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다른 신들과 맞바꾼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영어의 NASB나 Revised Version은 맞바꾸었다 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같은 말에서 온 말이 시편 106:20절에서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라는 말에서도 나온다.

구약에서 우상숭배를 간음으로 비유해서 말한다. 간음의 비유로 양다리 걸친 사람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말이다. “남편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의 남편이고 남편 밖에는 나에게 좋은 것이 없다” 라고 말한 뒤 “젊은 애인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젊은 애인에게 있다”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말로는 하나님이 좋다고 해 놓고는 우상에게 정신없이 달려 가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우상과 맞바꾸어 버린 것이다. 정신없이 달려간다 해도 말이 되고 맞바꾸었다 해도 말이 된다. 그런 자들에게는 기쁨 대신 슬픔이 많이질 것이라는 것이다. 신실한 남편을 버리고 젊은 남자 만나 눈이 맞아 남편과 이혼하고 젊은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좀 있으니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좋은 남편 버리고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결혼 했는데 날마다 명태 두들기듯 두들겨 맞는 상횡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경고를 한 시편 기록자는 4절 뒷부분부터 11절까지 자신의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먼저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라고 했다. 신들에게 피의 전제를 바치는 것은 그 신들을 경배하는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라는 말은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러한 우상들에게 경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름조차도 자신의 입술에 올리지 않겠다 한 것이다. 왜 다른 신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겠다고 하는가” 5절에 답이 나온다.

5-8절은 땅을 분할해서 나누어주는 그림으로 보통 이해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앞에서 나온 이방신의 제사에서 받는 좋은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좋은 것을 비교해서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첫째 “여호와는 나의 산업” 이란 말은 원어로 직역하면 “주님은 나의 받을 몫 중 최고의 부분입니다” 라는 뜻이다. 받을 몫은 유산일 수도 있지만 또한 자기 몫으로 받을 최고의 포도주 같은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둘째로 “나의 잔의 소득” 이라고 한 것이다. 최고 좋은 포도주를 받는 그림을 잃지 않게 하려고 또 “잔입니다” 라고 한 것이다. 최고 좋은 포도주를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기에 주께서 주실 잔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이다. 이는 “주님은 나의 제비를 뽑아 쥐고 계십니다” 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할 때 제비를 뽑았다.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할 때에도 제비를 뽑았다. 하나님께서 최고의 땅을 주시려고 이미 결정된 표를 쥐고 계신다는 것이다. 최상품의 포도주를 선물로 주시려고 이미 물표를 쥐고 계신다는 뜻이다.

6절은 계속에서 땅을 분배하는 그림언어로 이어진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줄로 재어서 나에게 떨어진 것은 기쁜 것이다” 라는 뜻이다. 땅이라면 기름진 땅이 아름다운 땅이기에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이어서 그 받은 것을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라고 했다. 이는 재어준 몫이 빛나도록 아름답다는 것이다. 만약 받을 음식이라면 자신에게 정해 준 몫이 정말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축복을 그림언어로 표현한 것 뿐이다.

7절을 보면 그 그 아름다운 기업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7절은 원어에서 먼저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라고 말한다. 유산이 무엇인지 밝히기보다 먼저 찬양을 한 것이다. 받은 유산이 너무 좋기 때문에 기쁜 마음에 먼저 찬양을 한 것이다. 마치 최고로 좋은 선물을 부모님께 받았을 때 먼저 부모님께 감사하다 말하는 것과도 같다. 만약 감사도 없이 선물만 들여다 보며 좋아하면 괘씸죄에 걸려 다시는 못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먼저 찬양을 한 것이다. 그 유산이 무엇인지 찬양 뒤에 이어진다. 그 유산은 “나를 훈계하신 분” 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조언을 해 주신다는 뜻이다.

또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라고 했다. 앞에서 훈계란 조언을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 교훈이란 익숙해지도록 반복해서 훈련시킨다는 뜻이다. 내 양심이란 원어에서 내 콩팥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콩팥에 양심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어는 콩팥 대신 심장이라고 번역했다. 영어 사용자들은 심장에 양심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한 자녀를 책망하며 바르게 할 수 있도록 계속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시편 기록자가 잠자리에 들어서 하루 일을 자신의 콩팥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 콩팥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자신을 깨닫게 하고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훈련시킨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빛나는 유산이다.

4절에서 그 입에 다른 신들의 이름을 올리지도 않겠다고 한 것은 바로 콩팥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콩팥과 입술이 무슨 관계가 있나? 고대 히브리인들은 성경책이 없었다. 가르치는 이가 말로 불러주면 입술로 받아서 반복해서 낭송하여 암기 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자신들의 입술로 받아 입술에 잠시 보관하기에 앞에서 잔의 소득이라 한 것이다. 우리도 전화번호 같은 것을 잠시 외울 때 중얼거리면 단기 메모리에 일시적으로 저장된다. 그것이 입술로 말씀을 받는 것이다. 그것을 계속 반복해서 암송하면 다음에는 콩팥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존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암송해야 할 잔인 입에 더러운 신들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다는 뜻이다.

말씀만 마음 속으로 되새기는 것이 아니기에 8절에서 시편 기록자는 먼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이라고 말한다. 원어는 나는 언제나 하나님을 내 앞에 놓습니다 라는 뜻이다.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말씀을 따라 걷기 위해 하나님을 자신의 앞에 놓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하나님을 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콩팥에 저장된 말씀을 자신의 앞에 두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 주신 말씀을 자신의 앞에 놓고 그대로 그 뒤를 따라간다는 뜻이다.

이어서 그 이유가 이어진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의 오른 쪽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갑자기 그림이 뚝 끊어진다. 마치 옛날 시골에서 영화 상영할 때 불이 꺼지고 필름이 끊어졌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에 두고 따라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의 오른 손을 잡고 이끌어가시기 때문이다. 시편 기록자는 하나님의 뒤에서 따라가려고 했다. 군대나 사회에서 상급자를 수행하는 방법은 한걸음 뒤의 약간 측면에서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시편 기록자에게 돌아서셔서 시편 기록자의 오른손 잡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란이 걸으시며 함께 대화하시며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잡혀 이끌려 사는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표현한 것이 9절이다. 9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이어진다. 뒤따라 가기로 작정했는데 하나님께서 시편 기록자의 오른 손을 잡아 이끄시며 보여주신 것은 세단계로 나온다. 첫째는 그 마음이 기쁜 것이다. 기쁘다는 말은 주로 좋은 포도주나 향료나 지혜로운 아들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할 때 쓴 말이다. 친절한 말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눈이 번쩍 뜨이며 기뻐 어쩔 줄 몰라할 때 쓴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면서 보여주시는6 것들이 너무 좋아서 눈이 번쩍 뜨이고 그 마음이 기뻐 어쩔줄 몰라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영도 즐거워하며” 이다. 원어에서는 “나의 영광은 즐거워하며” 라는 뜻이다. 나의 영광이란 살아있는 존재 자체를 말한다. 앞에서는 마음만 기뻐한 것인데 이젠 나의 살아있는 존재 자체가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기뻐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빙빙 돌며 춤을 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기뻐하다가 그 존재 자체가 너무 기뻐 빙빙 돌면서 춤을 춘다는 것이다.

셋째는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란 말은 “내 육체도 안전하게 터잡고 산다” 라는 뜻이다. 자신의 마음이 기뻐했고 자신의 영광이 함께 춤을 추었고 마지막엔 자신의 몸도 안전한 곳에서 터잡고 산다는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께로 허겁지겁 피하던 모습에서 이젠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안전하게 터잡고 사는 그림으로 바뀐 것이다.

10절은 어째서 그렇게 안전하게 거하는지 이유를 말한 것이다.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라고 했다. 9절의 영이란 말은 “나의 영광” 인데 10절에서 “내 영혼” 이란 원래 원래 목구멍이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이 말도 살아 숨쉬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편 기록자의 그 존재 자체를 스올에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또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임이니이다” 라고 했다. 이는 당신의 ‘하시드(הסיד)’ 가 썩는 것을 보게 두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이는 9절에서 육체가 안전히 터잡고 산다는 말과 연결되는 말이다. 여기서 거룩한 자라는 말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주로 성도라고 번역된 말이고 3절에서 성도들이라고 번역된 카도쉼이라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이렇게 지켜 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11절에서 분명하게 보여준다. 11절은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주시니” 라고 했다. 보여주신다는 말은 알려주신다는 뜻이다. 시편 기록자의 오른 손을 잡고 이끌어 주시던 하나님은 앞으로 갈길을 당신의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며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 마치 아들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앞으로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말해주는 것과도 같다. 생명의 길이란 말에서 길이란 고속도로 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고속도로가 아니라 고대의 마차와 말들이 다니던 길을 말한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어느 길인지 알려 주신 것이다.

이어서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라고 했다. 원어는 기쁨의 충만함이 당신의 얼굴 앞에 있다 라는 뜻이다. 기쁨의 충만함이란 마음에 기쁨이 가득 채워져서 기쁜 것을 말한다. 이는 9절의 기쁨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포도주나 향료나 현명한 아들처럼 기쁨을 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기에 그 기쁨이 충만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라고 했다. 여기서 즐거움이란 사무엘하 1:23절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부자관계가 아주 친밀했다고 할 때 나온 말이다. 사무엘하 23:1절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이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나타낸 말로 쓰였다. 아가에서는 연인을 보고 기뻐하는 때도 이 말을 썼다. 따라서 오른 팔에 하나님을 잡고 그 친밀한 관계 때문에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처음으로 잡고 함께 걸으며 기뻐하는 그림과도 같다. 이 시편의 마지막 장면은 석양 무렵에 아름답게 비치는 들판으로 난 길을 하나님과 어린아이인 시편 기록자가 손을 잡고 서 있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멀리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아이는 하나님께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아이의 손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다.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이의 손을 통해 아이의 마음에 전해지며 그 친밀하고 따뜻한 사랑이 화면에 가득찬다.

우리에게도 영적인 위기가 진정한 위기이다. 우리의 영적 위기도 역시 시편 기록자처럼 혼합주의이다. 오늘날 혼합주의는 과거처럼 눈에 보이는 우상과 하나님의 혼합이 아니다. 오늘날 믿는 자들은 말로는 “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이 진정한 복이다” 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하나님을 생각해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 것이 현대판 혼합주의이다. 하지만 이러한 혼합주의자들은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다면 가슴이 설레이고 기뻐하면서 좋아한다. 그리고 서둘러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 하나님과 맞바꾸더라도 그러한 것들을 잡으려 한다. 평신도만이 아니라 목회자들도 똑같이 그렇게 한다.불나방처럼 바람난 사람처럼 정신없이 서둘러 달려간다.

초대교회에서 이 시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메시야적 시편으로 이해되었다. 이 시편은 다윗의 시인데 다윗은 곧 메시야의 모형으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이 시편도 메시야에 관한 시편으로 이해되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행 2:25-28) 바울이 안디옥 회당에서 설교할 때도(행 13:35) 인용되었다.

요한복음 1: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수 그리스도라 했다. 바울도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라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오른 손으로 잡아야 할 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다. 그러면 어떠한 혼합주의적 유혹들도 우리를 삼키지 못한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길이 진정한 생명의 길이기에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오른 손으로 붙잡고 함께 걸어야 한다. 그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 길을 바라보며 그 분의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친밀감을 느끼며 따라가야 한다. 절대로 말로는 예수가 좋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즐거움을 붙잡고 바람난 여자(남자)처럼 달려가면서 기뻐 춤추면 안된다.

사진출처: pixabay fre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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