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은 내 아들아 라는 말로 시작하고 2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3;11절도 내 아들아 라는 말로 시작하고 12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자신이 전하는 주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고 마음으로 지키라는 것이다. 1:8절에서는 잘 들으라 했다. 1:20-33절은 지혜가 쫓아 다니며 들으라고 귀따갑게 외쳐댔다. 2:1절에서는 받고 보물처럼 잘 간직하라 했다. 이제 3:1절에서는 머리로 잊지 말고 가슴에 간직한 보물 같은 말씀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끼어 있는 말씀은 어떻게 잘 지킬 수 있는지를 말한 것이다.
1-4절은 이미 머리로 기억한 것을 잊지 말고 마음 안에 잘 간직한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키라는 것이다. 3:1절의 나의 법이란 2:6절에서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 법은 잠언의 기록자의 법이 아니고 주님의 지혜와 지식과 명철이다. 법이란 토라인데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머리로 기억하고 잊지 말라는 것이다. 또 명령이란 말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말한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는 가슴 안에 잘 보관하고 아무도 훔쳐가지 못하도록 잘 지키라는 것이다. 머리로만 기억하는 것으로는 안된다. 그 말씀의 권위를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 말씀을 머리로만 기억하고 가슴으로는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마음에 안드는 직장 상사를 머리로는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가슴으로는 완전히 무시하는 것과도 똑같다.
2절에서는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장수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복이 아니다.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며 장수하는 것이 바로 복이다. 이는 마치 신명기 5:33절에서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라는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만약 하나님과 평화가 없이 장수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3절의 인자와 진리는 1절의 법과 명령을 다른 말로 바꾸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법과 명령들을 목에 매고 다니라 했다. 이는 구슬과 같이 따로 따로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줄줄이 꿰어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라는 것은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항상 함께 하라는 뜻이다. 또 마음 판에 새겨두라는 것도 그 말씀의 권위를 항상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고 늘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이다.
그러면 얻을 수 있는 것이 4절에 두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은총’ 이다. 은총이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마음 깊이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을 마음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늘 목에 걸고 다니고 마음 판에 새겨두며 따라가면 그렇게 하나님 뜻에 따라가기 위해 고생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했다.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좋은 이해 또는 좋은 현명함이란 뜻이다. 말씀에 따라 사는 행실을 보고 그런 사람들의 숨겨져 있는 진가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사무엘상 25:3절에서 아비가일이 총명하다 한 말과 같은 말이다. 행실을 보고 그 사람의 진가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미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길 뿐 아니라 우리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보고 존경심을 갖고 대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만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알아본다는 것이다.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도 이런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람들도 존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과도 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5절에서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와 대조되는 것은 너의 명철 즉 자신의 생각이다. 명철이란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식에 근거해서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물 위로 뛰어내렸을 때는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을 근거해서 생각할 때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에 따라서 행동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2:5-8절에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여호와만 전적으로 의지했다면 그 다음에는 여호와를 따라 길을 가는 것이다. 6절의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는 말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네 모든 길에서 여호와를 알라는 뜻이다. 물론 길이라는 말은 우리 삶의 길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길을 선택할 때 여호와를 인식하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권리와 권위를 인식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아닌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면 그 분께서 너의 길을 곧게 하실 것이라 했다. 길을 곧게 하신다는 말은 구부러진 길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다. 바른 길은 하나님의 길을 뜻하고 구부러진 길은 악한 자들의 길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악이 틈타지 못하도록 그러한 사람들 앞길에 있는 악을 제거해 주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의 반대말은 7절의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라는 말이다. 여기서 지혜란 경험을 통해 익힌 지혜를 뜻한다.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여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 자체가 악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라고 했다. 주님을 두려워하며 그분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경배하는 삶을 산다면 자신의 지혜를 따라 살지 않을 것이다.
이어 7절 끝부분에 나오는 “악을 떠날지어다” 라는 말은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따라 사는 것에서 완전히 떠나라는 말이다. 떠나라는 말은 그 동안 따라가던 자신의 경험을 따라가던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나오라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따라 사는 것이 악한 길인지 알지도 못하고 따라간다. 그래서 잠언의 기록자는 그것이 바로 악이라고 경고하면서 악을 악인지도 모르고 따라가는 그 길에서 즉시 돌아서 나오라는 것이다. .
악한 길을 따라가던 아들은 영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아픈 상태이다. 이런 아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나온다면 8절처럼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라고 했다. 이는 원어에서 네 탯줄이 치료될 것이라는 뜻이다. 탯줄이란 생명 줄이다. 탯줄을 통해 어머니의 몸에 연결되어 전체가 사는 것이다. 그 탯줄이 많이 상했으나 돌아서면 그 탯줄이 회복될 것이란 뜻이다. 주석가들은 탯줄이란 몸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썼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할 때 원어가 담고 있는 그림이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과 연결된 줄이 회복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뼈로 하여금 물을 마시게 한다는 뜻이다. 윤택하게 한다는 말은 본래 목이 마른 가축에게 물을 마시게 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이는 말라붙은 뼈가 생명의 시냇가에 와서 물을 마신다는 뜻이다. 바싹 말라 물기 하나 없는 뼈는 큰 고통이다. 관절의 미끈액이 다 말라붙어 관절마다 아파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도 악한 길에서 돌아 나오면 그 뼈 마디마디 마다 물기가 흘러 넘쳐 부드럽게 움직이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치료는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뼛속까지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해 주신다는 뜻이다.
그렇게 탯줄에서 뼛속까지 다 새롭게 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9절처럼 “여호와를 공경하라” 를 시행해야 하는 것이다. 뼈속까지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그렇게 새롭게 된 속사람의 모습을 예배를 통해 겉으로 드러내라는 뜻이다. 여호와를 공경하라는 말은 주 여호와를 사회적으로 높이라는 뜻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은사에게 전화를 건 일이 보도가 되었다. 만약 직접 찾아가서 절하고 감사를 표시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선생님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높여줄 것이다. 주를 공경하라는 것은 이처럼 주님을 찾아가서 경배하고 예물을 드려서 높여드리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도 여호와를 인정하고 공경하게 될 것이다.
드릴 예물은 먼저 “네 재물”이다. 재물이란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귀금속 같은 것을 뜻한다. 자신의 소유 중에서 귀한 보물을 드려 주님을 높이라는 것이다. 또 “네 소산물” 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했다.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란 곡식이나 과일 뿐 아니라 가축들도 포함될 수 있다. 소산물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보물과 자신이 생산한 것들 중에 가장 귀한 것을 직접 드려서 높여 드리는 것이다.
10절은 그렇게 하나님을 공경할 때 받는 복이다. 그 복음 먼저 네 창고가 가득히 차는 복이다. 창고에 가득히 차는 것은 밀과 보리 같은 곡식과 콩 종류들이다. 이스라엘에서 보리는 4월초에 거두고 밀은 5월 말에 거둔다. 또 포도는 9월 말에 거둔다. 따라서 창고에 가득차는 것과 포도즙이 넘친다는 것은 시간 순서로 기록한 것이다. 일년 내내 때를 따라 이렇게 풍성하게 주신다는 것이다.
포도즙틀이란 바위를 1x2m정도로 파낸 곳에 포도를 넣고 발로 밟는 부분과 그 아래에 도랑으로 연결된 커다란 욕조나 작은 풀장 같은 곳으로 되어 있다. 위에서 포도를 넣고 밟으면 포도즙이 흘러 아래 욕조로 흘러 내려간다. 포도즙이 모아지는 욕조는 수확량보다 훨씬 크게 만들어져있다. 그런데 생산량이 예상보다 훨씬 많아서 욕조가 흘러 넘치는 그림이다. 마가복음 10:29-30절에는 이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사람에게는 백배로 갚아 주시겠다 하셨다.
11절은 1절과 똑같이 “내 아들아!” 라는 말로 시작한다. 1:8절에서는 아비의 훈계라 했는데 11절에서는 이 훈계가 “여호와의 징계”로 바뀌었다. 원어에서는 훈계나 징계는 같은 말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반복해서 익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은 결국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훈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거부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이와 짝을 이루는 말은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는 것이다. 꾸지람이란 언약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언약을 깨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결 같은 사랑으로 참아주셨다. 참다 못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하게 꾸지람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 꾸지람이란 말의 뜻이다.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을 계속 시켰는데도 듣지 않고 거역할 때는 심하게 꾸지람하기 마련이다.
또 싫어한다는 말은 그냥 싫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혐오감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우상숭배하고 자녀를 불에 태워 제사드리던 가나한 사람들을 혐오하던 하나님의 마음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꾸지람을 그렇게 몸서리치며 혐오하지 말라는 뜻이다.
12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왜 그렇게 하나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란 뜻이다. 왜 그렇게 하나님의 꾸지람을 몸서리치며 싫어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이란 뜻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신다 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훈계를 하고 듣지 않으면 심하게 꾸지람도 하신다는 것이다.
진주 같은 하나님의 지혜를 머리에 모아 놓은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 진주들을 실로 꿰어 항상 목에 걸고 다니며 그 말씀의 권위를 항상 마음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 말씀을 의지하고 우리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도둑질 살인 강도가 악한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내 지식과 내 경험으로 내인생 길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악한 길이라는 것이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Woman with a pearl necklace. Postcard from 1917. Publisher: C. W. Faulkner & Co. Lon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