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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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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verbs

잠언 1:20-33

잠언은 도막 도막 끊어져 있는 좋은 말씀들로 알지만 사실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2017. 5. 9. · 안정섭 목사 · 페이스북 원문 · 잠언 1장 강해 설교

잠언은 도막 도막 끊어져 있는 좋은 말씀들로 알지만 사실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연결된 고리를 놓치면 중요한 요점을 놓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바로 앞에서는 부모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훈련을 받아서 악한 자들에게 속아넘어가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부모님께 배우던 십대 청소년은 이제 부모님을 거역하고 길거리로 나간 상황이다. 이젠 다 컸다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부모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이다.

잠언 1:20-33절은 집에서 가출한 다 큰 청소년에 대한 경고로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의 훈련과 어머니의 가르침이 듣기 싫어 가출했지만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어디에 가도 계속해서 선포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피할 길이 없다. 받아 들이고 지혜로운 자가 되든지 아니면 거부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 중간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선택의 기회가 지나가면 죽음과 심판이 오고 두번 다시 기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짧은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돌아서라는 것이다.

20-23절은 격분한 지혜가 집을 뛰쳐나온 어리석은 청년에게 주는 강력한 경고이다. 아버지의 훈련과 어머니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이 청년이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며 20절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청년은 부모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길거리로 뛰쳐 나왔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라고 했다. 지혜라는 말은 여성형 명사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여성에 비유하여 한편의 드라마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구약성경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 가면서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그른지 알려주는 것이다. 이 청년의 집 앞 골목에서부터 지혜는 큰소리로 부른다 했다. 그러나 상냥한 여인의 목소리가 아니다. 듣지 않으면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앙칼지게 울부짖는 외침이다.

청년은 귀를 틀어막고 골목을 빠져나가 광장에 이른다. 광장이란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 공터인데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건을 판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 라는 여인은 그곳에도 쫓아와서 그 목소리를 높인다. 하나님의 지혜는 골목에서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이 청년에게 외친다. 부모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라고.

21절에서 청년은 또 귀를 틀어막고 달린다. 더 달리면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기에 광장을 빠져나와 큰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시끄러운 길 머리에 이르렀다. 길 머리란 길의 꼭대기라는 뜻이다. 고대의 근동의 도시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그 길의 꼭대기는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들이 있는 번화한 중심가이다. 그래서 시끄러운 길 머리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라는 여인은 거기까지도 이 청년의 뒤를 쫓아왔다. 길 머리는 길의 꼭대기는 사방으로 갈라져 내려가는 길의 시작 부분이다. 이제 지혜는 그 높은 곳에 서서 그 도시 전체에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선포하고 있다.

듣기 싫었던 청년은 다시 귀를 막고 오던 길을 내려가 이번에는 광장을 지나 성문을 빠져나갔다. 성문 밖에 나가면 더 이상 따라오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달린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그곳에도 쫓아가서 말을 전한다. 성문 어귀는 경비병이 서서 지키면서 악한 범죄자들이나 창녀들은 못 들어가게 막던 곳이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양아치들과 창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또 성문 어귀는 그 도시의 장로들이 앉아서 재판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솔로몬의 지혜의 말씀은 성전에서 낭독되던 말씀이 아니다. 골목이나 시장이나 다운타운이나 성문 어귀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선포되던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처럼 어디서나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다른 세상 지혜들은 학자들에게만 전달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누구나 다 듣도록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못 들었다 못 배웠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청년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꼼작없이 지혜가 선포하는 경고를 들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 지혜가 선포한 경고가 22-23절에 나온다. 22절에서 “어리석은 자들” 이라고 했다. 이는 1:10절의 악인의 꾀를 따라가는 미숙한 청년을 말한다. 8:5절에 보면 지혜에게서 꼭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어리숙한 사람들이라 했다. 어리숙한 자들은 지금 지혜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망하게 될 사람들이다. 그래서 집을 뛰쳐나온 청년에게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라고 외친 것이다.

원어는 “어리석은 자들아, 언제까지 어리석은 것을 좋아하려느냐?” 라는 질문이다. 호격과 동사가 같은 말로 되어 있어 영어의 동족 목적어(cognate object)를 사용한 문장과 비슷한 강조법이다. 좋아한다는 말은 갖고 싶어하며 사랑한다는 뜻이다. 신명기 11:16절에 보면 “유혹을 받고 마음이 변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그 신들 앞에 엎드려서” 라고 했다. 당시 유대인 청년들은 우상의 신전에 가면 맛보지 못한 돼지고기도 먹을 수 있고 우상 신전의 여 제사장들과 성행위도 할 수 있다. 물론 예배의 행위이므로 당당하게 행할 수 있다 이 청년은 결국 부모님이 가르치는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이방인들이 즐기는 향락의 삶을 즐기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어 나오는 거만한 자들과 미련한 자들은 어리석은 자와는 대조적으로 이미 악한 자들이고 구제 불능인 자들이다. 이들은 어리숙한 청년을 꾀려 하는 자들이다. 흔히 부모님들은 우리 아들은 착한 아들인데 나쁜 친구들을 사귀어서 나쁜 길로 빠졌다고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여기서 나쁜 친구가 바로 거만한 자들과 미련한 자들이다. 친구의 꼬임에 넘어간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거만한 자들이란 겸손한 사람의 반대말로 교만한 사람들이다. 역시 “거만한 자들아 언제까지 거만을 기뻐하겠느냐?” 라는 질문이다. 이들은 우상숭배와 성적 쾌락에 빠져 있으면서 하나님을 따라 재미없게 사는 경건한 청년들에게 콧방귀를 뀌며 비웃는 자들이다. 기뻐한다는 말은 갖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잠언 6:25절에서 “네 마음에 그런 여자의 아름다움을 탐내지 말고” 라고 할 때 탐낸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는 갖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한눈에 반해 갖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미련한 자들이란 예레미야 10:8절의 우상숭배자들이다. 여깃 “미련한 자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겠느냐?” 라는 질문이다. 잠언 4:18-19에 보면 의인의 길은 동틀 때부터 점점 밝아지는 햇살과 같다 했다. 그러나 악인의 길은 캄캄하다고 했다. 이들은 눈이 캄캄하여 올바른 길과 행위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없다. 18:2절을 보면 이들은 명철을 좋아하지 않고 자기들 의견만 내세운다 했다. 1:29절을 보면 이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1:32절에는 저들의 마지막은 멸망이라고 했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러한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악의 초보자이다. 거만한 자들은 악의 중간단계에 있는 자들이라면 미련한 자들은 악의 종결자이고 악의 최고수이다. 이들은 지식을 미워한다 했다. 미워한다는 말은 사랑의 반대이다. 지식이란 말은 안다는 말에서 온 말인데 하나님의 지식을 아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식을 듣고 기뻐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악한 자들의 죄이지 세상 기준의 범죄행위가 아닌 것이다. 믿는 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이러한 세종류의 악인들인 것이다.

지혜라는 여인은 지금 분노에 차 있다. 그래서 이 어리석은 청년과 청년을 유혹하려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은 들을 생각이 없다. 오직 기름기에 감칠맛이 가득한 돼지고기와 아름다운 여인과의 잠자리에만 꽂혀있다. 지혜가 분노에 차서 앙칼진 소리로 외치고 있지만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지혜는 23절에서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라고 한 것이다. ‘책망’ 이란 단어는 언약과 관련된 단어이다. 문자적인 뜻은 무엇이 옳은가 판단하는 것이다. 부부간에도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혼인 서약에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비추어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끊임없이 깨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지혜로 사랑의 책망을 하시는 것을 뜻한다. 3:12절에 보면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라고 했다. 이러한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돌아선다면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부어준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사막지역에 있는 와디와 관련된 그림언어로 이해해야 한다. 와디는 평소에는 그냥 골짜기이다. 사막이기에 웬만한 비가 와도 그냥 흡수되고 만다. 그런데 지중해 연안의 장마철인 겨울철이 되면 엄청난 양의 비가 단기간에 쏟아진다. 그래서 마른 골짜기에 갑자기 강물이 흘러 홍수가 날만큼 쏟아 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쏟아 부어 주신다는 말도 그렇게 엄청난 양의 말씀을 쏟아 부어 주신다는 것이다.

영을 부어주신 다음에는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라고 했다. 보인다는 말은 22절에서 저들이 미워하는 지식에서 지식과 같은 말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영을 부어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악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배우려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하나님 말씀에 관심이 없고 악인들의 꼬임에 넘어간 자들이다.

24-25절은 저주 받은 어리석은 자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24절은 그렇게 간절히 돌아서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부름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악인들의 모습이 나온다. 24절의 “내가 부를찌라도” 라는 말은 21절의 시끄러운 길 머리에서 외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큰 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었는데도 악인들은 끝까지 거절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외쳐도 거절했다는 말과 짝을 이루는 말은 하나님의 지혜가 손을 내밀고 계셨어도 거들떠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손이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이다. 이사야 65:2절에서 하루종일 팔을 벌리고 거역하는 자들을 기다렸다는 말과 같은 말은 아니지만 같은 그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등지고 돌아선 이들이 위기에 처해 뒤로 넘어지면 언제든지 받겠다는 동작이다. 이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나타낸 그림이다. 비록 미련한 자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갈지라도 간절히 부르시며 언제든지 위기의 순간에는 받을 준비를 하고 계신 것이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서 제멋대로 걸어가는 아들을 뒤따라가며 뒤로 넘어지면 받을 준비하는 부모의 모습과도 같다.

25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고 있는 미련한 자들의 모습이 나온다.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라는 말에서 교훈이란 아직 일이 벌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언하는 것을 듣지 않고 콧방귀를 뀌는 모습이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그렇게 하면 안돼!: 라는 교훈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다” 라는 말은 일이 일어난 뒤 하는 책망이다. 이는 23절에서 언약에 근거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받지 않고 거절하는 모습이다. 잘못을 저지른 아들에게 부모님이 꾸짖는데도 듣지도 않고 거역하는 모습과도 같다.

이제 하나님의 지혜도 더이상 기다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도 인내도 끝이 났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멸망해야 할 원수들인 것이다. 그래서 26절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이러한 악인들이 갑작스러운 재앙을 만나는 것을 보고 웃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웃음은 악인들이 재앙을 만나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시는 것이 아니다. 악인들이 멸망함으로 악인들의 손에 잡혀있던 의인들이 악인들의 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웃는 웃음이다.

또 이와 짝을 이루는 부분은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라는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이 여러번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신명기 2:25절에서도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두려워 한다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함께 하셔서 계속 여러 민족들을 쳐서 이기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다른 민족들에게는 재앙인 것이다.

그러한 재앙을 보고 두려워 떠는 악인들의 모습은 의인들에게는 승리의 환호인 것이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고 비웃으신다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용사들이 환호성을 외치는 것과 같은 웃음이다. 이제 하나님은 의인들과 함께 환호성을 외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하나님의 지혜는 의인들의 승리를 보고 웃으시고 환호성을 함께 외치시는 것이다.

27-28절은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하시는 이유이다. 그 이유는 심판의 때에 그들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26절에서는 재앙이 먼저 나오고 두려움이 나중에 나오지만 27절에서는 반대로 두려움이 먼저 나오고 재앙이 나중에 나온다. 강도가 약한 재앙이 바깥쪽에 위치하고 그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이 안쪽에 샌드위치의 햄처럼 배치한 것이다. 그 두려움은 광풍처럼 덮친다 했는데 마치 나치 정권 하의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대기 중인 사람들의 두려움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 약한 재앙은 폭풍처럼 밀려온다 했는데 이는 벤허에서 나오는 전차같은 전차 군단이 덮쳐오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27절 끝부분에 있는 근심과 슬픔은 이러한 악인들이 두려움과 재난을 만났을 때 당하는 상황이다 근심이란 좁은데에 꼼짝 못하고 끼어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슬픔이란 좁은데 끼어 있는 가운데서 짓밟히는 그림이다. 근심이란 올리브 오일 짜는 틀에 올리브를 가득 넣은 그림이라면 슬픔이란 돌로 짓이기고 눌러서 기름을 짜 내는 것과 같은 그림이다. 악인들이 그렇게 좁은 곳에 던져져서 짓눌려 피와 기름을 다 짜내는 것과 같은 고통에 던져져서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28절은 “그 때에”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 심판의 때에 라는 뜻이다. 그 심판의 때에 앞에서 말한 세가지 바보들은 살려달라고 애타게 부를 것이다. 이는 21절에서 지혜가 큰소리로 부른 것과 같은 말이다. 전에는 지혜가 말을 들으라고 애타게 불렀지만 이제는 어리석은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타게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기도가 전에는 만능이었지만 그 심판의 때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또 이와 짝을 이루는 구절은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이다. 이는 간절히 손을 뻗는 그림이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등을 돌린 어리석은 청년의 뒤에서 손을 뻗고 의지하길 기다렸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은 역전되어 어리석은 자들이 간절히 손을 뻗지만 그래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찾는다는 말은 동트기 전 붉은 하늘을 뜻하는 말이다. 아주 일찍부터 부지런히 찾는 그림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다.

29-30절은 지혜는 그 심판의 시간에 악인들을 거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29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는 이제 심판이 막바지에 달했다는 뜻이다. 이는 28절처럼 아무리 부르고 부지런히 찾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문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기준을 가지고 주의 깊게 생각해서 결정한 것이다. 주의깊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저들은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0절도 왜냐하면에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다. 여호와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훈이란 무엇을 잘못하거나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주는 가르침이 아니다. 이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도록 말한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와 짝을 이루는 “모든 책망” 이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꾸지람이다. 25절에서는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업신여겼다고 했다. 이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경멸하고 하나님 자체를 경멸하며 반역을 일으키는 태도이다.

31절은 어리석은 자들이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결과를 음식을 먹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31절은 먼저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라고 했다. “자기의 행위”란 “자신들의 길” 이란 뜻이다. 자신들이 선택한 길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속임수에 따라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자신들은 좋은 것을 먹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치명적인 독을 먹은 것이다. 이와 짝을 이루는 말은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이다. 자신들이 실제 선택한 길인 행위보다 더 훨씬 많은 것은 그 생각이다. “자기 꾀” 란 자신들의 길을 계획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 행한 악한 행위보다 그 악한 행위를 계획한 것이 훨씬 더 많은 법이다. 그래서 “배부르리라” 라고 한 것이다. 그 많은 계획들만큼 하나님의 심판도 배가 부르도록 채워주시는 것이다. 저들의 배 안에는 치명적인 독들이 가득 차서 터질 지경인 것이다. 따라서 악인들의 멸망은 스스로 독을 먹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저들의 목을 치신 것이 아니다.

32-33절은 미련한 자들의 죽음과 지혜로운 자들의 안전함이 대조된다. 32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왜 그렇게 되도록 하시는가 하면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라고 했다. 퇴보라는 말은 돌아선다는 말로 배교라는 뜻이다. 호세아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배교와 같은 것이다. 23절은 책망을 듣고 돌아서면 생명을 건질 수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32절은 이제 돌아서도 소용이 없는 심판의 순간이다. 스스로 치명적인 독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보약인줄 알고 배가 터지도록 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은 배를 움켜잡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다. 자신들 스스로 한 일 때문이기에 저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죽이고 있는 중이다.

예레미야 3:12절에서 “돌아서라, 돌아선 이스라엘이여!” 라고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부분에서도 말하고 있다. 23절에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라고 했는데 32절에서는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선 자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미련한 사람은 22절에서 나온 악의 종결자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소리없이 조용히 멸망시킨다. 앞에서 자신을 죽인다는 말이 죽이고 있는 장면을 말한다면 멸망시킨다는 말은 이미 죽은 상태로 만든 것을 말한다. 한번이 아니라 저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죽은 상태를 생산해 내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마치 죽은 시체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던 나치정권 하의 가스실과도 같은 모습이다.

33절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사람은 평안히 산다 했다. 이는 32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자기를 죽인다는 말과 반대말인 것이다. 또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할 것이라고 했다. 두려움이란 26절과 27절에서도 나온 말이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앙을 경험하거나 들어서 알고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절대로 그런 심판을 당할 리가 없기에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안전하다는 말은 아주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숲 가운데 있는 거울같이 맑은 호숫가에서 그물침대를 매고 평안히 누워있는 모습과도 같은 그림이다. 거기에는 어떤 유혹도 두려움도 위험도 없다. 하나님 품 안에서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들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라고 간절히 애원하며 외치는 모습은 25절까지만이다. 그 이후에는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다. 더 이상 한결 같은 사랑을 입을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들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에 나온 어리석은 자들, 거만한 자들, 미련한 자들은 교도소에 갇혀있는 도적, 강도, 강간범, 살인범들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를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다.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따르지 않고 세상 쾌락과 탐욕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한결 같은 사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신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구원의 문은 닫히고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사모하고 사랑하면서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고 하나님의 품에서 최고의 평안을 누리는 길이다.

사진출처: Public Domain Pictures: Jean Beaufort, Hammock in th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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