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의 서론이 끝나고 첫 가르침이 나오는 1:8-19절부터 많은 사람들이 잘못읽고 오해한다. 이 말씀을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는 말로 오해한다. 흔히 악한 자들을 따라가며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말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되라고 이해한다.
이는 훈계 라는 말이 1:7절과 1:8절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는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1:7절에서는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라고 했고 1:8절에서는 그러니까 “네 아비의 훈계를 잘 들으며” 라고 한 것이다. 이 훈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첫걸음이라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부모님께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실천하라는 말이다.
1:8-9은 부모를 통해 주시는 훈계와 가르침에 순종하라는 말과 그 이유가 나온다. 신명기 6:1-6절에 보면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광야 세대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잘될 것이라고 당부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7절에 보면 이를 자녀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이 나온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일은 부모가 맡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신명기 6장을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8절은 원어에서 “샤마 베니”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들으라 내 아들아” 라는 뜻이다. 이는 신명기 6:3절의 “샤마 이스라엘”과 똑 같은 구조이다. 모세가 들으라고 명령한 말씀을 아버지가 똑같이 흉내를 내며 가르치고 있는 모습이다. 무엇을 들으라는 것일까?
이는 네 아버지의 훈계를 잘 들으라는 것이다. 훈계란 1:2, 3, 7절에서 이미 나온 말이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배우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반복해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신명기에서 모세가 가르친 내용과 같은 것이다. 아버지의 역할은 단순히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말씀대로 행하도록 삶 속에서 반복해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훈련시키려면 때로는 벌도 주고 매로도 때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며 불순종할 때마다 벌을 주신 것과도 같이 자녀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훈계는 마치 군대의 유격조교처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여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하여 행하게 하는 것이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듣기 싫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가 부여한 아버지의 권위 때문에 듣지 않을 수 없다. 무서워서 할 수 없이 듣는 척하지만 흘려 듣고 대충 순종하는 척만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훈계는 들으라고 한 것이다. 아버지의 훈계를 잘 경청하고 순종하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말은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라는 말이다. 여기서 법이란 히브리어로 ‘토라’ 이다. 이는 어머니가 어린 자녀를 데리고 문답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다정하게 질문하면 아들은 대답한다. 어머니는 그렇게 해서 아들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비의 훈계는 잘 들으라 했지만 어미의 법은 떠나지 말라 했다.
떠나지 말라는 말은 어머니를 떠난다는 말일 수도 있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떠난다는 말일 수도 있다. 아버지의 훈계는 절대 버리고 떠날 수 없다. 무섭기 때문에 듣기 싫으면 그냥 흘려 듣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훈계는 그렇게 흘려 듣지 말고 잘 들으라 한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과 같은 힘이나 권위가 없기에 배우기 싫으면 그냥 어머니가 가르치는 그 자리에서 떠나거나 그 가르침을 떠나 버리는 것이다.
9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8절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부모의 훈계와 가르침들은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 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관을 씌워주는 것은 명예의 상징이다. 이는 승리자에게 씌워주던 것이기에 승리자로 높여주는 모습이다. 이는 아버지의 훈계를 잘 받아서 참고 실천하면 승리자로 명예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또 네 목의 금 사슬이라고 했다. 금 사슬은 어머니의 가르침과 연결되는 말일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자료를 보면 이집트 여신의 목걸이는 영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같은 문화권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에게도 목에 거는 목걸이는 생명의 상징이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보호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집트인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어머니가 가르쳐 주시는 가르침이 찬란하게 빛나는 금 목걸이 같은 하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 가르침이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머리에는 관을 쓴 것은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 목에 건 목걸이는 생명의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것을 나타낸다.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훈련 받는 것이 존귀하게 되는 길이고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웃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게 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도와 보호를 받는 길이기에 생명의 길인 것이다.
10-14절은 악인의 유혹을 분석한 내용이다. 먼저 10절은 19절까지 전체의 요약이다. 10절은 “내 아들아!” 라는 말로 시작한다. 아버지가 다정하게 아들을 부르는 말이다. 이어지는 가르침의 요약은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는 것이다. 원어는 악한 자가 아니고 악한 자들이다.
악한 자들이란 말의 어원은 길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따라서 악한 자들이란 하나님 말씀에 나타난 기준에서 벗어나는 자들이지 세상의 법적 도덕적 기준을 벗어나는 자들이 아닌 것이다. 악한 자들이 꾀는 것도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서 자기들과 함께 세상 욕심을 따라 가자는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당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르고 세상 친구들의 꼬임에는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11-14절은 만약 너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이라는 조건절이 이끄는 내용들이다. 이는 악한 자들이 꼬이는 조건들이다. 그 조건들은 11-12절이 댓구를 이루고 13-14절이 또 댓구를 이룬다. 11절에서 세상 친구들이 꼬이는 모습이 세 장의 그림으로 나타난다. 이 세 장의 그림은 연결되는 동작들이다. 먼저 1단계는 “우리와 함께 가자” 는 것이다. 어디로 가자는 것일까? 다음 단계는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이다. 원어는 “엎드려 기다리자 피를 위하여” 이다. 죽이려고 작은 관목 같은 은폐물 뒤에 납작 엎드리는 모습이다. 이는 앞에서는 안보이지만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보이는 자세이다. 그 다음 단계는 “죄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이다. 원어는 “완전히 숨자 죄없는 사람을 위해 아무 이유도 없이” 라는 뜻이다. 이는 보석이나 비밀 문서를 감추듯 완전히 숨긴다는 뜻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해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해칠 것인지 12절에서는 그림 언어로 나타내고 있다. 먼저 “스올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라고 했다. 스올이란 이사야 5:14절에서 “스올이 욕심을 크게 내어 한량없이 그 입을 벌린즉” 이란 말에서 나온다. 이는 무덤을 뜻하는 말이지만 바위에 구멍을 뚫어 만든 무덤이 아니다. 땅이 입을 벌리고 갈라져서 산 사람들을 통째로 삼키는 무덤이다. 이는 땅 위에 사는 죽을 생명체들이나 하늘에 속한 존재들이 있는 곳의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스올은 한번 내려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시온산과 요단강의 반대말로 쓰였다. 악인들은 먼저 산 채로 삼키자 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완전히 죽이자는 뜻이다.
그 다음에는 “통으로 삼키자” 는 말이 나온다. 통으로 라는 말은 몸의 일부가 잘려나가 흠이 있거나 병든 동물의 반대말이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건강한 제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을 가리킨다. 살아있는 의로운 사람을 완전히 삼키자는 뜻이다. 어떻게 삼키나? 땅이 갈라지고 땅이 사람을 삼키듯이 완전히 삼키자는 것이다. 원어는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처럼 삼키자는 것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덩이로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게 하자는 뜻이다.
13-14절은 그렇게 의로운 사람을 죽인 결과이다. 이렇게 죽였다면 그 다음 행동은 그가 가진 소유를 뻬앗는 것이다. 먼저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라고 했다. “온갖” 이란 양이 많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질이 높음을 뜻하는 말이다. 얻는다는 말은 찾아서 발견한다는 말이다. 죽은 사람의 집을 뒤져서 아주 값진 것을 찾아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최고 값진 것들을 빼앗아 우리의 집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집들이란 실제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 욕심을 따라 살며 남의 것을 착취하던 당시 상류층 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은 그 도시의 가장 좋은 곳에 높은 담이 있는 저택들을 소유하고 있다. 어느 집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이 권세있는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득 채우자는 것이다.
이는 부자가 다 이렇게 악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해치고 자기들의 배를 채운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죄인인 부자들은 부를 사랑하고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배만 불린다. 그러나 거룩한 부자들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신들의 부를 남을 돕는데 이용한다.
14절은 13절과 연결되는 댓구이다.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라고 했다. 원래 제비 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뜻으로 쓰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탈취물을 나누는 데 제비를 사용하니 거의 신성모독 수준인 셈이다. 이는 공정하게 나눌 것임을 알리며 유혹하는 것이다. 또 “우리 사이에 돈 주머니는 하나만 두자” 라는 말은 얻은 재물을 모두 다 한 곳에 모아놓고 공정하게 제비뽑아 나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더 많이 갖거나 미리 떼어 놓고 나머지만 나누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초보자인 잠언 기록자의 아들을 유혹하려는 말이다.
11-14절이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이라는 조건절이라면 15-18절은 그 결과를 나타내는 귀결절이다. 11-14절이 “내 아들아” 라고 시작하는 것처럼 결과를 나타내는 15-18절도 “내 아들아”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경고를 자세히 분석한 것이다.
원어에서 15절은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라는 말로 시작한다. 길이란 구약성경에서 보통 하나님의 말씀이 안내하는 길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악한 자들이 안내하는 길이다. 단수이기 때문에 악 그 자체를 말한다.
또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라고 했다. 발을 멈추고 더 이상 그들의 길들로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15절 뒤에 나오는 길은 복수이다. 이는 탐욕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탐욕들에 발을 들여놓지 말고 멈추라는 것이다. 이들의 길은 함정을 파 놓고 살짝 덮어놓은 길이다. 그들을 따라 발을 내딛는 순간 그 함정에 빠져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16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15절의 이유가 된다. 이는 이사야 59:7절에서도 똑같이 나온다. “그들의 발은 악으로 치달으며 피 흘리는 일을 서두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15절의 네 발과 16절의 악인들의 발을 비교하며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악이란 언약을 지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피를 흘리는 일을 서두른다 했는데 남의 피를 흘리는 줄 아는데 사실은 자기들의 피를 흘리는 일을 재촉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악인들은 이같이 미련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죽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 자기들의 숨통을 찌른다는 것이다.
15절에서는 내용을 말하고 16절에서 왜냐하면 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17-18절에서는 17절에서 왜냐하면이라고 하면서 이유를 먼저 말하고 내용은 18절에서 말한다. 그 이유는 새가 보는 앞에서 그물을 치는 것은 헛수고라는 것이다. 여기서 새는 악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17절에서 새가 새그물을 치는 것을 보고도 걸리는 것처럼 악인들도 스스로 그물을 쳐놓고 자기들이 걸린다는 뜻이다.
18절은 11절과 똑 같은 동작이 나온다. 원어에서 “그들이 가만히 엎드려서 자기들의 피를 기다린다” 라는 뜻이다. 또 18절 뒷부분은 “그들은 매복해서 자기들의 목숨을 노린다” 는 뜻이다. 11절에서 납작 엎드려서 기다리고 완전히 숨어서 목숨을 노리는 것이 이제 18절에서는 자신들의 피를 기다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노린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17절에 나온 것처럼 새머리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들은 자신들이 가장 현명한 줄 알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탐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새머리들이라고 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그물의 그림이 19절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익” 이란 말은 원어에서 “자를 것” 이란 말에서 온 것이다. 남의 물건을 몰래 잘라가는 것은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어릴 적인 1960년대 말 필자가 전봇대를 지지했던 철사를 끊었던 적이 있다. 여러가닥의 굵은 철사들을 꼬아서 만든 줄이었는데 그 중 한 가닥이 풀어져 있던 것을 일부 잘라다가 펴서 썰매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그랬다. 그렇게 남의 물건을 몰래 조금 잘라내서 갖는 것이 ‘이득’ 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익이란 말이나 탐한다는 말은 원어에서 똑 같은 말이다. 하나는 명사로 쓰이고 하나는 동사로 쓰인 것 뿐이다. 원어를 직역하면 “자를 것을 자르는 사람의 길은” 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말의 뜻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길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가진 본래의 뜻은 17-18절의 새그물 치는 그림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 새그물은 끈을 자르거나 풀면 덮치는 그물이다. 이익을 탐한다는 말은 결국 새그물의 끈을 자르는 것이다. 저들은 새그물의 끈을 탐내서 잘라냈을 것이다. 어쩌면 새그물 전체를 탐내서 잘라낼 끈을 잘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새그물이 이 미련한 새머리들의 머리를 덮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암벽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밧줄이 탐이 나서 그 밧줄을 끊어 갖으려다가 비명을 지르며 절벽 아래로 떨어져 머리가 깨져 죽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다. 본래 11-12절에서 죄없는 자들의 목숨을 빼앗고 그들의 귀중품들을 빼앗기 위해 매복하는 모습이 나왔었다. 그러나 17-19절은 그러한 매복이 결국 자기들의 생명을 취하는 매복이었다는 것이다.
개역개정은 19절 뒷부분을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라고 의역을 했다. 원어는 부당한 이익이 그 재물을 가진 자들의 생명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는 부당한 이익을 의인화하여 그 이익이 그 이익을 취한 자의 생명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의인화된 이익은 사람의 생명을 받는 괴물이다. 받는다는 말은 시편 6:9절에서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라는 구절에서도 나왔다. 그런데 잠언 1:19절에서는 부당한 이득이라는 괴물은 그 이득을 취한 자의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19절은 짧지만 악한 행동의 결과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잠언 전체의 근본적인 개념이다. 부당한 이득이라는 괴물이 12절의 스올이고 무덤인 것이다. 악한 자들은 무고한 자들을 거기에 밀어 넣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들이 거기에 빠진 것이고 스스로가 자신들의 생명 줄을 끊은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3:5절에서 이러한 탐욕을 죽이라는 것을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라고 표현했다. 잠언에서는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표현했지만 바울은 더 범위를 넓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탐욕들은 우상숭배인 것이다. 이러한 탐욕들이 왜 생겨날까? 우리 집 고양이 두마리를 보고 답을 찾았다.
우리 고양이들은 두마리 다 길고양이였다. 첫째 고양이 하비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에는 무한정 먹어댔다. 먹다가 토하고 또 먹곤 했다. 먹이 자동지급기를 설치해 놓았는데 하루는 보니 먹이 나오는 구멍에 손을 집어 넣어 먹이가 나오게 하는 회전판을 흔들어댔다. 그러자 카지노에서 코인 쏟아지듯 먹이가 와르르 쏟아졌다. 이 녀석은 사람이 아닌지 착각이 들만큼 똑똑한 녀석이다. 하비는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고 또 먹었다. 그러다가 10개월쯤 계속 안정적으로 먹이가 공급되니 그러한 행동이 사라졌다. 1년 뒤 둘째 고양이 예비가 들어왔다. 예비도 길고양이였다. 예비 하비와 마찬가지로 무한정 먹어대다가 약 10개월쯤 계속 무한 리필이 되자 그 탐욕을 버렸다.
왜 우리 고양이들이 게걸스럽게 먹고 토해가면서도 계속 먹었을까? 이는 길고양이 시절 먹이를 언제 또 먹을지 몰랐기에 먹이를 발견하면 죽도록 먹어대던 습관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고양이들도 더 이상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 그냥 먹이 통에 먹이를 가득 넣어 놓아도 필요할 때 가서 조금 먹고 만다. 왜? 주인께서 항상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탐욕도 길고양이 출신인 우리 고양이들과 같다고 본다. 물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모두 다 물질로 연결된다. 잠언의 기록자는 그러한 탐욕의 대표로 물질에 대한 욕심을 예로 든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세상 것들을 가능한 많이 가지려고 한다. 이러한 탐욕은 마귀가 주는 것이다. 정당한 방법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망하게 해서라고 갖으라고 시킨다. 언제 또 생길지 모르니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왕창 챙겨 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렇게 불의한 이익을 취한다면 결국 자기 스스로 생명 줄을 끊는 것이다.
오늘날 믿는 자들도 왜 그렇게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소유하려 할까? 이는 우리 고양이들 길고양이 시절처럼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이 있다 해도 주인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한 미래를 대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왕창 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이고 하나님이다.
잠언 1:8-19에서 말하는 것처럼 남을 죽이지는 않았으니 괜찮다고? 이는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사람은 스스로 망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죽이고 빼앗는 그림으로 경고한 것 뿐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악한 자는 범죄자나 조직 폭력배들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따르지 않고 자기들이 주인이 되어 탐욕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악한 자들이다.
사진출처: wikimedia: Dicksee-Victory, A Knight Being Crowned With A Laurel-Wre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