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은 짧은 경구의 모음집이 아니라 계속 연결이 된다. 25:1-15절은 각자의 안에 있는 찌꺼기인 교만한 마음을 골라 버리고 나신을 낮추어야 순수한 은과 같은 공동체가 된다고 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비난을 듣고도 분노를 참고 분노 대신 은쟁반에 금사과 같은 경우에 맞는 말을 하는 것이라 했다. 이제 25:16-26:3절은 어떻게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고 반대로 경우에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여 순수한 은과 같은 공동체를 만들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I. 꿀을 너무 많이 먹이지 말라(25:16-23)
25:1-26:3절 전체를 두 단어로 말하라면 교만과 겸손이다. 그래서 25:1-15절까지의 결론을 내린 25:15절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말로 설득하는 것을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라고 한 것이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태도로 오래 참고 부드러운 말을 하면 지배자도 설득되고 뼈도 녹일만큼 설득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16절은 그렇게 설득력이 있는 지혜의 말씀을 발견한다 해도 너무 많이 먹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6절은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면 토할까 두려우니라” 라고 한 것이다. 24:13절에서도 꿀과 송이 꿀을 먹으라 했다. 이는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설득력있게 말하는 사람에게 듣는 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꿀과 같은 지혜의 말씀도 많이 먹으면 토한다는 것이다.
17절은 16절에서 비유로 말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 자신이 발견할 꿀과 같은 지혜를 이웃에게 가서 나누어 주려는 모습이다. 그런데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라고 했다. 이 말을 단순히 이웃집 자주 드나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16절에서 발견한 꿀 같은 말씀을 나누어 주고 싶어서 이웃을 찾아가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16절의 “과식함으로(תשבענו: be satiated with it)” 는 17절의 싫어하며(ישבעד:be satiated with you)와 같은 말이다. 과식하여 토하는 것과 너무 많은 꿀을 먹이는 이웃을 토해내는 것이 연결되는 것이다. 자신이 발견한 꿀 같은 지혜의 말씀을 기뻐하여 이웃을 찾아가 나누어 주었는데 너무 많이 먹이면 너를 토해낼까 두렵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웃도 듣고 기뻐했는데 너무 많이 먹여주자 토하고는 그 꿀 같은 말씀을 먹인 사람 조차도 토해내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18-20절은 꿀 같은 지혜의 말씀을 너무 많이 먹인 사람을 어떻게 토해내는 모습을 동영상처럼 연결 동작으로 묘사한 것이다. 18절에서 이 사람은 진실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너무 많이 먹인 사람을 거짓 증거로 공격한다. 그런데 공격하는 동작 세가지가 전쟁터에서 싸우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사람의 거짓 증거는 방망이와 칼과 뾰족한 화살이다. 이는 고대의 전쟁터에서 용사가 쓰는 무기들이다. 이러한 무기들은 용사의 무기를 맡은 청년이 갖고 따라 다니는 것이다. 마치 골프장에서 캐디가 골프채들을 갖고 다니다가 원하는 것을 집어 주는 모습과도 같다.
처음에는 친한 관계였기에 가까이에 있었다. 이 때 분노한 사람은 무기 맡은 청년에게 먼저 방망이를 달라 한다. 아주 가까이에 있었기에 상대의 머리채를 잡고 방망이로 후려친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 있는 상태에서 상대도 격렬하게 저항한다. 그러다 보니 방망이로 때린다 해도 크게 휘두를 수 없어 큰 중상을 입히지는 못하고는 서로 떨어진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기 맡은 청년에게 칼을 달라 해서 휘두른다. 칼은 좀 떨어진 거리에서 휘둘러서 팔이나 다리 같은 곳에 중상을 입힐 수 있다. 하지만 상대도 칼을 갖고 방어하기에 죽이지는 못하고 물러난다. 마지막 무기는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뾰족한 화살을 날려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이는 말싸움을 전쟁터의 용사들의 싸움으로 비유한 것이다. 처음에는 가까이서 친밀한 대화를 나누다가 심하게 다투고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자 칼로 휘두르듯 좀 더 날카롭고 위협적인 말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 2차 공격도 실패하자 이번에는 멀리 떨어져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중상모략을 하게 된다. 그러면 그 비난의 화살이 상대의 가슴에 꽂혀 죽게 되는 것이다.
19절은 꿀을 너무 많이 먹여 이처럼 깨어진 친구 관계는 이제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로 비유가 된다. 근접전에서 서로 방망이로 치고 받다가 이빨이 부러졌다. 부러진 이빨은 이처럼 관계가 깨어진 친구의 말을 의지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다리는 몸 전체를 운반하는 것으로 행함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 친구는 말이 부러졌을 뿐 아니라 그 행함도 위골되어 성하지 않다. 환난의 날은 좁은 곳에 갇혀 있는 위기의 순간이다. 이런 때에 이러한 친구의 말이나 행동을 의지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제 20절은 그렇게 꿀을 많이 먹여 다 토하고 나서 아픈 친구에게 즐거운 노래를 불러주는 모습이다. 상대가 어떤 상태이고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시편의 즐거운 찬양을 불러 주어 꿀을 계속 먹이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과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붓는 것과 같다고 했다.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은 더 추워서 얼어 죽게 하는 것이다. 거품이 일고 있는 소다 위에 식초를 부으면 더욱 더 부글부글 끓어 오른다. 둘 다 나쁜 상태에 있었는데 그 상태가 더 악화된다는 뜻이다. 이는 11절의 금쟁반에 은사과라는 말과 반대가 되는 상황이다. 진정시키는 말과 오히려 악화시키는 말이 대조되는 것이다. 아무리 즐거운 노래라도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는 그 슬픔을 더 깊게 하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토하고 나서 아픈 사람에게는 그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법이다. 따라서 경우에 합당한 말로 때를 보아서 적당한 양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21-22절은 이렇게 해서 원수가 된 친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한 것이다. 원수는 지혜의 말씀을 많이 먹고 그 은혜를 방망이와 칼과 화살 같은 말로 공격하여 원수를 갚은 사람이다. 21절은 이런 사람에게 계속 지혜의 말씀을 먹여서 상태를 더 악화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 아무 말없이 배고플 때 먹게 하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여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이다. 여기서 배고플 때 먹게 하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한다는 말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영적인 필요를 채워준다는 말로 해석하면 안된다. 꿀을 먹이는 것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지혜를 먹이는 것을 멈추고 그 대신 이번에는 상대의 필요를 채워 주라는 것이다.
22절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고 했다. 바울도 로마서 12:19-20절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며 원수를 직접 갚지 말라고 했다. 불씨를 찾아 그릇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불씨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가고 있는데 그 머리에 있는 그릇에 불타는 숯을 가득 담아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숯불의 열기로 얼굴이 뜨거워지게 된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뒤범벅이 되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기쁘면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마구 먹이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이 먹여 다 토하고 나를 적대한다면 차라리 지혜의 말씀을 먹이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다. 그렇게 원수가 되었다면 그런 원수를 참아주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줄 것이며 계속 꿀 같은 말씀을 먹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II. 북풍의 비 대신 북쪽 산의 생수로 먹이라(23-26)
이제 23-26절은 이야기가 연결되지 않는 것 같으나 분명하게 연결된다. 앞에서는 직접 드러내고 싸우는 모습이었다면 이제 뒤에서 몰래 공격하는 싸움이다.
23절은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늦은 가을에서 겨울에 주로 비가 내리는데 이 때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은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풍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다고 했다. 북풍이 불면 갑자기 비가 내리는데 수확철에 우박이 섞인 비가 내린다. 북풍이 구름을 몰고 오자 비가 올 줄 알고 무방비 상태로 있었는데 우박이 쏟아져 수확기의 곡식들과 과일들을 다 망쳐 놓는다.
세단계의 직접 전투가 있은 뒤에 다음 전쟁은 트로이의 목마를 사용한 전쟁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방심하고 있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다는 것이다. 참소하는 혀란 숨겨진 혀라는 뜻이다. 북쪽이라는 말도 본래 숨겨져 있다는 말에서 온 말이다. 물론 북쪽과 숨겨진 혀라는 말은 다른 말이지만 구름에 숨겨진 얼음폭탄과 웃는 얼굴에 숨겨진 혀, 즉 말폭탄이 비교되는 것이다. 보는 앞에서는 참고 웃으며 말하지만 돌아서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대의 잘못을 까 발리고 자신이 억울하다고 떠들어 대는 것이다. 이렇게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원수가 보는 앞에서는 웃으면서 하나님 은혜로 잘 참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아서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험담과 하소연을 섞어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름 속에 우박을 숨겨 공격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인내가 아니라 위선이고 평화의 잔치를 하면서 갑자기 선전포고도 없이 게릴라 전으로 기습하는 것과도 같다.
24절도 23절과 연결되는 장면이지 갑자기 동떨어진 여자 이야기가 아니다. 북풍이 내리는 우박과 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자의 공통점은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당하는 것이다. 비가 내려 농작물을 적셔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려 농작물을 다 망치는 것이다. 이런 게릴라 전을 하는 사람을 바가지 긁는 여인에 비유한 것이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라고 했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큰 집이 아니라 집과 움막인데 개역개정 난하 주석에 보면 “지붕 한 모퉁이에서” 라고 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건조한 기후 지역에 있기에 지붕이 평평하다. 다정히 대화를 나누던 아내가 갑자기 우박을 쏟듯 바가지를 마구 긁어 댄다. 그러자 이 남자는 지붕으로 피신한 것이다. 그러면 비도 내리고 때로는 우박도 내리기도 하지만 갑자기 바가지를 긁어대는 여인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이다. 여인의 이야기는 진짜 여인의 이야기로 읽으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해석이 된다. 게릴라 전과 같이 웃으며 사랑스러운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분노를 터트리는 모습을 이러한 여인으로 비유한 것 뿐이다.
이제 25절에서는 헐뜯고 다투는 말 대신 먼데서 오는 기쁜 소식이 등장한다. 먼 나라에서 오는 소식은 구원하러 오는 군대가 온다는 소식일 것이다. 적들에게 포위된 채 공격을 당하고 있는데 식량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갑자기 대규모의 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과도 같은 기쁜 소식이 전령을 통해 전해졌다.
이러한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라고 했다. 이 냉수는 13절에서 나온 얼음 냉수이다. 한 여름 북쪽 헬몬산 꼭대기 바위 틈에서 얼음을 가져다가 넣은 물이다. 북풍이 일으키는 비도 얼음을 머금고 있는 것이고 북쪽 헬몬산 꼭대기에서 가져온 것도 역시 얼음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는 거짓된 웃음과 거짓된 말로 사랑을 말하면서 돌아서서는 헐뜯고 흉을 보며 자신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러한 비방이 얼음덩이로 갑자기 쏟아져서 완전히 망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같은 북쪽에서 왔지만 헬몬산 꼭대기에서 가져온 얼음을 넣은 시원한 물이다. 둘 다 더운 여름에 뜻하지 않게 만나는 것이지만 하나는 망하게 만들고 하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일하던 사람의 목을 축여 시원하게 해 주는 것이다. 꿀과 같은 말씀을 계속 먹여 토하게 하고 원수 삼게 하는 것보다는 말씀을 조금 먹이고는 함께 공감하고 위로하여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목마른 원수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타협이나 야합까지 하라는 것처럼 잘못 인식될 수 있다. 그래서 26절은 그 타협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를 정해준 것이다. 그 한계는 의인이 악인에게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원어는 “악인에게 길을 내어주는 의인” 이라는 뜻이다. 의인이 걷고 있는 진리를 따라가는 길마저도 타협해서 악인에게 내어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진리의 길까지도 내어주면 악인은 의인이 갖고 있는 그 생수의 우물을 발로 짓밟고 지나가 흙탕물을 일으켜 마실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또 샘이 더러워진다는 말은 눈에 보이도록 흐려진 것은 아니지만 독이나 더러운 균을 넣어 마실 수 없게 한 것이다.
III. 존경 받으려는 욕구를 접으라(25:27-26:3)
25:26절에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의인이 악인과 진리에 관한 문제를 타협하는 것은 오염된 물과도 같다고 했다. 헬몬산의 얼음물이 아니라 오염되어 마실 수 없는 물인 것이다. 이렇게 의인이 오염되는 것은 지나친 명예욕 때문이다. 명예를 얻기 위해 악인들 앞에 무릎을 꿇고 타협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25:27절은 명예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27절에서는 16절의 꿀이 다시 나온다. 이 부분이 계속해서 동일한 주제로 계속해서 연결되고 있다는 뜻이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라고 했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명예를 구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 명예는 다른 사람들에게 꿀 같은 진리의 말씀을 먹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진리의 길로 인도하여 얻은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면 그러한 존경도 중독이 된다. 그래서 이들이 받는 존경이 지나치면 꿀을 많이 먹은 것과도 같다고 한 것이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커피에 중독이 된 것이나 마약에 중독된 것과도 같은 것이다.
필자도 평생 커피를 마시지 않다가 몇 년 전 며느리로부터 이태리산 Bialetti moka pot를 선물로 받은 뒤 하루에 한잔씩 마셨다. 처음에는 한잔만 마셔도 심장이 뛰고 잠이 확 달아 났는데 지금은 이러한 한잔은 아무 효과가 없다. 두 잔 째 마셔야 비로소 효과가 있다. 하지만 계속 한잔을 고수하고 있다. 오늘날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바로 먹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으로 섬기게 되면 점점 존경을 받게 되면서 그 존경도 점점 중독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8절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존경 받으려는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림처럼 묘사한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도 같다” 라고 했다. 고대의 근동의 정착민들은 성벽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고 살았다. 유목민들은 이를 공격하여 무너 뜨리고 점령하려 하였다. 예레미야애가 2장에 보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수치를 당하는 처녀로 비유했다. 시편 137:7절도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라고 했는데 원어대로 직역하면 “벗겨버려라 벗겨 버려라 그 기초가 드러나도록 홀딱 벗겨 버려라” 라는 뜻이다. 이는 이방인들이 성을 무너뜨려 그 부끄러움이 그대로 드러났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존경을 받으려는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 성벽이 없는 것과도 같다는 말도 이러한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성벽이 무너졌건 무너지지 않았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처음에는 성벽을 치마로 삼아 쪼그리고 앉아 있었기에 그 부끄러움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처녀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니 교만해져서 점점 일어나다 보니 성벽이 아예 없는 것과도 같이 부끄러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존경을 받으려고 자신을 자꾸 높이는 것은 성벽이 없는 것과도 같은 무방비 상태이고 부끄러움의 상태라는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도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박수 갈채를 쳐 주다 보면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그 수치가 다 드러나 망신을 당하는 모습을 본다. 참으로 훌륭한 분들인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존경하고 따르다 보니 존경을 받으려는 욕구가 점점 커져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은 유명한 목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작은 교회 안에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하다 보면 어느새 중독이 되어가고 똑 같은 경로로 무너져 버린다.
26:1절은 그래서 미련한 사람에게는 영예(honor)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실제 하나님의 지혜를 간직하고 전하면서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를 통제할 줄 안다. 그러나 자신은 지혜가 있는 줄 알지만 그 욕구를 통제할 줄 모르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명예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책망하고 가르치려 하다 보니 마치 여름에 내리는 눈과도 같고 추수기에 내리는 비와도 같다.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를 완전히 다 망치는 큰 재앙이다. 농작물을 다 망치는 재앙과도 같은 지혜이다.
이런 미련한 사람이 계속 더 많은 존경을 받으려 하다가 자신의 부끄러움이 드러나게 되면 그 잘못을 지적하거나 책망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신의 권위로 저주를 퍼부으며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지키려 한다. 그래서 2절은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라고 했다.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권위로 저주를 퍼붓는 사람은 자신의 저주가 마치 독수리의 공격과도 같다고 겁을 주지만 이는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기 때문에 참새나 제비가 날아 다니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사람들이 거짓된 권위로 겁을 주더라도 전혀 겁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이처럼 함부로 저주를 말하는 미련한 자를 말과 나귀에 비유하고 있다. 3절은 말에게는 채찍 나귀에게는 재갈이 필요하듯 미련한 사람의 등에는 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매는 하나님께서 때리시는 매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매로 때려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결론 및 적용
꿀과 같은 말씀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쓸모 없이 되는가? 그것은 말로만 계속 떠들며 먹이기 때문이다. 말로만 계속 먹이면 소화불량에 걸리고 토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말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전한 뒤에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심지어는 그들이 우리를 대적한다 해도 원수에게 헬몬산의 얼음물로 시원하게 대접하는 삶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러한 섬김을 보고 그 먹은 꿀을 소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먹였다면 그 다음에는 침묵하며 견디며 그에게 필요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끊임없이 꿀만 먹이는 사람들이 한쪽 극단에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미국의 세대주의자들도 사립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놓고는 끊임없이 강제로 먹이면서 치마 길이를 재며 그것이 경건인줄 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 그런 학교를 떠나면 다 토해내고 믿음에서 떠나 버린다.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겉으로 드러나는 거룩은 강조하면서 성도들을 시도 때도 없이 모아놓고 말씀을 먹여서 독점하려고 한다. 하지만 소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 배려는 없다.
이들과는 반대로 대적들을 너무 많이 받아 주다 보니 진리의 문제까지 내어주기까지 타협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에 나온 짓밟혀 흙탕물이 된 우물과 독이나 균을 풀어 넣은 샘 같은 사람들이다. 필자는 이러한 기독교인들을 근본주의자들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씀으로 먹이지는 않고 사랑과 봉사만 강조하다가 진리까지 다 내어주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따라 사는 진정한 기독교인들이라면 꿀 같은 말씀을 먹이는 것과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섬기는 섬김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세상은 진리까지 양보하며 타협하는 자들을 향해 박수를 치며 교회는 그래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우리의 경건은 바리새인들의 경건이 아니고 세리들 같이 세상과 야합하는 자도 아니다. 우리의 경건의 모델은 모두와 함께 하고 사랑으로 용납하지만 진리의 문제는 절대 양보하지 않고 지켜 나가야 한다. 그러한 본을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근본주의나 자유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나친 명예 중독이다. 존경을 받고 성공적인 목회를 하다보면 존경을 점점 더 받게 되고 중독이 되어 가면서 점점 분별력을 잃고 망해간다. 평신도들도 말씀과 사랑으로 섬기며 존경을 받게 되면 역시 목회자들처럼 명예 중독증에 걸려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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