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탐욕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교만이 겉으로 드러난 껍데기라면 그 중심의 알맹이는 탐욕이다. 교만이 닽팥빵의 단팥을 싸고 있는 빵이라면 탐욕은 그 속에 있는 단팥과도 같다. 이 부분은 교만의 중심인 탐욕에 대해 주로 다룬다. 탐욕을 내려 놓아야 교만도 내려온다.
I. 끊임없는 탐욕을 버리라(15-16)
15절에서 거머리가 등장한다. 이 거머리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는 말거머리이다. 말이 물을 마시러 올 때 말의 코나 혀에 붙어 피를 빤다고 한다. 이 말거머리에게는 빨판이 두개가 있다. 하나는 입이 있는 곳에 있고 다른 하나는 항문이 있는 쪽에 있다. 그래서 거머리에게는 “다오! 다오!” 하며 보채는 두 딸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 거머리가 피를 빨 때는 이빨을 피부에 깊이 고정시키기 때문에 잡아 떼면 끊어질지라도 놓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지독한 탐욕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거머리의 위와 아래에 있는 빨판들은 각각 식욕과 성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것이다. 이 두가지 탐욕은 모든 다른 탐욕들의 대표로 예를 든 것이다.
“다오! 다오!” 라고 한 그 다음 단계는 전혀 배부를 줄 모르는 셋이다. 거머리는 사실 계속 달라 달라는 하지만 한번 피를 빨면 1-2년까지도 생존한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아무리 먹어도 전혀 배부를 줄 모르는 것 세 가지이다. 배부를 줄 모른다는 말은 만족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이 세가지는 아무리 먹어도 표시가 안 난다는 것이다. 또 더 심한 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 네 가지이다. 만족할 줄 모른다는 말은 만족할 만큼 먹었으니 그만 먹겠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탐욕스러운 인간의 탐욕은 그 끝이 없다는 것이다.
스올과 불은 둘 다 없애버리는 공통점이 있다. 스올은 끊임없이 시체를 태워 없애버린다. 불도 끊임없이 땔깜을 태워 없애버린다. 이 두 가지가 바깥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 안쪽에는 아기를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이 있다. 이 두가지는 끊임없이 받아 들여도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여자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면 나이를 먹었을 때 보살펴줄 사람이 없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아기를 낳으려고 온 힘을 다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를 잉태하려고 남편의 정액을 끊임없이 받아들이지만 아무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를소록 여자는 더 애가 타서 계속해서 더 달라 한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한다.
메마른 사막의 땅들도 아이를 배지 못하는 태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물을 주어도 물은 다 빠져 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만하면 되었다고 말할 줄 모르는 것은 마지막 네번째에 나온 불이다.
이는 악인의 탐욕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악인들은 거머리처럼 계속 달라 달라 하고 스올과 불과 아기 못 낳는 태 처럼 아무리 계속 끊임없이 탐욕을 채워도 계속한다는 것이다. 마치 불처럼 그만하면 되었다 라고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탐욕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은 텐트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텐트를 갖게 되면 단칸 방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단칸 방이 생기면 최소한 방이 3개정도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집이 생기면 더 큰 집, 더 큰 집이 생기면 수영장 딸린 호화주택…. 이렇게 끊임없이 탐욕은 계속되는 것이다. 처음엔 코치 가방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더 좋은 명품 더 좋은 명품을 계속 찾는 것과도 같다.
악인은 끊임없이 요구하면서도 계속 더 갖으려 하고 그만하면 되었다고 멈출 줄 모르면서도 열매가 전혀 없다. 그러나 의인은 가진 것이 적더라도 만족할 줄 알고 그 가진 것을 나누면서 열매를 맺는다. 오늘 잠언에서는 가진 것에 족한 줄로 알로 가진 것으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열매 맺는 삶은 지혜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쳐서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이 지혜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다.
II. 교만한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17)
17절의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 라는 말은 11절의 “아버지를 저주하며 어머니를 축복하지 않는 무리가 있다” 라는 말과 연결된다. 또 13절에서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라는 말은 17절의 눈과 연결된다. 또 14절에서는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라는 말은 독수리와 까마귀의 날카로운 부리에 연결이 된다.
이러한 교만은 결국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이다. 부모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부모를 조롱하고 멸시하며 빨리 죽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11-14절까지 교만한 자를 말한 다음 15-16절에서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말하고 17절은 다시 교만한 자를 말한다. 결국 앞 뒤에 있는 교만이라는 껍질을 벗겨내면 그 안에는 탐욕이 자리잡고 있다.
교만의 중심에는 탐욕이 자리잡고 있다. 탐욕이 그 껍질인 교만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만약 탐욕을 버린다면 교만이라는 껍질도 저절로 죽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람을 넣어 춤을 추게 하는 풍선인형(inflatable tube man)과도 같다. 그 중심에는 계속해서 바람을 불어넣는 콤프레서가 있다. 콤프레서에서 끊임없이 공기를 품어내어 풍선을 가득 채우면 출렁거리며 춤을 추는 것이다. 이러한 풍선인형은 보통 12피트정도인데 큰 것은 20 피트짜리도 있다.
높이 올라간 풍선인형을 아무리 잡아 당겨 땅에 엎드리게 해도 소용이 없다. 손만 놓으면 다시 높이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 보며 춤을 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을 듣고 겸손해지겠다고 아무리 백만번 다짐해도 소용이 없다. 잠시 한눈을 팔면 어느새 다시 교만이 하늘을 찌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탐욕이 계속 펌프질하며 교만이라는 풍선인형을 끊임없이 부풀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만을 내려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교만의 동력인 탐욕을 꺼야 한다. 그려면 교만은 저절로 내려와 땅바닥에 내리 깔린다.
아버지를 조롱하고 어머니 멸시하여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란 잠언 1:8절에 나오는 아버지의 훈계를 조롱하고 어머니가 가르치는 모세오경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탐욕으로 많은 것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더 갖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그 눈이 심히 높아진다. 그래서 어느새 부모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된다. 부모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님 말씀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만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보다 더 높이 올라가 있다. 그동안 이룬 수많은 성공들을 모두 자신의 공로로 돌린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높고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가만 두지 않으신다. 그 높은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라고 했다. 죽어서 묻히지도 못하고 골짜기에 그 시체가 버려지는 것은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이다. 그 눈과 눈꺼풀이 하늘 높은 줄 몰랐는데 이제 가장 깊은 골짜기 아래로 떨어지고 까마귀가 그 눈을 파내는 것이다. 교만이 하늘을 찔렀는데 이제 가장 치욕스러운 결말을 맞는 것이다. 또 독수리의 아들들에게 먹인다 했다. 이 두 종류의 새들은 부정한 새들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고 부정한 자들로 여겨서 가장 낮은 골짜기에 떨어지게 하실 뿐 아니라 부정한 새들에게 뜯어 먹히게 하는 불명예를 겪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안계시니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 말씀은 아버지 어머니께 효도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소개한 것 뿐이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요 어머니이다. 그 사람에게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사람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자.
III. 아름다운 사랑을 더럽히지 말라(18-20)
탐욕 중에 가장 큰 것이 성욕이다. 성적인 탐욕은 팔레스타인의 말거머리의 아래쪽 빨판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본래 주신 성욕 그 자체가 교만의 원동력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간에 아름다운 사랑을 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러한 행복한 가정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가장 작은 세포라는 것이다. 그런데 악한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인 성욕을 더럽고 악한 곳에 쓴다. 자신의 권력과 재물로 율법을 바꿔 많은 여자들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바꾸어도 상관이 없도록 만든다.
15절에서는 배부를 줄 모르는 것 셋과 만족할 줄 모르는 네번째 것이 있다고 했다. 18절에서는 기이한 일 셋과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 네번째 것이 있다고 했다. 기이한 일이란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차례대로 말하고 마지막에 창조한 남자와 여자를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들 중에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19절의 독수리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가장 큰 새이다. 그렇게 큰 새가 하늘을 날아가는데 하늘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것이 놀랍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만든 제트 비행가는 날아가면 그 흔적을 하늘에 남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독수리는 하늘에 아무런 흔적도 안남기고 날아간다는 것이다. 초점은 독수리에 있지 않고 하늘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하나님은 하늘을 항상 같은 모습으로 계속 관리하고 계신 것이다.
그 다음에 두번째는 땅 위에 있는 바위로 내려온다. 바위 위에 뱀이 지나갔는데도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 것이 놀랍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뱀에 초점이 있지 않고 바위 위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뱀은 단순히 땅의 생물들의 대표이다. 하나님께서는 땅들도 항상 같은 모습으로 관리하고 계신 것이다.
세번째는 바다로 간다. 이번에는 바다의 고래나 상어가 등장해야 논리적으로 맞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 지으신 바다 위에 인간이 만든 배가 지나간 흔적이다. 역시 초점은 배에 있지 않고 바다에 있다. 인간이 만든 작은 배가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를 지나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바다 위에는 그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 초점은 하나님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이다. 하나님 창조하신 온 우주가 정말 놀랍다는 뜻이다. 동물들이 지나가고 배가 지나가도 전혀 흠집조차 생기지도 않고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놀랍다는 찬양이다.
세번째에 물고기 종류가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만든 배가 등장한 것은 사람과 연결시키기 위해서이다. 배는 남자가 만들었으니 남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배 라는 말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나 영어는 모두 여성명사이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남자에게 주신 것이다. 배도 여성이고 여자도 여성이라는 점으로 앞부분과 연결시킨 것이다.
앞의 놀라운 세가지는 사실 네번째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여자 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어린 처녀라는 뜻이다. 성관계를 한번도 갖지 않은 처녀와 남자가 함께 하였던 자취이다. 이는 결혼 첫날밤 성관계를 했던 자취가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부정적인 말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찬양하는 것이다. 모든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셨는데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창조물은 남자와 여자이다. 그 중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며 살도록 만드신 것이 정말 놀라운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처녀는 순결한 성관계를 상징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남자와 여자가 순결한 성관계를 갖는 것은 정말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19절을 가지고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식으로 “한강에 배 지나간 자국 나냐?” 라는 식으로 이해했다면 완전히 잘못읽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 중의 백미는 남녀간의 아름다운 성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은 의학이 발달해서 성관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야 당시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순결한 처녀인지 음란한 여자인지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말은 20절에서 등장하는 간음하는 여자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순결한 처녀가 첫날밤을 지낸 것은 자취라고 했는데 이번에 간음한 여자가 성관계를 한 흔적은 자취가 아니라 길이다. 하도 많은 남자들이 다녀 갔기에 아예 길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간음한 여자가 음식을 먹고 입을 싹 씻으며 나는 아무런 악한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흔적이 남지 않는 기이한 것들을 말한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은 성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배고프면 음식을 탐하듯 여러 남자들과 밥 먹듯이 성관계를 하고서도 그 입을 싹 씻으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성관계를 더럽고 추한 관계로 만든 것이다. 가족관계를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게 되는 더러운 성관계이다.
단순히 부정한 성관계만 안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배우고 훈련 받지 않은 사람이 자기 탐욕대로 하는 것의 대표로 부정한 성관계를 예로 든 것이다. 사람들 몰래 죄를 범하고 완전범죄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멸시하고 말초적이고 동물적인 탐욕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이런 부정한 성관계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멸시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만 속이면서 탐욕을 따라 더러운 일을 하고도 안했다고 시치미를 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관계 안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며 그 사랑을 만드신 놀라운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며 살아야 한다. 항상 하나님께서 내 모든 행위를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결론 및 적용
끊임없는 탐욕은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무시하게 하는 교만함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모든 종류의 탐욕을 내려놓아야 교만도 아래로 내려온다. 탐욕을 내려놓지 않는 한 교만이라는 영적인 병은 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탐욕 중에서 가장 파괴적인 것은 음행이다. 음행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부부간의 관계도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한다.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 말씀의 경고를 짓밟고 자기 뜻대로 음란한 성관계를 즐기며 인간의 행복 추구권이라고 떠드는 것이다.
우리의 교만이 땅으로 내려 오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탐욕을 내려 놓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욕구를 다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그 이상을 넘어서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재물에 감사하고 그 이상을 더 갖으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위에 만족하고 더 높아지려 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짝지워주신 배우자에 만족하고 배우자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 안된다. 우리의 탐욕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겸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An “AirDancer” from LookOurWay. Credit: Sam Greens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