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9장에서는 지혜가 준비한 잔치와 음녀가 준비한 잔치를 비교했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따르며 하나님을 아는 자들과 교제하고 가르치고 배우며 살아가야 한다 했다. 성욕과 물질과 명예와 같은 탐욕을 쫓으라고 유혹하는 음녀를 따라가면 멸망한다는 것이다. 이제 오늘 말씀 4절과 15절에는 가난이란 말이 겉껍질로 있고 부(富) 라는 말이 속껍질로 나온다. 그 가운데에 있는 알맹이는 의인과 악인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서는 의인과 악인을 가난이라는 겉껍데기와 부(富)라는 속껍데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1-5절은 지혜로운 아들과 부(富)의 관계를 말한 뒤 6-14절은 엉뚱하게도 개인간의 의사소통에 대해 말한다. 15-16절은 다시 부(富)로 돌아가며 안전과 연결시킨다. 우리의 생각으로 언뜻 보면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고대 히브리인이었던 잠언 기록자는 분명히 연결해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잠언의 기록자는 먼저 손으로 지혜롭게 일하는 것에 대해 말한 후 주로 머리에 있는 기관을 통해 의인과 악인의 의사소통에 대해 말한 것이다. 다시 마지막에서는 의인의 재물과 악인의 재물의 결과를 비교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지혜롭게 일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지혜롭게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면서 의로운 재물을 얻으라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갈지 알아보도록 하자.
I. 지혜와 부의 관계(2-5)
1절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만 미련한 아들은 어머니의 근심이라 했다. 1:8절에서 아버지가 징계를 하며 반복해서 훈련시켰던 훈계와 다정한 대화로 가르치셨던 어머니의 법(תוּרה: Torah)을 저버리지 말라 했다. 이러한 부모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순종하는 아들은 부모님의 기쁨이지만 듣지 않고 저버리는 아들은 부모님의 슬픔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슬프게 하는 것인가?
2절은 불의와 공의라는 말이 대조되는데 5절은 지혜있는 아들과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 대조된다. 따라서 지혜롭게 일하는 아들은 공의로운 아들이고 게으르고 부끄러운 아들은 불의한 아들인 것이다.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은 2절의 “불의한 재물” 로 자신의 배만 채우고 이웃에게는 해만 끼친다는 뜻이다. 반대로 “공의는 죽을 사람도 건져낸다” 라고 했는데 의로운 아들이 행하는 공의는 자신을 살릴 뿐 아니라 이웃을 죽음에서 건져낸다는 것이다.
2절의 이러한 의미는 11:4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11:4절은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라고 했다. 악인이 모은 재물이 심판 날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인이 자신의 재물로 행한 공의는 죽을 이웃도 살려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의는 마지막 날에도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대조되는 것은 불의한 자의 ‘재물’ 과 공의를 행하는 자의 ‘공의’ 인 것이다.
의인은 자신의 재물로 죽어가는 이웃을 살리기 때문에 3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웃을 살리는 의인이 굶주리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이신 하나님은 의인들을 굶주리지 않도록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웃을 살렸다고 큰 부자가 되게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웃을 살린 보상으로 굶주리지 않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신다 했다. 이는 악인의 탐욕은 좌절시키신다는 뜻이다. 악인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물질을 많이 모으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님께서 그 탐욕을 좌절시키신다는 것이다. 이는 악인의 편에 가담하지 말라는 권고이다.
왜 악인의 편에 가담하지 말아야 하는지 4-5절에서 계속 이어진다. 4절은 원어에서 가난이란 말로 시작하고 5절의 끝은 부끄러움이란 말로 끝이 난다. 게으른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 안쪽 4절에는 부유하다는 말이 나오고 5절에는 지혜로운 이라는 말이 나온다. 의인은 지혜롭게 때를 따라 부지런히 일하기에 부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와 손이 부지런한 자이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같은 말이지만 원어는 서로 다른 말이다. 게으른 사람의 손이란 아무것도 안 하면서 펴고 있는 손바닥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팔꿈치부터 손가락 까지를 가리키는 말로 부지런히 움직여 일하는 손의 동영상이다. 부지런히 일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은 안하고 하나님만 거룩하게 예배한다고 핑계를 대는 것이 악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교회는 한 몸인데 한 몸의 지체가 어려운데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룩이 아니라 악한 것이다. 물론 계속 이어지는 잠언에는 의인도 일시적으로 가난하게 되고 악인도 부유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히 일하는 의인을 보호하시고 게으른 악인은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5절은 왜 악인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의인은 부유하게 되는지를 서로 반대되는 말로 대조하며 설명한 것이다. 먼저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라고 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여름에 밀을 거두기 때문에 여름은 거두는 시기이다. 거두는 시기에 부지런히 일해서 수확하는 아들은 지혜로운 아들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라고 했다. 여름이란 말과 추수 때라는 말은 같은 뜻이다. 추수(秋收) 라고 변역했지만 사실 여름에 거두는 것이기에 하수(夏收)라고 해야 하나 그런 말은 없기에 수확기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거두는 자와 잠자는 자가 서로 반대말이다. 지혜있는 아들은 일할 때에 열심히 거두는 자이기에 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부끄러운 아들은 거둘 때에 열심히 잠만 자기에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해야 할 때 일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다.
손으로 지혜롭게 부지런히 일해서 곡식을 모은 지혜로운 아들은 자신만이 아니라 죽게 된 이웃들도 살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손바닥을 펴고 뒹굴거리는 게으른 아들은 지혜로운 아들에게 피해만 끼칠 뿐 이웃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II. 지혜롭운 의사 소통(10:6-14)
일하는 손으로 서로 비교되던 의인과 악인은 이제 의인의 머리와 악인의 입, 지혜로운 자의 마음과 미련한 자의 입, 의인의 입과 악인의 입, 명철한 자의 입술과 지혜 없는 자의 등이 서로 비교가 된다. 앞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손을 비교하면서 지혜롭게 손으로 일하라고 가르쳤다면 이제 의인과 악인의 의사 소통법을 비교하면서 지혜롭게 다른 사람과 의사 소통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먼저 6절은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라고 했다. 이는 원어를 그대로 직역해서 본래 원어가 전해주는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의인의 머리 위에 내려지는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인데 왕이나 제사장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그림이다. 대조되는 구절은 원어에서 “악인의 입은 폭력을 가렸다” 이다. 이는 레위기 13:45절에서 문둥병자가 손으로 부정한 자기 코 밑 수염을 가리는 것과 같은 그림이다. 듣는 데서는 좋은 말을 하지만 돌아서면 말로 남을 해치는 모습을 손으로 입에서 나오는 폭력을 감추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의인은 축복하는 손이 의인의 머리를 가리고 있지만 악인은 자기 손으로 폭력을 가려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7절은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하느니라” 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말씀을 통해 받는 의인은 그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는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짓으로 자신을 가리며 남을 해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죽고 나면 시체가 썩을 때 그 이름도 함께 묻혀 썩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의인과 악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남은 이름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8절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은 계명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계명이란 하나님 말씀에 담긴 명령의 권위를 뜻하는 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6절에서 말한 머리에 내리는 축복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생각으로 행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배우고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라고 했다. 원어는 “입을 나불거리는 바보는 멸망에 이르게 된다” 는 뜻이다. 6절에서 손으로 가리고 감춘 폭력을 이제 드러내는 모습이다. 이 어리석은 바보는 하나님 말씀을 흘려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산다. 바보들도 말씀은 잘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법이다. 그러나 정작 행할 때는 자기 생각대로 자기 감정대로 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 마음에 담겨있는 생각대로 떠든다. 이 바보들은 이웃의 잘못과 허물과 과거를 나불거리며 떠들어서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면 자기 육신의 생각대로 나불거리느냐에 있다.
9절은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라고 했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따라 흠 없이 행하면 그 앞길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지혜가 인도하는 그 앞길이 평탄하고 안전하게 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행하는 길을 구부러지게 만드는 사람은 마침내 사람들에게 들통이 난다는 것이다. 보는데서는 꿀을 바른 듯 달콤하게 말하면서 돌아서서 말로 찔러대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다 들통이 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적인 관계를 깨뜨리고 믿음의 공동체와의 관계도 깨뜨린다는 것이다.
10절은 6-9절에서 비교한 의인과 악인의 의사소통에 대해서 비교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두 가지 잘못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다.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라고 했는데 이는 관심이 있다고 윙크하는 눈짓이 아니다. 말로 남을 해치고 욕을 한 것이 들통나자 적반하장 격으로 자신이 해를 끼친 사람에게 얼굴을 붉히고 인상을 찌푸리는 눈짓이다. 그러한 적대감을 가득 담은 눈짓은 상대에게 고통을 준다는 뜻이다. 자신이 잘못해 놓고는 그것이 들통나게 했다고 화를 내며 사람들에게 안면 싹 굳히고 싸늘하게 대하는 사람이 바로 악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눈짓으로만 적대감을 표현하면 그래도 다행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열이면 열 다 그 적대감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터트린다. 이처럼 어리석게 입을 놀려 상대를 다치게 하면 멸망한다는 것이다. 이는 8절 끝부분의 반복이다. 눈을 흘기면 남에게 고통을 주고 또 입을 놀려 남을 해치면 자기가 멸망한다는 뜻이다.
11절은 의인에 관한 부분만 다르고 악인에 대한 부분은 6절과 똑같다. 6절에서 의인의 머리에 내려진 축복이 이제 그 입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생명의 샘물이라 했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메마른 사막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주변 땅을 적셔 나무가 자라 숲을 이루게 해서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축복으로 알고 머리로 받아서 입으로 말하는 의인의 말들은 그렇게 공동체를 살린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악인의 입에는 폭력이 있지만 그것을 손으로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의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악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똑같이 다 좋은 말이고 남을 살릴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의인의 입의 말은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져 나오는 진실된 말이지만 악인의 입의 말은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숨긴 거짓된 말인 것이다.
이제 12절은 11절에 나온 의인의 말과 악인의 말의 근원을 비교한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란 말은 미움은 잠자고 있는 다툼을 흔들어 깨운다는 뜻이다. 원래 악인이 말로 해친 사람들의 마음에는 다툼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그 다툼이 깊이 잠이 들고 만 것이다. 상처를 받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던 다투던 마음은 이미 잠이 들었고 생각도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상처를 준 악인은 인상을 쓰고 분노를 눈짓으로 표현하다가 마침내 찾아가서 화끈하게 대화로 풀자며 모든 것을 다 들추면 그것이 잠자고 있던 다툼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잠자는 다툼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이와 대조되는 구절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느니라” 라는 것이다. 6절과 11절에서 악인은 그 손으로 자신의 폭력을 덮어 가리고 있었는데 의인은 그 손으로 상대의 모든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이다. 허물이란 본래 남의 재산이나 권리를 침범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죄도 역시 이 말을 쓴다. 의인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이러한 사람의 모든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사랑의 손으로 덮어준다는 것이다.
13-14절은 의인과 악인에게 주어질 결과들을 비교한다. 13절은 명철한 사람의 입술에서는 지혜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는 머리로 받은 축복이 그 마음을 거쳐 입술로 흘러 나오는 것이다. 그 입술은 앞에서 말한 생명의 샘물이 흘러 나오는 샘의 입구이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인내와 사랑으로 덮어주고 받은 은혜와 깨달음을 가르치는 모습이다. 이와는 반대로 지혜가 없는 사람의 등에는 채찍이 떨어진다 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이란 원어에서 심장이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심장에 생각이 머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말 식으로 하면 뇌가 없는 사람이고 생각이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 뇌에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의 등짝에는 하나님의 채찍이 떨어져 등에 깊은 고랑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자기를 스스로 칼로 찌르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14절은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이라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잠언에 나온 지식들을 보물처럼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의 입은 멸망을 재촉한다 했다. 미련한 사람의 입은 멸망의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 멸망이라는 폭탄이 터질 때 멸망의 근처에 있던 미련한 사람의 입은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들은 그 멸망의 폭탄을 막는 방어벽이 되고 그 벽이 멸망의 파괴력을 흩어버릴 것이다.
III. 부와 안전의 관계(15-16)
이제 다시 부유함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 15절은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 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10:3-5절에서 부지런하게 일해서 소출을 거둔 지혜 있는 아들을 뜻하는 것이다. 진보적인 기독교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은 거룩하고 부자는 타도해야 할 악의 세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부자 자체를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잠언의 기록자는 부자의 재산이 견고한 성이 된다고 했다. 성은 도시를 지키는 벽이다. 재산이 자신을 지켜주는 벽이 된다는 뜻이다. 이와는 반대로 빈곤은 그를 망하게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는 것을 무조건 칭찬하고 가난을 게으름이라 무조건 책망하는 것인가? 18:11절은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 라고 부정적으로 말했다. 부자는 자기 재물 때문에 교만해진다는 것이다. 18:12절은 그러한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했다. 따라서 부자의 재물이 견고한 성이라는 말은 부자를 칭송하거나 부자가 나쁘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답은 16절에 나온다.
16절은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라고 했다. 수고라는 말은 고통스럽게 일한 대가라는 뜻이다. 지혜로운 아들인 의인이 고통스럽게 일해서 모은 재산은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악인의 소득이란 땀 흘려 일한 대가가 아니고 옳지 않은 방법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얻은 결과이다. 이러한 소득은 죄에 이른다 했는데 죽음에 이르는 죄인 것이다. 따라서 일할 수 있는 때에 성실하게 땀을 흘려 일해서 모은 재산만이 성벽이 되어 자신을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악하게 모은 재물은 멸망하게 한다는 것이다.
결론 및 적용
잠언의 기록자인 솔로몬은 지혜로운 의인과 부자를 연결하고 지혜가 없는 악인을 가난한 사람과 연결한다. 하지만 부자는 지혜롭고 가난한 사람은 지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일해야 할 때 손으로 수고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일해야 할 때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놀면서 남의 재물을 탐하는 가난한 자가 악하다는 것이다.
일하는 손만 의롭고 악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할 때 만나는 사람들과 의사소통 하는 것도 의로운 의사소통과 악한 의사소통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말씀의 지식들을 차곡차곡 쌓아 저장하고 그 저장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으로 우리를 해치는 원수들을 용서해 주고 그들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의사소통이다. 반대로 지혜가 없는 악인들은 눈짓으로 분노를 드러내고 잠자고 있던 다툼을 흔들어 깨우는 말을 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다른 이들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그 깨달은 지혜를 입술로 전해서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열심히 일해서 모은 재산은 견고한 성이 되어 자신을 지켜주고 이웃의 생명도 살리게 된다. 믿는 자들은 그러한 지혜로운 의인이 되어 베풀며 그 입이 생명을 살리는 오아시스가 되어야 한다.
사진출처: Max Picel Free Great Picture: Peru Oasis of Huacachina Sandboarding Huacach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