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본문을 읽을 때 사람들은 흔히 예수님의 어머니의 믿음이나 물 떠온 종의 믿음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문맥의 흐름을 따라 읽는다면 그렇게 볼 수 없다. 바로 앞에서 메시야를 듣고 직접 만난 증인들의 릴레이가 나왔다. 예수님은 나다나엘과 다른 제자들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 했다. 이제 그 기적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증언을 듣고 눈으로 직접 예수를 만나 확인한 뒤 다른 사람에게 증거했다면 이제 하늘이 열리는 기적을 기적을 직접 볼 차례인 것이다.
예수님의 모친이 주방에 들어가 잔치의 포도주를 걱정한 것으로 볼 때 가까운 친척의 결혼식에 갔을 것이다. 당시 결혼식은 오늘날 미국의 결혼식처럼 RSVP로 확인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갑자기 따라와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상치 못할만큼 많이 왔기에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예수님의 모친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한 말은 우리는 거칠게 반항하는 것처럼 느낄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자여!’ 라고 부른 말은 깊은 사랑이 담긴 존칭이다.
절대로 미국식의 Ma’am 수준의 경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 상에서도 제자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며 “여자여” 라고 불렀다. 이제 곧 공생애가 시작될 것이기에 예수님은 더 이상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가정 일을 돌볼 수 없기에 하신 말씀이다.
많은 설교자들은 예수님의 모친의 이러한 요청이 바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믿은 믿음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어 나오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는 말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친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여줄 것으로 믿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버지가 없으면 장남이 가장 노릇 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모친은 예수님께 문제 해결 방법을 찾아 보라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하신 것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어 대답하시는 예수님 방식의 대답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사람들의 생각범위 안에서 질문하고 요청하지만 예수님은 늘 그 생각을 뛰어 넘으셔서 하나님의 수준에서 답하셨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어 자신이 하나님이라 하셨다. 4:15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이라고 하셨다. 5:6절에서 38년된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에 넣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다. 6:32절에서 무리들이 구약에서 만나를 내려 믿게 한 것과 같은 기적을 요구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 하셨다. 11:22절에서 마르다는 이제부터 예수께서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믿는다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반복되는 형식들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의 모친이 생각도 못한 말씀과 일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모친은 실제 포도주가 부족한 문제로 인해 가문이 망신을 당하게 생긴 일을 해결해 주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다. 때 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광의 자리에 드는 때를 주로 가리키는 말이다. 5절에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라고 한 것도 기적을 예상하고 한 말이라 볼 수 없다. 당시는 포도주 원액 1/3-1/10 정도에 물을 채워서 음료수처럼 마셨다. 이 하인들은 물을 길어다가 연회장의 지시에 따라 포도주에 물을 섞던 힘깨나 쓰던 하인들이다. 이들을 예수님께 붙여 준 이유는 예수께서 사오든지 이웃에서 빌려오든지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낭독을 듣던 청중들에게는 기적을 기대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말이었을 것이다.
6절은 갑자기 엉뚱하게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여있는지라” 라고 말한다. 한개가 20-30 gallon 정도 드는 항아리라고 하니 하나에 25 gallon(94.6 liter)정도라면 150 gallon인 셈이다. 4자짜리 우리 집 어항의 3배 정도 되는 양이다. 거기에 물을 가득 채우려면 한번에 5 gallon 씩 나른다 해도 두사람이 15번은 길어 날라야 되는 양이다. 하인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결례의 항아리 여섯에 물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8절에서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셨다. 여기서 ‘떠서(draw)’ 라는 말의 해석에 전통적인 해석과 다른 해석이 있다. 원래 ‘떠서’ 라는 말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경우에 쓰는 말이다. 요한복음 4:15절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 70인역 구약성서를 보면 창세기 24장에서는 라반의 딸들이 샘물을 길었다. 출애굽기 2:16, 19절은 이드로의 딸들이 샘물을 길었다. 이사야 12:3절에서는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라고 할 때도 썼다. 고대 그리스의 문헌들에서는 배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낼 때도 이 말을 썼다. 이 말이 비유적으로 쓰이면 고된 노동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이 말이 명사형으로 바뀌면 밧줄이 달린 두레박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그림에 비추어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라는 말을 해석하면 이제는 두레박으로 항아리에서 물을 길어다가 연회장에 갖다 주라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래서 B. F. Westcott은 하인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연회장에게 주라는 말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을 분명하게 증명할 길은 없다. 물을 긷는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만으로 이렇게 분명히 주장할 근거는 분명하지는 않다. 앞에서 말한대로 70인역 구약성서에 나온 이 단어를 찾아보고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비교해 보고 요한복음에서 사용한 상징들에 비추어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Westcott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일꾼들에게 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항아리에 채우라고 시키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항아리에서 물을 퍼다 주라는 말이 아니고 다시 샘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잔치를 맡은 이에게 주라고 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9절의 “물 떠온 하인들” 이란 말도 “물을 길어온 하인들” 이라는 뜻이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수많은 상징(symbolism)들이 가득 차 있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도 예수님은 수많은 상징들과 비유로 가르치셨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상징들은 요한이 창작해 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예수께서 사용하시던 상징들을 중심으로 요한이 증거한 것 뿐이다.
만약 예수께서 시키신 일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면 유대교 정결법에 따른 항아리에 땀을 흘리며 물을 채운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가는 유대교의 거룩함을 상징할 수 있다. 이 물의 양이 많기는 하지만 유한한 것이다.
이에 반해 샘에서 물을 긷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무한히 부어주시는 은혜를 상징할 수 있다. 힘들여 여섯동이에 물을 가득 채웠는데 그 물을 사용하지 않고 다시 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연회장에게 갖다주는 것으로 해석하면 형식만 남은 제한된 유대교의 정결법의 폐기선언하시는 그림과 예수님을 통해 한없이 쏟아부어 주시는 은혜가 선명하게 대비된다. 또 2:13-22절에서 성전청결 사진을 통해 유대교의 성전예배를 폐기선언하시는 것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유대교의 정결법에 따라 정결하게 된 사람들은 다시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한없이 쏟아 부어주시는 생명의 말씀들로 정결하게 된 사람들은 다시는 부정하게 되지 않는다. 4:14절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이라고 하셨다.
연회장은 물로된 포도주를 맛보고 감탄을 한 것이다. 그래서 신랑을 불러다가 왜 좋은 포도주를 이제까지 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한 것이다. 연회장은 예수님의 기적의 공식적인 증인인 셈이다. 물을 길어온 하인들이 두명이라면 이 세사람들은 완벽한 증인들이다. 요한복음 1:3절에서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분께서 한없이 솟아나는 샘물을 최상품의 포도주로 바꾸어 주신 것이다. 물은 생명의 말씀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종말론적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하실 것을 상징한다. 제자들은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인자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제자들은 장치 이루어질 종말론적 천국 잔치의 모형을 지켜보고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처음 표적이라 했다. 11절 끝부분에 보면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라고 했다. 이 표적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분명하게 믿게 된 것이다. 이 부분의 핵심은 바로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라는 것이지 마리아의 믿음이나 물 떠온 종들의 믿음이 아니다.
이 기적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한다. 이 기적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은 물을 길어온 하인들인 것 같이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이 길어온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믿었다는 말은 요한복음 어디에도 없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 시키는 대로 하니 기적이 일어났다며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설교한다면 정말 엉뚱한 해석이 된다. 수많은 하객들이 그 포도주를 맛보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기적을 알지 못했다. 연회장도 역시 몰랐고 믿지도 않았다. 오직 이 기적은 제자들을 위해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바로 제자들이다.
한번 정리해보자. 바로 앞부분에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확인한 뒤 그 감격에 넘쳐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증거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렇게 듣고 만나고 증거한 뒤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만약 이러한 세 단계의 경험이 없다면 예수님을 통해 어떤 기적이 행해지더라도 믿지 않는다. 믿음의 시작은 기적을 체험하는데서 나지 않고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듣고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뒤 전파하는데서 나기 때문이다. 기적은 믿음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일 뿐이다.
12절에 보면 또 한가지 단계가 나타난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이 함께 가버나옴에 내려 가셔서 함께 거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 가족에 끼어든 모양새이지만 실제 육신의 가족인 어머니와 형제들은 물러나고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이 함께 거하게 된다. 따라서 듣고, 만나고, 증거하고, 기적을 체험한 후에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먼저 예수님에 대해 듣고 또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기쁨을 얻었다면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면 그 다음에 우리에게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 기적은 한없이 쏟아 부어주시는 우리 주님의 은혜이다. 그러한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우리는 비로소 주님과 항상 함께 거하는 가족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