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읽을 때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게 읽다보면 본문 자체가 강조하는 강조점을 놓치기 쉽다. 우리는 성경 본문이 무엇을 중심으로 증거하고 있는지 보고 그에 따라 읽어야 한다. 요한복음 1:29-51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듣고 직접 만난 뒤 다른 사람에게 증언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의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지 예수님 자체가 아니다.
증인이란 직접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다. 이 부분에서 첫째 증인은 John the Baptist 이다. 이후 요한이라 칭하겠다. 사도 요한을 언급할 때는 사도 요한이라 하겠다. 요한 자신도 알지 못했는데 성령께서 말씀해 주셔서 알았다는 것이다. 또 그 들은 말씀대로 직접 놀라운 증거를 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는 것이다. 듣고 직접 목격하고 난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계속 반복된다.
35절에 보면 요한은 자신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증거했다. 누구나 스승이라면 제자들에게 계속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한다. 하지만 요한은 자기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라고 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증인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만 각광을 받도록 하고 자신은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하는 존재들이다.
요한의 두 제자들 중 한명만 누구인지 밝힌다. 그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 요한의 바톤을 이어받아 증인의 사명을 하는 두번째 주자는 안드레이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랍비라 부르며 최고의 존경을 표시하고 예수님이 사시는 곳에 가서 함께 살며 배우겠다는 뜻을 표시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와 배우겠다는 제자들에게 “오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보게될 것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주로 하나님이나 메시야를 보는 일에 쓰였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오면 창조주이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땅에 임하신 메시야를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 때가 열시쯤 되었다고 했는데 오후 4시쯤이다. 요한의 두 제자들은 그날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예수님께 배웠다.
두번째 바톤을 받은 주자인 안드레가 무엇을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를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메시야를 만난 것은 틀림없다. 다음날 안드레는 제일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말했기 때문이다. ‘찾아(ευρισκει)’ 라는 말은 어디 있는지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발견한다는 뜻이다. 생동감있게 현재형으로 중계방송하듯 말하고 있다. 안드레는 메시야를 만난 뒤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제일 먼저 사랑하는 형 시몬을 찾아 다닌 것이다. 이 장면이 영화라면 카메라는 기쁨에 넘쳐 어쩔 줄 모르는 안드레의 표정을 화면 가득히 담았을 것이다. 안드레는 시몬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한 뒤 예수께로 데려와 직접 만나게 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자 마자 누구의 아들인지 앞으로 게바라 부르겠다 하며 별명까지 지어주셨다. 이는 소경을 눈 뜨게 하신 기적만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다.
43절도 “다음 날” 이란 말로 시작한다. 한글 성경들과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43절을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 하셨다(ESV: Jesus decided to go to Galilee)” 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원어는 “그가 갈릴리로 떠나려 했다(NASB: He purposed to go into Galilee)” 라는 뜻이다. 한글 번역 전부와 영어번역 성경들 대부분은 예수 라고 번역했다. 영어의 NASB만이 원어대로 ‘he’ 라고 번역했다. 그는 안드레 일 수 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안드레 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더 잘 어울린다. Carson(157)은 43절의 ‘그’ 가 안드레 라고 말한다. Witherington(71)도 Carson의 견해를 조심스럽게 지지한다(I am inclined to accept this view). 본인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두사람의 견해를 지지한다.
40-42절은 계속해서 안드레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41절에 보면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라고 했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안드레가 먼저 시몬을 발견했다면 그 다음에 안드레가 발견한 사람이 뒤에 나와야 한다. 안드레는 자기 스승 침례 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것을 확인한 뒤 넘치는 기쁨을 어쩔 줄 몰라 제일 먼저 형제 시몬에게 달려가 증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증거한 것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먼저 시몬을 찾아” 라는 말에서 ‘먼저(first)’ 라는 말이 필요가 없다.
또 43절에서 “빌립을 만나” 라는 말도 41절과 마찬가지로 “빌립을 찾아 다니다가 발견해서” 라는 뜻이다. 만약 43절의 그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은 알지도 못하는 빌립을 찾아 다니다가 빌립을 발견했다는 뜻이 된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니 가능하다. 그러나 안드레가 자기 형에게 먼저 증언을 한 뒤 또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 빌립을 찾아 예수님을 증거하려했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으로나 구조상으로 잘 어울린다. 43절에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라는 말도 안드레가 예수님을 자기 동네로 모셔가고 싶어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어울린다.
42-43절을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반복되는 구조를 볼 수 있다. 42절에서 안드레가 먼저 시몬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소개하자 예수님이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43절에서도 안드레가 빌립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소개하자 예수님이 빌립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2절과 43절은 모두 안드레가 주인공이고 안드레가 두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와 소개하자 예수께서 한 말씀 하신 것이다. 44절에 보면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동네 사람이라 했다. 가장 사랑하고 친밀한 사람에게 메시야를 증거하고 만나게 한 것이다.
안드레의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이제 빌립이다. 것이다. 45절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라고 했다. 45절에서 “찾아” 라는 말도 역시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다니다가 발견했다는 뜻이다. 찾아 발견하다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빌립도 나다나엘을 1982년도 송골매의 노래처럼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이” 아니다. 찾고 또 찾아 다니다가 드디어 발견하고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기록한 율법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한 것이다. 이는 율법서와 선지서를 뜻하는 것이고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오신 메시야를 만났다는 뜻이다. 나다나엘은 구약성경에 정통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잘 알고 기다리던 그 메시야를 발견했다고 전하기 위해 감격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찾아다닌 것이다.
이제 카메라의 초점은 나다나엘에게 맞추어졌다. 나다나엘은 빌립에게 다짜고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 라고 말한다. 선한 것이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는 나사렛에서 나올 수 없다는 뜻이지 나사렛 자체를 무시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야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빌립은 두말하지 않고 “와서 보라” 라고 말한다. 원어는 “오라! 그리고 보라!” 라는 두개의 명령형이다. 먼저 “와봐!” 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데리고 가서 “봐!” 라고 했을 것이다.
47절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보자마자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 이라고 하셨다. 참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늘에 연결된 사닥다리와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 나다나엘도 지금 메시야를 만났는데 그분은 진짜 하나님이시다. 야곱은 거짓 투성이인 삶을 살았지만 나다나엘은 그런 속임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다나엘은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라고 하셨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그 나무 아래서 율법을 연구하는 율법교사들이 율법을 연구했다. 빌립은 예수님을 한 곳에 계시라고 하고는 나다나엘을 찾으러 다니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만났을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은 분명히 그 자리에 없었는데도 자신을 다 보고 계셨다고 하자 나다나엘은 놀랐다. 예수님을 무시하던 나다나엘은 랍비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하며 갑자기 최고의 존경모드로 전환했다.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할 수 없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50절에서 한마디 더 보태신다. 50절에서는 “더 큰 일을 보리라” 라고 하셨다. 더 큰 일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모습을 볼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참 이스라엘인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인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기적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증언을 듣고 직접 눈으로 보고 놀라 메시야라고 고백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증거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우리의 증언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들어도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스스로 만나 놀라운 감격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증거해야 한다. 요한이 안드레에게 넘겨 준 그 바톤은 계속 전달되어 왔다. 그래서 우리도 듣고 직접 만나서 증인이 된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가 만난 메시야의 감격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바톤을 넘겨 주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