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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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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d Passages

골로새서 1:9-14

사랑으로 훈련하는 기도

안정섭 목사 · 골로새서 1장 강해 설교

골로새서 1:1-8절의 내용은 골로새 성도들 안으로 뚫고 들어온 복음의 씨앗이 열매 맺고 자라기 위해서는 듣고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여 훈련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사랑의 훈련은 정말 고통스러운 과정이라 했다. 그러나 인내하며 진짜 사랑을 배워가다 보면 가짜 사랑을 떠드는 거짓 교사들에게 속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1:9-14절은 골로새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진짜 사랑으로 훈련하며 배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기도의 내용을 보면 어떻게 그 사랑으로 계속 훈련하여 그 사랑을 완성해 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9절은 “이로써”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이런 이유 때문에” 라는 뜻이다. 1:4절에서 믿음에 근거해서 거룩한 자들에게 사랑을 행해서 훈련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 1:8절에서 바울에게도 그 사랑을 보여준 것을 가리킨다. 골로새 성도들이 사랑으로 훈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쉬지않고 기도한다고 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계속 사랑으로 훈련하여 그 사랑을 완성해 나갈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도한 내용은 9절 뒷부분에 있는 “하나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이다.

아는 것이란 지식이란 말인데 정확하고 완전한 지식이란 뜻이다. 6절의 “깨달은” 이라는 말도 같은 말에서 온 말이다. 6절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정확하고 완전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신 은혜이다. 또 10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라는 말에서도 나온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지식이 점점 성장해가고” 라는 뜻이다. 유대교에서는 정확하고 완전한 지식이란 율법을 통해 완성된다고 했다. 바울도 전에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바울이 회심한 뒤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이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지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것이다. 바울은 그 지식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가득 채워지길 쉬지않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식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지식이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두 가지를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다. 먼저 골로새서 1:28절과 3:16절에 보면 모든 지혜로 가르치라고 했다. 또 4:5절에서는 외부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대하라 했다. 따라서 지혜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진리를 바르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그 가르침을 드러내야 한다. 다른 사람 때문에 기분 상했다고 울컥하는 심정을 말로 표현했다면 진리를 드러내는 지혜가 아니라 아직 미련한 것이다. 그것을 참고 견뎌서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이 발견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신령한 지혜란 성령님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또 모든 총명이란 말도 역시 모든 신령한 총명이다. 총명이란 말은 원래 두 강이 하나로 합쳐서 흐르는 것을 말한다. 두개의 지식들을 하나로 합쳐서 이해하는 능력을 총명이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따로 기억하고 있는 지식들을 하나로 합쳐서 깨닫는 능력이다. 출애굽기 31:3절과 36:31절에 보면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라 했다. 지혜와 총명은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바울은 이 두가지를 신령한 지혜와 신령한 총명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가득 채워주시길 기도하는 지식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기억한 것을 완전히 이해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며 가르치는 것이다. 또 기억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지식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가득 채워지길 바라는 것이다. 채워진다는 말은 그릇에 물이나 곡식들이 가득차는 것을 나타내는 그림 언어이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농작물의 비유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의 알곡들이 성령님을 통해서 골로새 성도들에게 가득 차서 흘러 넘치길 바라는 그림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지식들은 먼저 10절을 보면 거룩한 삶을 살게 한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란 단순히 신비한 영적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 신비한 영적 경험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경험이다. 그 거룩함도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거룩함이다. 바울은 9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채워지길 기도했다. 이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여기서 멈추면 안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해야 한다. 실천을 통해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열매가 점점 성장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식은 단순히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찬양으로 이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지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느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지식에 따라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되면 그 깨달은 진리는 행동과 가치 있는 삶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건조한 팔레스틴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오늘 말씀을 전달하고 있다. 팔레스틴 만큼 건조하지는 않지만 지중해 연안의 지역들도 모두 겨울철에 비가 오고 여름철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5절을 보면 골로새 성도들은 이미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9절을 보면 단순한 지식에서 벗어나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도 이미 어느 정도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기도한 것은 그러한 지식이 계속 채워져서 흘러 넘치길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들을 혼자서 간직하고 있으면 아무런 성장이 없다. 10절을 보면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라고 했다. 행한다는 말은 본래 걸어간다는 뜻이다. 이 행함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행함이 아니다. 자신은 죽어도 하기 싫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에 참고 사랑을 행하는 것이 바로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어서 이러한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는다 했다. 알곡 형태로만 가득 차 있던 지식들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꾹 참고 사랑으로 행하면 그 알곡들이 싹을 터 다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이다. 원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게 하고” 라는 뜻이다. 앞에서 맺은 열매가 점점 자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거름이 되어 열매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거름이 없으면 그 식물은 성장하지 못한다.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성장할 단계에 이르면 그 농작물은 완전하게 성장한 상태이다. 이 때가 바로 문제가 되는 때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에서는 곡식이 한창 익을 봄철에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보리는 닛산월(Nisan)인 3월에 수확한다. 3월은 늦은 비가 내리는 시기이기에 보리는 큰 가뭄 없이 수확하게 된다. 그러나 밀은 시반월(Sivan)인 5월에 수확한다. 4월부터는 건조하고 뜨거운 열풍이 몰아 닥치는 시기인데 밀은 한 달이 넘는 기간을 버티어야 수확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밀은 비가 오는 시기에 완전히 성장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비가 오지 않게 되는 4월 이전에 성장과 결실을 마쳐야 한다. 그래야 비가 오지 않는 4월을 이슬로 근근히 버티며 생존할 수 있고 그러면 건조한 5월이 되어 수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을 바탕으로 11절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인내하며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열매를 맺고 열매가 성장할 만큼 장성하게 된다. 이 때는 신앙이 어느 정도 성숙해진 단계이다. 이 시기가 되면 어려움이 닥치게 된다. 이 시기에는 팔레스틴의 밀들이 아침 저녁 하늘로부터 내리는 이슬로 버티는 것처럼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버티게 된다. 절대로 골로새 성도들 자신의 힘이 아니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실천하면서 얻게 되는 능력이다. 이는 그의 영광의 힘이라 했는데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다시 살리신 그 힘이다. 그 힘으로 가뭄의 시기의 뜨거운 열기를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11절 뒷부분에서는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라고 한 것이다. 원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다. 인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시길 소망 중에 기다리며 우리 주님처럼 인내하는 것이다. 오래 참음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오래 참으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오래 참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행하기는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바울은 한 술 더 떠서 ‘기쁨으로’ 하라고 했다. 많은 영어 번역들이 ‘기쁨으로’ 라는 말을 12절에 붙여 놓았다. 1977년에 번역된 New American Standard Bible을 시작으로 그 이후의 대다수의 번역들이 그렇게 번역했다. 기쁨으로 라는 말이 감사한다는 말을 꾸며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성경도 1913년 Von Soden 이후에야 이 말을 12절에 붙였다. 본인이 고대의 신약성서 필사본들을 250개를 직접 다 뒤져 보았다. 그 결과 단 3개의 사본만이 이 말을 12절에 붙여 놓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현대의 성경 해석자들이 기쁨으로 인내하고 오래 참는다는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덕목을 이해하지 못했기 기쁨으로 라는 말을 12절에 붙인 것이다.

사실 기쁨으로 라는 말은 인내와 오래 참음이라는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를 살리신 그 능력으로 우리를 인내하도록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똑똑한 학자들이라도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속이려던 거짓 교사들도 이처럼 기쁨으로 인내와 오래 참는다는 말은 흉내도 못 내던 말이다. 따라서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거짓 교사인가 아니면 진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참된 교사인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성령의 열매에서도 인내가 나오는 것도 역시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지식은 또 12절을 보면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한다. 12절의 감사는 특별히 감사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소망 중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누구에게 감사를 드리는가? 그것은 “성도들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했다. 성도들의 기업이란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새로운 몸을 입고 영원한 나라를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특별히 “빛 가운데서 성도들” 이라 했다. 이는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을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장차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소망을 가지고 고통 중에도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빛 가운데서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을 실천하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받게 된다. 그 은혜를 주시는 분은 13절에 보면 아버지 라고 했다. 13절도 역시 농작물의 그림이 연결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 13절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라고 했다. 농작물이 그늘에 있으면 뜨거운 팔레스틴 지방에서 가뭄에도 비교적 쉽게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 채 결국 말라 죽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골로새 성도들을 어두움으로부터 건져 내었다는 것이다. 건져내신 목적은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다. 절대로 편안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다.

건져 내셨다는 말은 과거에 단 한번 구원 받은 사실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렇게 골로새 성도들을 어두움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은 13절 중간에 보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라고 했다. 여기서 옮겼다는 말은 식물을 뽑아서 옮겨 심었다는 뜻이다. 같은 말이 고린도전서 13:2절에서는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 이라고 할 때도 나온다. 나무를 뽑아 옮기듯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라는 뜻이다. 과거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정착했다. 400년 동안 깊은 뿌리를 내려 거대한 나무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엄청난 힘으로 뽑으셔서 가나안으로 옮겨 심으신 것이다. 풍요로운 이집트의 고센지역은 영적에 속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는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척박하지만 한 가나안으로 옮겨 심으셔서 빛 가운데 두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두움 가운데 있던 식물과도 같았던 골로새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로 옮겨 심었다는 뜻이다. 열매맺게 하시려고 옮겨 심으신 것이다. 옮겨 심으신 것도 역시 과거에 단 한번 있었던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14절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가지를 갖고 있다고 했다. 첫째는 그 아들 안에서 ‘속량’ 이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전쟁포로나 노예를 석방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포로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신 사건을 말한다.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고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둘째는 “죄 사함” 이다. 이는 속량이라는 말의 다른 면을 말한 것이다.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해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이다. 죄사함이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정결하게 하신 것이다. 결국 구속과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절대로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은혜를 기억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채우고 삶으로 실천해서 열매 맺으며 고난 가운데서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몇 가지 그림 언어들로 되어있다. 전체를 통일하는 그림은 농작물의 그림이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씨앗이 되어 우리 안에 가득 차야 한다. 이것은 마치 큰 그릇에 씨앗이 조금씩 떨어지면서 천천히 그릇이 채워지고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의 씨앗이 가득차고 흘러 넘쳐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차면 안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릴적 배운 단순한 교리나 성경 이야기를 배운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Robert Fulghum이 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 라는 책의 제목과도 같이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 알게 되면 그 믿음과 교리를 떠나 세상 다른 가치들을 찾아 떠난다. 이미 다 배워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간다. Calv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은 무지함 위에 있지 않고 지식 위에 있다. 그리고 믿음은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뿐 아니라 그 분의 뜻까지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는 지식이 가득 차도록 채워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단순히 가득찬 상태로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그 다음 단계는 그 지식을 따라 합당하게 행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 그러면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열매가 성장하게 된다. 이스라엘에서는 이시기에 폭포수 같은 비가 내리고 열매를 맺은 뒤에는 늦은 비가 내린다. 이처럼 믿는 자들도 처음에는 은혜의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또 열매를 맺은 뒤에도 늦은 비가 촉촉히 내린다. 하지만 열매가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하늘에서 내리는 폭포수 같은 은혜는 더 이상 내리지 않는다.

대신 작열하는 태양 빛이 쏟아지는 시기를 한달 이상 버티어야 수확기가 된다. 이 시기에 견디는 방법은 아침 저녁으로 내리는 이슬 같은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의 가뭄을 적시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의 시기를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미운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행하며 견디는 것이 결실을 거두는 비결이다. 이러한 시기의 뜨거운 햇볕은 거짓 가르침이라는 병충해로 멸망하지 않도록 해주고 또 알곡이 단단하게 익어가게 한다. 비록 농작물은 노랗게 말라버리지만 그 안에는 단단하게 여문 밀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울이 마지막에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은 골로새 성도들은 원래 빛 가운데 뿌려진 씨앗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본래 어두움 가운데서 자라고 있던 식물 같던 골로새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빛 가운데로 옮겨 심겨진 것이다. 마치 이집트에서 자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옮겨 심은 것처럼 말이다. 구약의 출애굽의 그림이 오늘 말씀 끝부분에 있지만 사실 논리적인 순서로는 이 부분이 앞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이미 지난 과거이기에 마지막에 어두움에서 빛 가운데로 옮겨 심어진 그 은혜를 다시 돌이켜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 심으신 뜻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이 모든 인내와 오래참음으로 끝까지 견딜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어느 단계에 있는가? 아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 만큼 지식이 가득차지 않았다면 배우는데 집중해야 한다. 어느 정도 배웠다면 삶으로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어느 정도 결실을 맺었다면 그 결실이 자라도록 해야 한다. 그 결실이 익어가는 것은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만약 그래도 힘이 든다면 멸망의 구덩이에서 빛 가운데로 옮겨 심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우리를 옮겨 심으신 하나님의 뜻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모든 인내와 오래참음으로 소망 중에 견디는 것이 그 사랑으로 훈련하는 방법이다.

해석이 어려운 신약 구절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