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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새벽말씀 › 아모스 › 6:11-14

Dawn Word

아모스 6:11-14

불의한 자들을 완전히 가루로 만드시는 하나님

2020. 9. 29. · 안정섭 목사

아모스 6:11-14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쓸개로 공의를 쓴 쑥으로 바꾼 모든 자들을 완전히 박살을 내서 가루로 만드신다고 경고하신다.

이전 말씀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의지하며 자신들만 호화스러운 삶을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미워하셔서 완전히 멸하신다고 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망하게 하고 한 나라를 일으켜 이스라엘 족속들을 공격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이어진다.

11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10절에서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라" 라고 한 말과 연결되는 것이다. 왜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가 하면 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어서 "보라!" 라는 말로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멸하신다는 말이 사실이니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에 큰 집이 갈라지고 작은 집은 터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큰 집과 작은 집을 쳐서 허물어버리는 것이다.

Smith는 큰 집은 왕궁이나 부자들의 집을 가리키고 작은 집은 지방정부 건물이나 가난한 자의 집을 가리킨다고 했다(Smith, 122). 그러나 대부분 주석가들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집들이란 모든 집들을 가리킨다며 완전한 파괴를 뜻한다고 말한다(Harrison, 635; Motyer, 803; Sunukjian, 1443). 큰 집들은 조각조각 부서지고 작은 집들은 완전히 가루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며 모두가 다 완전히 박살이 난다는 뜻이다.

개역은 12절 앞부분을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들이 어찌 거기서 밭을 갈겠느냐?" 라고 번역했다. 바위란 평평한 바위가 아니고 커다란 바위들로 가득 차 있는 지형을 말한다. 그런 곳에서는 어떻게 말이 달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소가 어떻게 그런 곳을 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말을 달리게 하고 소가 밭을 갈게 한다면 정신 나간 행동인 것이다.

새번역은 NIV를 따라 "소를 부려 바다를 갈 수 있느냐" 라고 번역했다. 소는 히브리어로 황소는 "바카르" 인데 여러마리는 "바카림" 이다. "임" 이라는 말은 복수를 가리키는 어미인 것이다. 그런데 바다를 가리키는 말도 역시 "임" 이다. 새번역과 NIV는 "바카르"와 "임"으로 나누어 해석하고 바다를 간다고 한 것이다. 어떻게 해석하든 비유의 의미는 말도 안되는 일을 한다는 뜻이다.

12절 뒷부분은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이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말이 바위 위를 달리게 하고 소로 그런 바위들을 갈게 하는 것과도 같이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정의라는 말은 현명한 재판을 내린 기록을 뜻하는 말이다. 이는 감옥에 갈 죄는 아니지만 서로 간의 분쟁이 생겼을 때 누가 옳은 지를 판단해 주는 것을 뜻한다. 또 공의란 법정에서 죄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무고한 사람에게는 무죄판결을 내리는 것을 뜻한다. 5:24절에서는 이러한 정의가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하셨다. 정의와 공의가 항상 흘러넘치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정의를 쓸개로 바꾸고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꿀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13절 앞부분은 원어에서 "너희는 로드발에서 기뻐하는자이다" 라는 뜻이다. 로드발은 사무엘하 9:4절과 17:27절에 나온다. 이 도시들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도시들이다(Sunukijan, 1444). Motyer는 이곳이 열왕기하 14:25절에 나오는 여로보암이 솔로몬 시대의 땅을 회복했지만 금방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한다(Motyer, 803). Smith는 이 도시들의 이름이 언어유희일 것이라고 말한다(Smith, 123). 로데발은 히브리어로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과 발음이 같고 가르나임은 "한 쌍의 뿔"이라는 말과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이 점령한 땅들은 금방 잃었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점령하고 기뻐하고 있고 겨우 한 쌍의 뿔을 잡고 우리가 정복했다 라고 한다는 뜻도 포함하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역은 도시 이름을 "허무" 와 "뿔" 로 번역한 것이다. 새번역처럼 도시 이름을 그대로 번역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난하 주석으로 처리하는 것이 옳다.

14절은 또 다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왜 그러한 행동이 그렇게 어리석은 일인가 하면 이라는 뜻이다. 이어서 "보라!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서 너희를 치겠다" 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군대의 하나님이신 주께서 말씀하신다는 말이 있기에 분명히 그렇게 하신다는 뜻이다.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 북쪽 국경이고 아라바 개울은 이스라엘 남쪽 국경이다. 그렇다면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완전히 다 멸망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현명한 민사재판과 공정한 형사재판으로 항상 공정하게 다스려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물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쓸개와 쓴 쑥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렇다면 지도자들만의 죄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지도자들이 그렇게 부패한 사회에서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부패가 만연한 법이다. 부패의 규모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큰 집에서 작은 집까지 다 박살내셔서 가루로 만드신다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말씀만 가지고 남을 정죄하면서 자기에게 불리한 말씀은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적용한다면 우리 역시 정의를 쓸개로 공의를 쓴 쑥으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나라의 지도자들만 썩었다고 하면 안된다.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규모만 다를 뿐 역시 썩었다. 교회 지도자들만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면 안된다.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된 것은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는 자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 보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7:3절과 누가복음 6:41절에 보면 예수께서도 "왜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라고 책망하셨다. 그러면서 그런 자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시며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내라고 하셨다. 위선자들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의의 사도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순서대로 빠짐없이 꼼꼼히 읽으면서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예배 시간마다 들려오는 말씀을 듣고 골라서 은혜 받으면 안된다. 때로는 불편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도 그대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자신을 항상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들보를 발견할 수 있다. 정의는 남에게 손가락질 하는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내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데서 정의는 시작된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 본다면 우리 교회와 이 땅의 모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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