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2:12-14 형식이 아닌 모든 생각을 다 여호와께로 향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예배하는 복을 회복시켜 주실지도 모른다.
이전 말씀은 여호와의 임재 앞에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도 빛을 잃으니 그 분 앞에서 당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오늘 말씀은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권고가 이어진다.
12절에서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이라며 "이제라도 내게 돌아오라" 고 전한다. 돌아올 때는 형식적으로 회개하는 흉내만 내면 안된다. "마음을 다하여" 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심장을 가지고 돌아오라는 듯이다. 성경에서 심장이란 감정이 자리잡는 곳이 아니라 생각이 자리잡는 곳이다. 따라서 일시적인 감정으로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각을 다 여호와께로 향하며 돌아오라는 뜻이다. 이 때 진정으로 여호와께 돌아서는 표시로 세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금식이다. 금식은 말없는 슬픔의 표현이다. 운다는 말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애통한다는 말은 가슴을 치며 크게 소리 내어 곡을 한다는 뜻이다. 자신들의 죄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표시로 그 슬픔의 정도가 점점 강화되는 것이다.
13절은 요엘의 권고이다. 그런데 마음을 찢되 옷은 찢지 말라고 했다. 옷을 찢는 것은 극단적인 슬픔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그런데 이런 극단적인 행동은 형식적인 연극일 경우가 많기에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 형식적인 연극이 되면 안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마음을 찢으며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렇게 돌아와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다섯가지 속성을 가지고 설명한다.
첫째 은혜로우시다는 것이다. 이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는 뜻이다. 이는 빚쟁이가 빚을 탕감해 달라고 사정할 때 탕감해 주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마태복음 18:23-35절에서 왕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 같은 모습이다. 둘째 자비로우시다는 말은 사랑이 많다는 뜻이다.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안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눈물 닦아 주시며 안아 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예뻐서 가 아니다. 셋째는 노하기를 더디하신다고 하셨는데 원어는 느린 콧김이라는 뜻이다. 분노를 확 터트리셔야 옳은데도 콧김을 천천히 내쉬며 참으시는 중이시기 때문이다. 넷째는 인애가 크시다고 했다. 한결같은 사랑이 많다는 뜻이다. 원수같은 죄인들에게 분노의 콧김을 참으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는 한결같은 사랑이 많으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했다. 역시 재앙을 내려서 다 멸해야 하지만 그 분노의 손길을 참으신다는 뜻이다.
14절은 "누가 알겠느냐?"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무조건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혹시 용서하실지 누가 알겠느냐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혹시 베풀어 주실지도 모르는 용서는 세가지이다. 첫째는 마음을 돌이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돌아서실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둘째는 뜻을 돌이킨다는 말은 원어에서 재앙을 내리시는 손길을 멈춘다는 뜻이다. 13절 끝에 나온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셋째는 그 뒤에 복을 내리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복을 남기고 가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복은 곡식을 드리는 소제와 포도주를 제물 위에 부어서 드리는 전제를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복이란 물질을 많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예배를 받아 주시지 않고 돌아서시면 그것이 바로 복의 반대인 저주인 것이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회개란 감정이 아니라 생각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자신의 속 사람 안에 가득 담겨있던 세상의 것들을 다 비우고 그 안에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란 눈물 콧물 흘리고 가슴을 치고 옷을 찢는 겉모습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음 속의 모든 생각이 다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란 우리 마음 속에 가득한 세상에 대한 욕심을 다 비우고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채우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의지적인 결단이다.
혹시 누가 알겠느냐? 라고 요엘은 말하지만 하나님의 용서가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다섯가지 속성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내리시는 복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아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복은 물질 축복 자녀의 축복 건강의 축복이 아니다. 그러한 축복만 바란다면 무당을 찾아가거나 절에 가야 한다. 혹시 귀신들이나 다른 우상들이 그러한 것을 줄지 누가 알겠는가? 진짜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심을 채워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시는 것이 진짜 복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 자체가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 그 자체가 복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이 최고의 복이다. 이러한 복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게 된다는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