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11:1-11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잡고 계시며 돌아오길 간절히 원하신다.
이전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 밭을 갈아서 공의의 말씀을 심고 한결같은 사랑을 거두길 원하셨는데 그 반대로 악을 심고 죄악을 거두어 먹는 자들은 완전히 망하게 하신다고 경고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사랑하시고 훈계하셨는데도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며 돌아오길 간절히 원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1절은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아들이라 부르시며 애굽에서 불러냈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출애굽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특별히 출애굽기 4:22절에서 바로 앞에서 내 아들 장자라고 선언하게 하신 것과 연결이 된다. 어렸을 때라는 말은 젖먹이부터 총소년기까지의 나이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선택하시고 기르셨기에 아들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2절은 그들을 부르면 부를수록 그들은 멀리 가버렸다는 것이다. 영어 번역들은 대부분 "the more… the more" 라는 현대 영어식 표현으로 번역한 것이고 한글 성경들도 그에 따라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그들이 그들을 향해 불렀고 그래서 그들은 내 얼굴에서 멀리 가버렸다" 라는 뜻이다. NASB는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 그대로 "they called them" 이라고 번역했지만 다른 영어 번역들은 대부분 "they were called" 라고 원문과 다르게 고쳐서 번역했다. 개역은 그들이 선지자들일 것이라 생각하여 원어에 없는 "선지자들" 이라는 말을 삽입해서 번역한 것이다.
2절의 부른다는 말은 1절의 부른다는 말과 대조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었는데 2절에서 그들은 그들을 불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우상들을 향해 부르짖고 있었다는 뜻일 수 있다.
Garrett은 그들이 그들을 불렀다는 말을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불렀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이미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집트를 동경하여 이집트를 부른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Garrett, 222). 만약 Garrett의 해석이 맞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불러내셨는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애굽에서 있을 때 잘 먹고 편히 살았다고 불평하며 우상들을 부르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2절의 부른다는 말은 또한 1절의 부른다는 말과 연결되는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셨고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후에 그들 곧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계속 부르셨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70인역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의 그들을 "내가"로 바꾸어 번역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과 새번역은 70인역 구약성서를 따라 하나님이 계속 부르신 것으로 번역한 것이다.
개역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부르신다고 보면서도 히브리어 원어 그대로 보고 그들을 선지자로 바꾸어 번역한 것이다.
그들이 그들을 불렀다는 말이 Garrett의 말처럼 이스라엘이 이집트나 우상들을 불렀다는 말일까?
아니면 대부분의 번역들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렀다는 뜻일까?
2절 뒷부분은 그들이 바알에게 희생제사를 드리고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향을 태웠다는 말과 연결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처음 부르시고 계속해서 부르셨다는 것이 맞는다. 바알에게 희생제사를 드린 것은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호세아 전체에 흐르는 문맥을 따라 보아도 계속해서 배반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맞는다.
그러나 1-4절은 출애굽에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배교하는 이스라엘을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시간 순서대로 묘사하고 있기에 Garrett의 말처럼 해석하는 것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3절 앞부분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라고 했다.
이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를 두 손으로 잡고 있다가 한 두 걸음 떼는 그림이다.
이스라엘이 넘어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얼른 잡아서 품에 안아 주시는 모습이다. 이 걸음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을 걷는 훈련과정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런데 넘어지거나 잘못된 길로 가면 얼른 안아 주신 것이다.
그런데 3절 뒷부분은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라고 했다.
그렇게 걸음마를 하다 보면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한다.
그럴 때 상처에 약을 발라 주시고 치료해 주시려고 하는데도 이스라엘은 제멋대로 가게 내버려두라는 아기와도 같았다는 것이다.
4절은 이제 조금 더 자란 아기의 모습이다.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라고 했다.
새번역은 인정의 끈이라고 의역을 했지만 이는 동물을 줄로 매어 끄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사람의 줄로 매었다고 한 것이다. Fausset도 소를 끄는 것처럼 하지 않고 사람을 이끄는 것이라 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가르침의 줄로 이끄는 것으로 설명했다(Fausset, 497). 또 이 줄은 사랑의 줄인데 한결같은 사랑의 줄이라는 뜻이다.
좀 더 자란 아기가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끈으로 매어 잡고 혼자서 걷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3절보다 훨씬 더 자란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또 이어서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매어 주신 사랑의 줄을 이집트 사람들이 매어 놓았던 줄과 비교하시려는 것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짐승처럼 부리려고 멍에를 매어 그 줄을 잡고 강제로 일을 시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멍에를 풀어 주셨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라고 했다.
원어는 "내가 몸을 숙였고 그들에게 먹게 했다" 라는 뜻이다. 새번역은 몸을 숙였다는 말이 엄마가 아기에게 젖먹이는 모습으로 보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라고 의역을 한 것이다. Dearman도 이 구절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그림일 수 있다고 했다(Dearman, 283).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나게 해서 먹이신 것을 젖먹이는 엄마로 비유해서 몸을 숙여 먹게 했다 라고 한 것이다.
5절의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이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도 새번역과 개역이 서로 다르다.
애굽 땅은 실제 애굽 땅이 아니고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원어는 NIV처럼 "그들이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라는 의문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돌아간다는 뜻인 것이다. Stuart는 이집트로 돌아간다는 것이 언약을 어긴 것에 대한 저주에 해당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내신 땅으로 돌아가서 다시 노예살이를 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Stuart, 179). 새번역은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라고 번역한 것이다.
언약을 깨뜨렸기에 다시 노예살이를 시작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또 NASB나 ESV처럼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앗시리아가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신다는 말은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뜻이 된다. 이어지는 말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해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하신 것이다.
6절은 "칼이 그들의 성읍을 치며" 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원어는 칼이 그들을 향해서 빙빙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는 적들이 얼마나 칼을 빠르게 휘둘러 대는지 칼이 빙빙 돌아가는 헬리콥터의 로터처럼 돌아가는 그림이다.
마치 잔디 깎는 기계의 칼날이 돌아갈 때 모든 잔디들이 잘려 나가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정없이 그 칼에 잘려 나가는 모습이다.
그 칼은 또한 빗장을 깨뜨린다고 했다.
그 빙빙 돌아가는 칼은 사람 뿐만 성문까지도 부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칼이 성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다 삼켜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다 그들의 계획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으로 달려가려는 계획 때문이다.
7절 앞부분은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라고 했다.
원어의 의미는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서서 매달려 있다 라는 뜻이다. 4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끈과 사랑의 끈으로 매어 놓으신 것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앗시리아를 통해 그렇게 치게 하신 것은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돌아오지 않고 멀리 도망가는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끈으로 매어 놓으셨기에 등지고 도망가기는 하지만 계속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끈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에게 위에 계신 분에게 돌아오라고 하는 사람들은 선지자들이다. Chisholm도 그들이 선지자인데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을 거절했다는 뜻이라 했다(Chisholm, 1402).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했는데도 아무도 돌아와서 하나님을 높이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새번역과 개역은 일으켜 세우거나 일어나는 것으로 번역했지만 원어는 하나님을 높이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끈에 매달린 채 계속해서 하나님을 등지고 가고 있다는 뜻이다.
8절은 에브라임을 부르며 "내가 어떻게 너를 놓겠느냐?" 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끈으로 잡고 계시면서 에브라임을 우상들에게 줄 수는 없다고 호소하시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을 부르며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라고 하신다. 앞에서는 끈을 놓아 보낸다는 뜻이라면 이번에는 직접 넘겨준다는 뜻이다.
이어서 아드마 같이 놓겠으며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고 하신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는 도시로 파괴된 도시들이다(Dearman, 287-88; Stuart, 181). 하나님의 마음이 속에서 돌아서고 하나님의 긍휼이 온전히 불 붙듯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그렇게 멸망시키지 못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심판하시면서도 분노하신 마음이 불쌍한 마음으로 돌아서되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불타는 것과도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9절은 그렇게 돌아서신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불타는 듯한 맹렬한 분노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이어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나는 하나님이고 사람이 아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자니 나는 진노함으로 네게 가지 않겠다"
라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분노하여 다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겠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용서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다.
바람이 나서 다른 남자들 품에 있는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같은 분노를 보이지 않으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10절 앞부분은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라고 했다. 이는 대적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소리를 내시는 모습이 마치 사자가 울부짖는 것과도 같다는 뜻이다.
그런 하나님을 뒤 따라 간다는 것이다.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대적들을 삼키려고 가실 때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녀들은 하나님 뒤를 따라 걷는다는 것이다.
Stuart 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스라엘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나타내는 표지로 이해했겠지만 이 회복은 오직 다시 돌아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된다고 했다(Stuart, 182).
10절 뒷부분은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그의 자녀들이 서쪽에서 떨며 온다는 것이다.
서쪽은 지중해가 있는 쪽이다. 바다와 섬들이 있는 지중해 쪽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떨며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이는 11절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11절은 그들은 또한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쪽과 북쪽 서쪽 할 것없이 사방에서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이다.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신다고 했다.
안전하게 집에서 머물게 하신다는 뜻이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듣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멸망의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을 끈으로 매어 잡고 놓지 않으신다. 완전히 멸망시켜도 시원치 않을 악한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다.
원수같은 자녀들이지만 끝까지 사랑하셔서 징계하시지만 불쌍히 여기시고 복수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3:1절에서 끝까지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심지어 배반하는 제자까지 있는데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될 끝까지 사랑하시기라" 라고 하셨다. 이 역시 호세아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다.
우리도 그렇게 끝까지 사랑했는데도 우리를 대적하고 원수 삼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포기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한결 같은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 역시 그러한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면 우리 역시 그러한 감동을 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