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4:1-3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한결 같은 사랑이 없고 서로 분노를 표출하여 죽이기까지 한다고 책망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 대로 음란한 여자를 값을 주고 다시 데려와 정결하게 하는 기간을 거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정결하게 하는 기간들이 지나면 다시 여호와의 은총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는 말로 이어진다.
1절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아들들아!" 라는 말이 이어진다. 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하면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들과" 논쟁하시기 때문이다. 논쟁한다는 말은 법정에서 죄를 기소하고 변호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Garrett은 "이스라엘의 아들들" 과 "이 땅의 주민들"을 다른 사람으로 본다. Garrett은 미가 6:2에서 산들과 견고한 지대들을 배심원으로 세우며 자기 백성과 변론한다는 것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아들들" 은 배심원으로 초청하고 들어보라는 뜻이고 "이 땅 주민들" 은 피고로 기소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Garrett은 "이스라엘의 아들들" 은 참 이스라엘이 될 남은 자들이고 그들에게 나머지 이스라엘의 죄를 기소하는 것을 들어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Garrett, 108-09).
그러나 NIV는 그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 땅 주민들" 앞에 "you"
라는 말을 넣어서 번역했다. Garrett은 이 말을 삽입한 것이 본문을 잘못 이해하도록 이끈다고 했지만 Garrett은 미가 6:2절에 집착하여 지나친 해석을 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라는 말이 배심원들에게 들어보라고 쓰인 경우는 미가 6:2절을 제외하면 찾아볼 수 없다. 구약에서 20번이 나오는데 모두 다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라고 한 것이다. Dearman도 "이 땅 주민들" 이라는 말이 곧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다.
1절 뒷부분은 또 다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어간다. 왜 이 땅 주민들과 논쟁하시는가 하면 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첫째 진실이 없다는 것이다. Garrett는 이 말을 "integrity"로 번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Garrett, 109). 이는 항상 진실하고 변함이 없어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Stuart는 대인관계에서 예의 바르고 책임감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다(Stuart, 75). 이어지는 2절의 내용은 그 반대말들이기에 이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웃들에 대한 태도로 보는 것이 옳다.
둘째 인애도 없다고 했는데 인애는 헤세드 즉 한결 같은 사랑이다. Garrett은 "이전의 사랑의 약속에 근거해서 그 사랑의 대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Garrett, 110).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자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속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썼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숭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언약을 지키셔서 사랑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 사랑을 받은 백성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지속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는 뜻이다. 원수같은 사람들도 끝까지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는 뜻이다.
진실함과 한결 같은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 하나님의 속성을 깨닫고 아는 것은 체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에서 나온다. 그래서 셋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진실함과 한결같은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진실함과 한결같은 사랑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기에 말씀을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을 귀를 기울여 듣지 않고 마음에 담아 두지도 않기에 겉으로만 거룩한 척하며 하나님의 진실함과 한결같은 사랑은 이웃들에게 행하지 않는 것이다.
2절은 앞에서 말한 세 가지가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그 반대의 행동들이다. 첫째, 저주란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맹세한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23:12절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자들이 나온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원한을 품고 맹세하는 것이 저주이다. Stuart는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말로 욕하거나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Stuart, 76). Garrett은 저주라는 말이 제 3계명인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말을 한 단어로 요약한 것이라고 했다(Garrett, 111). 둘째, 속임이란 앞에서 나온 저주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그 대상에게 말로 속이는 것이다. Dearman은 제 9계명의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과 연관된 것이라고 말한다(Dearman, 148-49). 거짓 증거하는 것은 저주가 이루어지도록 거짓말로 법정에서 고소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은 십계명에 나와있는 그대로이다. 살인은 이웃에 대해 한결같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저주하고 속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직접 죽이거나 도둑질함으로 그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도둑질은 물건을 훔치는 것과 사람을 납치하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역시 이웃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이 없기에 이웃의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납치해서 팔아먹는 것이다. 간음은 남의 배우자를 훔치는 것이다. 역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포악하다는 말은 폭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Garrett은 포악하다는 말을 앞의 모든 악한 행동을 다 포함하는 말이라고 해석했다(Garrett, 112). 그러나 나열된 죄들은 점점 그 강도가 높아지는 것이기에 그렇게 해석하면 그러한 점층법의 고리가 끊어진다. Dearman은 도둑질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폭력으로 상대를 해치고 물건을 빼앗는 강도 짓으로 해석한다(Dearman, 149). Dearman의 해석이 논리의 흐름에 맞는다. 마지막으로 피 흘림은 피 흘림으로 이어진다는 말은 연이어서 계속 죽인다는 뜻이다. 마음 속으로 미워하며 하던 저주가 마지막에는 죽이고 또 죽여서 피가 계속해서 분수처럼 쏟아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3절은 이러한 장면을 보고 이 땅이 슬퍼한다고 했다. 땅이란 강과 바다와 호수까지 다 포함하는 말이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들짐승들과 공중에 나는 새들까지도 다 쇠약해진다는 것이다. 바다 속의 물고기들까지도 씨가 마른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항상 변함없이 진실하시며 끊임없이 반역하고 우상을 섬기던 자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셨는데 그 백성들은 서로 저주하며 살인하는 등 서로에게 끊임없이 분노를 표출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진실과 한결 같은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 말씀을 알 때 깨닫고 이웃에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는 미운 마음이 드는 원수에게 분노를 품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21-26절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다시 해석해 주신다. 누구든지 분노를 품고 그 분노를 표출하면 그것이 살인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대로 말 한마디 내뱉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 세상은 그렇게 자기 감정대로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그러면 안된다. 예수께서 분명히 분노는 살인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도 결국 분노의 마음을 다스리고 그 원수에게 사랑을 베풀라는 뜻이기에 결국 오늘 말씀에 나온 하나님의 속성인 진실함과 한결같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한다. 분노는 살인이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세상은 마음에 일어나는 대로 분노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는 우리는 그러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