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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새벽말씀 › 호세아 › 2:14-23

Dawn Word

호세아 2:14-23

징계하신 후 다시 축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2020. 6. 24. · 안정섭 목사 · 호세아 2장 강해 설교

호세아 2:14-23 하나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음란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후 광야로 데리고 나가 사랑을 고백하시고 혼인서약을 맺으시고 그 혼인을 신실하게 지키면 영원한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하나님은 음란하게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이 우상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으시고 그들이 누리던 모든 것을 빼앗으셔서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신다고 하셨다. 이제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회복시키셔서 하나님과 결혼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이 이어진다.

14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이어진다. 바로 앞에서는 바알을 섬긴 축제의 날들만큼 벌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과는 상반된 내용이 이어지기에 연결이 안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기간이 끝났으므로 이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아내는 버렸어야 옳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라는 말 다음에 "보라!"라는 말로 이어가며 정말 깜짝 놀랄 만한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말한다.

개역은 "개유하여" 라고 했고 개역개정은 "타일러" 라고 번역했지만 원어는 새번역처럼 "꾀어서" 라는 뜻이다. 이 말은 "꾀어서" 나 "속여서" 또는 "유혹하여" 라는 뜻으로 번역해야 옳은 말이다. 그러한 말들이 하나님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이상한 말로 번역한 것이다. 세상 영광을 따라 바알 신을 섬기며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불러도 광야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들을 꾀어서 광야로 나오게 한 것이다.

개역개정의 "말로 위로하고" 도 원어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번역이다. 새번역처럼 "다정한 말로 달래 주겠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는 죽여 마땅한 간음한 여인을 꾀어서 아무도 없는 사막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겠다는 뜻이다. 부부간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기에 먼저 미련스럽고 바보같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는 일편단심 민들레 남편과 끊임없이 "그대 이름은 바람바람바람" 하는 아내와의 관계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아내라면 당시 관습에 따라 사람들에게 알려서 돌로 쳐 죽여야 맞다. 그런데 이 남편은 이런 아내를 꾀어 광야로 데려간다. 그것도 그냥 가자고 하면 죽어도 안 따라오고 화려한 나이트 클럽에나 가려는 여인이기에 좋은 말로 꾀어서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데려오는 것이다. 거기서 이러한 아내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이다. 이 얼마나 정신나간 행동인가? 그러한 정신나간 남편 같은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이다. 개역이나 개역개정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다가 본문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림을 짓뭉개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처음 사랑을 시작한 그 광야로 데려가서 처음 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회복시키시려는 것이다.

15절은 3-12절에서 모든 것을 빼앗고 발가벗겨서 벌을 내리겠다고 하신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모습이다. 포도원을 되돌려주고 아골 골짜기가 희망의 문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아골 골짜기는 요단 계곡에서 이스라엘 중심부의 산지로 올라가는 아주 거칠고 좁은 골짜기이다. 새번역은 아골 평원이라고 잘못 번역했다. Dearman은 이곳이 여호수아 7:24-26 절에 나오는 아간을 처형한 곳이라고 설명한다((Dearman, 122). 그렇다면 이 여인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은 죽어 마땅한 여인을 아간을 쳐 죽이듯 돌로 쳐 죽이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끔찍스러운 기억을 되살리는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의 바로 희망의 문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거기서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거기서 그녀는 기쁘게 대답할 것이라는 것이다. 홍해를 건너 구원의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나오던 그 때처럼 이번에도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용서받고 새롭게 된 기쁨을 찬양하며 처음 결혼할 때처럼 남편에게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해서 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 때문이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16절은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 이라 부르고 다시는 "나의 바알" 이라고 부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새번역은 "바알" 이라는 말이 주인이라는 뜻이기에 "나의 주인" 이라고 직역을 했지만 개역이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은 우상의 이름이기에 그대로 "나의 바알" 한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중의법이다. 먼저 바알이라는 우상을 더 이상 주인으로 섬기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또한 나의 남편이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로 쓰인 것이다. 나의 남편이라고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의 회복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Dearman도 여호와는 더 이상 바알 즉 주인이라고 불리우지 않고 친밀한 결혼관계의 표시로 "남편" 이라고 부르게 하신 것이라 했다(Ibid., 124). 이제 하나님을 "주인님!" 이라고 거리감 있게 부르지 않고 "Honey!"

라고 부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도 더러운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게다가 "Honey!"

라고 부르도록 그렇게 다정한 관계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새번역은 "나의 주인" 이라고 번역하고 난하 주석에 "나의 바알" 이라고 표시해 놓은 것이다.

17-20절은 그 두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먼저 17절은 "내가 바알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라고 했다. Dearman은 가나안의 신 바알의 이름을 제거한다는 뜻일 수도 있고 단순히 주인이라는 뜻일 수도 있는데 주인이라는 뜻이 맞을 것이라고 말한다(Ibid., 125). 그러나 17절도 16절처럼 두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바알 신의 이름을 제거한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하나님을 "주인님" 이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제거하신다는 듯도 되는 것이다. 이제는 영원히 친밀한 관계인 "Honey"

가 되게 하신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18절은 약혼식의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2:12절에서는 들짐승들이 그 포도나무와 그 무화과 나무를 먹게 하신다고 했는데 이제 그 들짐승들과 공중의 새와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을 증인으로 세워 프로포즈를 하고 약혼 서약을 하신다는 뜻이다. 그 결과 활과 칼을 꺾어 버리며 전쟁을 없애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프로포즈 하면서 손에 물도 안 묻히고 고생 하나도 안하고 편히 살게 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19절은 "내가 너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라고 했다. 여기서 장가든다는 말은 약혼식을 뜻한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약혼은 신랑이 신부의 아버지께 신부의 값을 지불하고 혼인 계약을 완전히 맺는 것을 뜻하고 법정에서의 최종단계에 해당하기에 실제적으로는 오늘날 결혼식을 하고 혼인신고를 마친 것과도 지위를 갖는 것이다(Stuart, 59). 공의는 법조문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하는 것을 뜻하고 정의는 법조문에 없지만 현명한 재판의 판례를 따라 재판하는 것을 말한다. 은총이란 헤세드인데 한결 같은 사랑이고 긍휼히 여김은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렇게 완전한 사랑으로 영원히 사랑하시겠다는 약속이다.

20절은 너는 진실함으로 나와 약혼하면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부측에서 해야 할 약속이다. 신랑측에서는 네 가지를 제시했는데 신부측에서는 진실함 하나이다. 진실함이란 한 남편만 영원히 사랑하고 절대로 불륜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이제 신부도 약속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그러면 여호와를 알고 평생 가까이 지내게 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2:13절에서 잊어버렸다는 말과 반대말이다. 이제 딴 남자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21절은 지금까지 바유로 말한 것을 다시 설명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라고 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말이 하나님께서 하늘에 말씀하시면 하늘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 땅에 비를 내리신다는 뜻이라고 했다(Dearman, 130; Garrett, 94; Stuart, 60). 하나님만 생각하고 혼인 서약을 성실하게 지키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철에 따라 비를 내려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겠다는 뜻이다. 22절은 또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한다고 했다. 이스르엘이란 땅에 흩어 뿌린다는 뜻이다. 22절을 볼 때도 21절이 비를 내려 축복하신다는 뜻이 분명하다. 비를 내리시면 곡식과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에 열매가 맺히고 또 씨앗을 뿌리면 또 다시 왕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다.

23절 지금까지 말한 내용의 결론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그녀를 땅에 심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고멜을 전에는 완전히 흩으셨는데 이제는 좋은 의미로 땅에 씨앗으로 심으시는 것이다. 전에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여자였는데 이제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전에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제는 내 백성이라 하고 그들은 이제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음란한 고멜 같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고 하나님을 남편으로 부르고 살 수 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말로 해도 듣지도 않고 따라오지도 않던 자들을 광야로 데리고 나가서 사랑한다 말씀하시고 혼인 서약을 맺고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가 잘해서 하나님의 신부가 된 것은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이고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모든 사랑으로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에게는 딱 한가지를 요구하셨다. 그것은 신실함(faithful)이다. 신실함이란 한 남편만 사랑하는 것처럼 항상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세상 영광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만 지킨다면 우리도 역시 오늘 말씀에 나온 축복을 모두 누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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