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3:11-21 오홀리바는 오홀라 보다 한 술 더 떠서 앗시리아 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까지 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청소년기 하나님을 만나기 전 이집트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전 말씀은 청소년 시절 이집트에서부터 음란하게 창녀 짓을 하던 오홀라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뒤에도 앗시리아를 쫓아 다니며 그렇게 음란한 창녀 짓을 했다. 앗시리아는 오홀라의 자녀들을 잡아가고 오홀라를 벌거 벗겨 전시하고 결국 칼로 찔러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오늘 말씀은 그 아우 오홀리바도 언니와 똑 같은 길을 걸었다는 내용이다.
11절은 그 아우 오홀리바가 언니 오홀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고도 그 언니보다 더 부패했다고 했다. 부패했다는 말은 창세기에서는 멸망시킨다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계속해서 멸망 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 때문에 계속해서 언니보다 더 멸망을 당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음욕 때문이고 그 창녀 짓 때문이다. 이는 마치 술이나 담배나 마약 도박 등에 중독된 사람들이 자신이 계속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하는 것과도 같다. 세상의 권력과 부귀영화에 중독되는 것도 역시 이와 똑 같은 것이다.
12절은 오홀리바가 앗시리아를 연애했다고 했다. 연애했다는 말은 새번역에서는 홀렸다고 했는데 5절에서 사모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고 7절과 9절에서 연애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는 계속해서 타오르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몸을 비비 꼬는 모습이다. 언니와 똑같이 앗시리아 사람들과 성관계를 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개역개정은 앗시리아 사람들이 방백과 감독이라고 했는데 6절에서 나온 말들이다. 행정관이면서 군 작전을 지휘하는 사령관들이라는 것이다. 6절에서 자색 옷을 입었다는 말이 화려한 의복으로 바뀌었다. 화려한 옷을 입었다는 말은 원어에서는 완벽한 옷이라는 의미이다. ESV는 이를 전신갑주를 입었다(clothed in full armor)라고 번역했다. 그 뒤에 말을 탔다는 말이 있기에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NLT는 멋진 제복들을 입은 것으로 (in handsome uniforms)으로 번역했다.
여자를 만나 연애하러 가는 자가 갑옷을 입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Fausset은 완벽한 옷이라는 말이 갈대아 말의 왕관이나 화관을 썼다는 말과 거의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정부를 만나러 가는 연애하려는 남자들의 모습이라고 했다(Fausset, 289).
이어지는 말을 타는 자들이고 모두가 아주 잘 생긴 젊은 남자들이라고 한 것을 볼 때 완벽하게 멋진 제복을 입고 말을 타고 나타난 꽃미남의 모습이다. 이는 마치 아주 잘 생긴 젊은 청년이 고급 장교의 정복을 입고 자신의 전용 차를 타고 여자를 찾아 온 모습과도 같다고 본다.
새번역 13절은 "내가 보니, 그도 자신을 더럽혔다. 그 두 자매가 똑같은 길을 걸었다" 라고 했다. 개역개정보다 새번역이 원어의 어순 그대로 살리면서도 알기 쉽게 잘 번역했다. 예루살렘도 앗시리아에게 자신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모두 똑같은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사마리아를 더럽다며 멸시했다. 그러나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더 더럽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가 앗시리아에게 더럽힘을 당한 뒤 비참하게 칼레 찔려 죽는 것을 보고 듣고도 똑같은 길을 택해서 앗시리아와 부정한 관계를 맺으려고 몸을 비비 꼬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4절은 오홀리바가 훨씬 더 음탕했다는 것이다. 오홀리바는 앗시리아 사람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홀리바는 벽에 새겨진 남자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붉은 색으로 새겨진 갈대아 사람들의 형상이었다. NLT는 보았다는 말은 She fell in love 라고 번역했다. 벽에 새겨진 바빌로니아 고위 통치자들의 모습을 보고 앗시리아 고관들보다 더 멋지다고 생각하고 사랑에 빠졌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어서 15절은 그 형상이 어떤 모습인지 묘사하고 있다.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다는 말은 이는 바빌로니아 왕을 보좌하는 기사계급의 모습이다. 그래서 다 존귀한 자 곧 그의 고향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고 덧붙여 설명한 것이다. 이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각 지역을 다스리던 통치자들이고 바빌로니아 왕의 신하들의 모습이다.
16절은 오홀리바가 벽에 붉은 색으로 새겨진 그림만 보고도 음욕이 일어나 몸을 비비 꼬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절을 갈대아로 보냈다는 것이다. 17절은 그렇게 해서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란으로 오홀리바를 더럽혔다는 것이다. 아주 음란한 성관계를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오홀리바가 더럽혀진 뒤에는 그들을 혐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홀리바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고 모멸감만 주었기에 혐오하게 된 것이다.
18절은 오홀리바가 그렇게 드러내놓고 음행을 하며 자신의 하체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오홀라는 앗시리아가 벗겨놓고 전시해 놓았다고 했는데 오홀리바는 모두가 다 보는데서 그렇게 음행을 하고 스스로 자신의 하체를 전시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홀라를 혐오한 것과 똑같이 오홀리바도 혐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홀리바는 자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을 혐오한 것이다. 자신의 음욕을 채우지 못했기에 불만이 가득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홀리바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토할 것 같은 혐오감을 갖게 된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19절은 그렇게 채우지 못한 음욕 때문에 계속해서 음행을 더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회상하기를 청소년 시절 이집트 땅에서 이집트와 음행하던 때가 좋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20절은 원어에서 "음란한 간부를 사랑하였도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간부라는 말은 첩이라는 뜻으로 여자들에게 쓰는 말이다. 이는 성적인 만족을 주는 대상이란 뜻이다. 이런 단어를 여자인 오홀리바에게 쓴 것은 오홀리바가 그렇게 성적인 쾌락을 음란하게 쫓았다는 뜻이다.
그의 하체는 나귀 같다는 말은 원어에서 그의 육체는 나귀 같다는 뜻이다. 새번역은 정욕이 나귀와 같이 강하다고 의역을 했는데 원어는 이집트 사람들의 생식기가 나귀같이 거대하다는 뜻이다. 또 그 정수는 말 같다고 했다. 그 정액은 말처럼 양이 많다는 뜻이다. 이렇게 동물의 성적 이미지를 사용한 것은 오홀리바가 그렇게 음란해서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 느꼈던 나귀 같이 크고 말처럼 양이 많은 남자들과 음란하게 즐겼던 때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21절은 오홀리바가 아직도 젊은 시절 행음하던 때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곧 이집트 사람들이 네 꼭지를 만지고 네 어린 유방이 짓눌리던 때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성적인 묘사를 이처럼 적나라 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신부인 예루살렘은 북왕국 수도인 사마리아보다 한술 더 뜬다는 것이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데 세상 다른 나라들을 의지하고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겼다는 것이다. 그 음란함과 더러움을 이처럼 성 중독자 오홀리바의 음란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도 그렇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말로만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끊임없이 세상 것들을 가지려고 하고 이미 많이 갖고 있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갖고 더 누리길 갈망하지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오늘 말씀은 어디까지나 비유이다.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을 통해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바로 오홀리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