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2:1-7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포로로 잡혀가던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주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도록 하게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루살렘을 떠난 하나님의 영광은 올리브산에 머물렀다. 주님의 영이 에스겔을 다시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 온 사람들에게 데려다
주셔서 에스겔이 본 것을 그들에게 말로 전하게 하셨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는 그들에게 행동으로 전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원어를 보면 12:1절은 그리고 라는 말로 11:25절과 연결이 된다. 12:1절은 11:25절에 나온 대로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에게 말로 전했다는 내용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Block은 이 본문이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지나치게 좋게 평가하지 않도록 하는 구실을 한다고 했다(Block, 368). 1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심판하시고 바빌로니아로 오셔서 에스겔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 가운데 내려 놓으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은 믿음도 좋고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이들에게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 본문을 읽거나 들으면 대부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은 에스겔의 말을 듣고 소망을 품고 믿음 가운데서 살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러한 환상을 완전히 박살을 내는 내용이다.
1절은 에스겔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환상을 말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제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2절은 또 다시 "사람의 아들아" 라고 부르며 너는 반역하는 백성들 가운데 살고 있다고 한다.
원어는 "반역하는 집" 이라는 뜻이다. 바빌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 공동체를 반역하는 집이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소망을 가지고 포로로 끌려 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환상을 들려주었겠지만 그들은 귀가 있어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눈이 있어도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반역하는 집 이라는 말이 앞 뒤에서 감싸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보지도 않는 악한 족속들이라는 것을 알고 전하라는 뜻이다.
3절은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처럼 짐을 싸라는 것이다. 이 짐은 먹을 것과 잠자는 매트와 간단한 그릇들이다. 이렇게 짐을 싸서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것처럼 길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것처럼 자신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 앞에서 연극하듯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Block은 그의 현관 문 밖으로 나와 앉았을 것이라고 말한다(Block, 369).
에스겔의 이런 행동을 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혀 오던 때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도록 포로로 잡혀오게 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편안해지면 하나님의 뜻을 잊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러한 연극을 해서 저들이 왜 잡혀왔는지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4절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짐을 밖에 내다 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녁 때에 끌려가듯 나가라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끌려 나간 시각이 저녁 때쯤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빌로니아 군인들은 편안히 하룻밤 자고 나가도록 하지 않고 낮에 짐을 꾸려 나오라고 한 뒤 저녁시간에 끌고 나갔을 것이다.
어두워질 때 집을 떠나고 예루살렘 성문을 나서면서 저들이 공포에 떨던 그 순간을 떠오르게 했을 것이다.
5절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성벽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개역개정이나 새번역이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이 모두 짐을 옮기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원어는 NASB처럼 그리고 들어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에스겔은 벽을 뚫고 짐만 들여 놓은 것이 아니라 그리도 기어 들어간 것이다. 개역개정이나 새번역 모두 "성벽" 이라고 번역했지만 원어는 단순히 벽이다. 바빌로니아에서 공적 재산인 성벽에 구멍을 뚫을 수는 없다. 이 벽은 에스겔이 사는 집의 벽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흙벽돌로 집을 지었기에 쉽게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에스겔은 자기 집 벽을 뚫고 짐을 들여놓고 그 구멍으로 자신도 들어간 것이다.
Cooper는 이 구멍을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에 진입할 때 시드기야가 도망한 것을 뜻한다고 해석했다(Cooper, 149).
Block은 이러한 해석을 반대하며 사람들 보는 앞에서 구멍을 뚫었다고 했기에 밖에서 안으로 뚫은 것이라 했다.
그렇기 때문에 Block은 이 구멍이 시드기야가 도망한 구멍을 뜻한 다기 보다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Block, 370). Alllen도 이 행위가 예루살렘 거주민들을 포로로 삼는 일의 전조로 성벽을 뚫고 들어오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했다(Allen, 360).
그렇다면 에스겔은 혼자서 짐을 꾸려 잡혀가는 포로 역할도 하다가 이제는 성벽을 뚫고 침입하는 바빌론 군대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 하는 일인극이기 때문이다.
만약 5절에서 에스겔이 그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6절은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어깨에 짐을 매고 어두울 때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Block도 이 이야기는 연결되는 동작으로 보았다(Block, 371). 만약 그 구멍으로 에스겔이 통과해서 들어가지 않았다면 이미 밖에 있기에 다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에스겔이 얼굴을 가리고 나온다. Fausset는 이러한 행동이 누구라도 만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나타낸다고 했다(Fausset, 239). Fausset은 에스겔이 얼굴을 가리고 나온 것이 수치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 것이다. Block은 얼굴을 가리는 것이 극단적인 슬픔이나 수치심을 나타내는 행동이라고 했다(Block, 371). 이를 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서 끌려 나오던 때의 슬픔과 수치심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어서 다시는 땅을 보지 말라고 했다. 땅을 보지 말라는 말은 12절에서 왕도 그 땅을 안 보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라고 말하라는 말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한다. 이는 다시는 그 땅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얼굴을 가리고 나가는 연극을 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징으로 삼으신 것이다.
7절은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했다는 것이다. 6절 끝부분의 얼굴을 가리고 나가는 모습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잘못 기록된 것이나 삭제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그대로 행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 모든 행동을 다시 반복해서 기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약 영화나 이야기라면 예루살렘에 남은 악한 자들은 다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은 에스겔의 말을 듣고 소망을 품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한다. 그래야 이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바빌로니아에 잡혀온 사람들도 똑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에스겔이 전하는 말을 듣지도 않고 이렇게 행동으로 보여줘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에스겔이 말로 전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면 우리도 역시 말로만 전하고 가르쳐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을 통해 행동으로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 말씀처럼 연극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말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의사전달 수단이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7장에서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8-11장에서는 기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도 들려줄 뿐 아니라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삶을 보고 그들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예루살렘 주민들처럼 다 멸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