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22-27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집에 가두게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묶어 놓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 혀를 묶어 말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경고를 있는 그대로 전하여 사람들을 살리는 신실한 파수꾼이 되라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다시 환상을 보여주시고는 그 반역하는 백성을 꾸짖지 못하도록 반역하는 백성으로 만드시겠다는 알 수 없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 구절을 에스겔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이라고 말한다.
22절은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임하셨다고 했다. 원어는 주님의 손이 내 위에 머물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어서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골짜기로 나아가라!" 개역이나 새번역은 영어의 NIV나 RSV를 따라 "들" 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영어의 ESV, NASB, NLT는 Valley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본래 나무를 쪼갠다는 말에서 온 말이다(Brown, Driver, and Briggs, 131: 1234). 이는 산을 쪼개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을 묘사한 말이다. 산을 쪼개 놓은 것 같은 산들에 둘러싸인 곳 중간에 평지가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은밀히 만나시겠다는 뜻이다.
23절은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에스겔은 일어나 그 골짜기에 나아갔다. 거기서 또다시 주님의 영광이 머문 것을 보았다. 그 영광은 전에 그발 강 가에서 보던 것과 똑같다고 했다. 에스겔 1장에서 나왔던 그 영광의 모습과 똑같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에스겔은 두려운 마음으로 땅에 엎드렸다. 이미 영광의 주님을 보았고 영광의 주님에 의해 들림을 받았기도 했다. 이번은 세번째 경험하는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편안하고 친밀한 관계는 아닌 것이다(Block, 153). 그래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자마다 즉시 땅에 엎드렸다.
24절은 그 영광의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려 있던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 주셨기에 감히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마주할 수 있는 특권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하신 말씀은 집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집 안에 있으라는 것이다. 이는 집 안에만 있고 아무도 만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에스겔을 찾아와서 만난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8:2; 14:1; 20:1).
25절은 보통 두가지로 해석한다. Dyer는 만약 에스겔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난다면 사람들이 에스겔을 밧줄로 묶어 놓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에스겔이 사람들에게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Dyer, 1233-34). 그러나 Fausset은 실제 묶어 놓은 것이 아니고 영적인 의미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의 반역적인 행동이 에스겔을 억압할 것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Fausset, 212).
그러나 Cooper는 이를 실제 묶어 놓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비유적인 것이라고 볼 이유가 없다고 본다(Cooper, 87).
바로 앞에 나오는 집 안에만 있으라는 말과 26절에 나오는 혀를 입천장에 붙여 말 못하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말과 연결해 볼 때 에스겔이 밖에 나간다면 실제로 사람들이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묶어 놓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맞다고 본다.
24절은 스스로 자신을 집 안에 가두라는 것이고 25절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에스겔을 가두어 놓을 것이라는 것이다. 26절 또한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혀를 입천장에 붙게 하여 말을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신과 유대 사람들과 하나님 모두가 에스겔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말을 못하게 하실까? 3:16-21절에서는 전하지 않으면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말을 못하게 하신 것일까? 는 이를 하나님의 침묵을 전달하기 위한 상징적인 연극으로 본다(Allen, 162). Dyer는 27절에서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라는 말에서 답을 찾는다(Dyer, 1234).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에스겔도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실 때 그 때는 에스겔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Allen이나 Dyer은 둘 다 에스겔의 침묵은 하나님의 침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27절 뒷부분에서는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라고 말한다. 이는 3:18-22절에 나온 악인과 의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듣지 않을 것이고 의인들은 들을 것이라는 뜻이다. 에스겔이 선포하는 말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므로 망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돌아서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라고 하신 것과도 같다(Matt 11:15; 13:9. 43; Mark 4:9, 23: Luke 8:8; 14:35).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기에 대부분 듣기를 거절해서 멸망할 것이다.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막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겔은 환상을 보고 파수꾼으로 임명을 받은 뒤 7년이 넘게 말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33:21-22절에 보면 포로로 잡혀온 지 십이 년 째 되는 해에 예루살렘의 멸망 소식을 들었다. 그 뒤에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말하라고 하셨다. 따라서 에스겔의 침묵을 통해서 전달하는 하나님의 침묵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예루살렘 멸망의 소식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아무 것도 안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신 것을 듣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의 침묵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하게 하셨다는 무언의 메세지를 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한 소식을 교육자료로 삼아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 사람들의 생각에는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전이 파괴되지 않고 예배가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라가 안전하고 평화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돌아서지 않을 반역하는 족속이기에 예루살렘을 멸망시켜서 라도 그 남은 자들 중에 일부를 돌아서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침묵하라 하시면 침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라 하시면 전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사업이 잘되고 직장에서 승진하고 자녀들이 잘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만사형통이라며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떠들다가 멸망하기 보다는 모든 것이 다 안되고 다 망한 상태에서 라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복된 길인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침묵하라 하시면 다 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 망한 뒤에야 다가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한다. 반역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잘 나갈 때는 절대로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잃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선다면 그것이 만사 형통 가운데 멸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