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1:15-22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여인과도 같이 방황하던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떠나간 길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새로운 안전한 구원의 집을 지으셨으니 돌아오라고 초청하셨다. 그 초청에 응하여 돌아와 하나님 품에 안기라는 것이다.
이전 말씀은 약하여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백성들까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물 댄 동산과 같게 하시며 하나님의 좋은 것으로 채워 주셔서 모두가 함께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고 했다. 이제 북왕국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내용이 이어진다.
15절에서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슬픈 소리란 장례식에서 곡하는 소리라는 뜻이다. 대부분 전문적으로 곡을 대행하는 여인들이 했다. 또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란 실제 가족들이 슬피 우는 소리이다. 울부짖는 소리가 라마에서 들린다고 했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베냐민 지파의 땅이다. 사무엘 10:2-3절에 보면 라헬의 무덤이 이 근처에 있다고 되어 있다.
누가 그렇게 울고 있는가?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 조차 거절한다고 했다. 라헬은 야곱의 부인들 중의 한 사람이고 요셉과 베냐민의 어미이다. 여기서 우는 이유는 요셉의 두 아들 중에 에브라임 때문이다. 요셉의 두 아들의 후손인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북왕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라헬이 운다고 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가 되는 에브라임 때문에 운다고 한 것이다.
16-17절은 라헬의 울음에 대한 응답이다. 16절에서 울음 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라고 했다. 슬픔의 소리와 모양을 다 멈추라는 것이다.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다는 말은 라헬이 울며 기도한 보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는 것이다. 실제 라헬이 울었다는 뜻이 아니라 라헬의 자손들이 돌아오게 되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17절은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라헬의 자녀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18-19절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고백이다. 이스라엘은 길들지 않은 송아지 와도 같았는데 주님께서 훈련시켜 주셨고 자신들은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돌아갈 수 있게 이끌어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연결된다. 주님을 떠난 다음에 곧 뉘우쳤다는 것이다. 잘못을 깨달은 다음에 "가슴을 치며 뉘우쳤습니다" 라고 의역했는데 원문은 허벅지(thigh)를 때렸다는 뜻이다. 개역도 역시 의역을 해서 "내 볼기를 쳤 사오니" 라고 했다. 자신의 허벅지를 때리는 것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지방에서 고통과 통곡을 말 대신 볼 수 있도록 나타내는 행동이다. 또 "젊은 시절의 허물 때문에 저는 수치와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라고 했다. 스스로 깨닫고 고통과 눈물을 흘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수치와 수모를 통해 분명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20절은 여호와의 응답이다. 에브라임은 나의 가장 귀한 아들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를 책망할 때마다 분명히 그를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나의 심장이 그를 간절히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우리말 식으로 표현한다면 가슴이 쓰리고 사무치도록 그립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이 돌아오길 그렇게 그리워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에브라임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21-22절은 그 대상이 에브라임에서 처녀 이스라엘로 바뀐다.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처녀 이스라엘로 바뀐 것이다. 21절은 "너는 길가에 푯말을 세우고 길표를 만들어 세워라" 라고 했다. 이 푯말과 길표는 자신을 위해 세우라고 한 것이다. 또 "네가 전에 지나갔던 길과 대로를 잘 생각하여 보아라" 라고 했다. 지나갔던 길을 잘 생각해 보고 그 길로 그대로 돌아오라는 뜻이다. 너희가 살던 성읍들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여기서 떠나간 것은 실제로 그 살던 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이기도 하다. 이제 그 살던 곳으로 돌아오라는 것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 함께 살자는 초청이기도 하다.
22절은 "방종한 딸아, 언제까지 방황하겠느냐?" 라는 말로 시작한다. 처녀 이스라엘이 집을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며 음란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구약에서 우상숭배를 간음으로 비유한 것과 연관된 표현이다. 이제 그만 방황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뜻이다. 그래서 "
주님께서 이 땅에 새것을 창조하셨으니" 라고 했다. 이 땅이란 약속의 땅이다. 새것이란 이제 새로운 언약을 바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70인역 구약성서에서는 "주께서 넓은 농장 안에 안전함을 지으셨다" 라고 번역했다. 이는 마치 루이지애나에 많이 있는 Plantation의 Mansion 의 모습과도 같다. 넓은 토지를 소유한 농장주가 안전한 대저택을 지어 놓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안전한 대저택이란 헬라어에서 구원이라는 뜻이다.
22절 마지막 부분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4세기의 제롬은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을 했다. 어떤 이들은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보호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이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어머니처럼 안고 보호해 주신다는 뜻으로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21-22절에 나타난 그림에 맞지 않는다.
21-22절에 나타난 그림은 유부녀가 집을 나가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방황하며 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이다. 보통 남편들 같으면 여자가 너 뿐이냐며 이혼 백번이라도 하겠다고 하겠지만 21-22절에 나타난 남편은 그런 더러운 여자를 다시 돌아오라고 부른다. 전에 네가 나갈 때 있던 집터에 있던 낡은 집을 다 헐어 버리고 새로 안전한 대저택을 지어 놓았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남편이 어디에 있는가? 바람나서 집을 나가 난잡한 삶을 살고 있는 아내를 새집 지어 놓고 돌아오라고 할 남편이 어디에 있는가?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22절 끝부분에서 여자는 이스라엘을 의인화한 것이다. 남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인화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음란한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이 다시 한없이 용서하고 다시 사랑해주는 남편과 같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 다시 만나는 장면으로 해석해야 이 수수께끼가 풀린다. "그것은 곧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이다" 라는 말은 방탕한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이 남편인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에 응해서 감격해서 달려가 다시 남편을 껴안는 장면이다.
이렇게 본문을 문맥에 따라 본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한 뒤에 다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야 옳다. 이러한 과정없이 오늘날 상황에 맞춰 적용하면 제롬처럼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석하거나 하나님께서 교회를 끌어 안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석하게 된다. 약속의 땅에 새것을 지은 것은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새언약을 세우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몸 된 교회를 새롭게 지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집은 하나님의 집이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 70인역 구약성서에서 안전한 곳을 앞에서는 안전한 저택이라고 설명했는데 그 말은 신약성서에서는 구원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여인과도 같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새로운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신 것이다. 우리가 그 분께 돌아와 그분의 품에 안겼기에 지금 우리는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우리 주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 그렇게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는 분은 없다. 돌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