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4:17-15:4 내 백성 처녀 딸이 비참하게 뭉개 져서 죽어가는 것은 므낫세의 혼합주의 때문이며 경고의 때가 지나면 어느 누구도 그 심판을 멈추게 할 수 없다.
하: 혼합주의를 경고하시는 하나님
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만 바르게 가르치고 섬기는 자가 되자.
이전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전쟁과 기근으로 멸하시는 이유는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 예언과 그 거짓 예언을 따라 하나님께 범죄한 그 백성들의 죄 때문이라 하셨다. 오늘 말씀은 이제 그 심판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연결이 된다. 그러나 핵심은 눈물에 있지 않고 그 심판의 참혹함에 있다.
17절은 유다를 처녀 딸로 비유한다. 그런데 이 처녀 딸이 참혹하게 얻어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참혹하게 얻어 맞았다는 말은 질그릇이 옥수수가 자루에서 쏟아진 것처럼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것을 뜻하는 말이다. 젊은 처녀가 참혹하게 짓뭉개져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묘사한 말이다. 이를 보고 "내 눈에서 밤낮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릴 것이다" 라는 말이 하나님의 눈물인지 예레미야의 눈물인지 알 수가 없다. "처녀 딸 내 백성" 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구약 학자들의 견해들이 둘로 갈라지고 있고 대부분 어느 쪽인지 분명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더구나 기원전 3-2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을 보면 "my eyes" 가 아니고 "your eyes" 로 되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18절에서 묘사한 시각을 보면 예레미야가 주어인 것처럼 보인다. 새번역은 18절에서 "내가" 라는 말을 생략했지만 개역개정 18절은 "내가 들에 나간 즉" 이라고 했다. 원어는 분명히 "내가 들녘에 나가보면" 이라는 뜻이다. 처녀 딸로 비유된 유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묘사한다. 들녘에는 칼에 찔려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다. 또 도성으로 들어가면 기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뿐이다 라고 했다. 성은 아직 적들에게 무너지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포위된 채 모두가 다 굶어 죽어 가고 있는 참혹한 모습이다. 예언자와 제사장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로 온 나라를 헤맬 뿐이라 했다. 18절은 예레미야가 보고 묘사한 말이 분명하다.
19절과 연결해서 읽는다 해도 18절에서 예레미야가 둘러보고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분명하다. 주님은 유다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냐고 묻는다. 또 시온을 진짜로 토할 것처럼 미워하시느냐고 묻는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산 이름으로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말로 쓴 것이다. 만약 사랑하는 딸을 매질을 하신다면 이렇게 죽을 만큼 때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평화를 기다렸는데 좋은 일 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상처가 낫길 바라고 있는데 오히려 무서운 일만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처녀 딸로 비유된 시온이 치료될 만큼 맞았던 것이다. 낫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짓뭉개져서 숨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다.
20절은 우리의 사악함을 인정한다고 했다. 예레미야 당시 유다의 사악함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또 우리 조상들의 죄악도 인정한다고 했다. 조상들 때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조상 대대로 예레미야 때까지 계속해서 주님께 죄를 지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전형적인 애가의 형태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백성들의 고백이 아니라 예레미야의 고백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대부분 백성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 평화에 속아 넘어가 있다.
21-22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우상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해서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21절은 주님을 위하여 자신들을 박대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한다. 이렇게 그 백성을 멸망시키신다면 주님의 영광 스러운 보좌가 욕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호소한다. 언약을 기억해 주시고 그 언약을 깨지 말아 달라고 간구한다. 그러나 언약을 먼저 수도없이 깬 것은 그 백성들이다.
22절은 하나님의 속성과는 반대로 우상의 속성에 대해 묘사한다. 거짓 신들은 비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 조차도 스스로 소나기를 내려 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만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15:1절은 이러한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의 응답은 "모세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서서 빈다고 해도" 이다. 누가 하나님 앞에 와서 빈다 해도 하나님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고 이제 이 백성들에게 기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백성을 하나님 앞에서 쫓아내라고 하신다. 이제 심판은 완전히 결정되었고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되돌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2절은 하나님께서 쫓아내신다고 했을 때 그 백성들이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는 것이다. 염병에 걸려 죽도록 되어있는 사람들은 염병에 걸려 죽고 칼에 맞아 죽기로 되어있는 사람들은 칼에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로 되어있는 자들은 굶어 죽고 포로로 끌려가도록 되어있는 자들은 포로로 끌려 간다는 것이다.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네가지 방식이 나온다. 첫째는 칼에 맞아 죽게 한다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적군의 칼에 맞아 죽는 것이다. 둘째는 개가 칼에 맞아 죽은 시체를 찢어 놓는다. 셋째는 공중의 새가 그 시체를 먹어 버린다. 넷째는 그 밖의 들짐승들이 완전히 다 먹어 치워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4절에서는 온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그 모습을 보고 공포에 떨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므낫세의 범죄는 열왕기하 21장에 나와있다. 각종 우상들과 일월성신들과 점치는 일 등 각종 사술에 이르기까지 온갖 모든 것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혼합해서 비빔밥 짬뽕을 만들어 놓은 일에 으뜸가는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렇게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면 14:17절의 눈물은 예레미야의 눈물로 보는 것이 맞다.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의 심판을 완전히 결정하셨고 이미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번 심판이 결정되고 실행되면 어느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죄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혼합주의라고 오늘 본문은 말한다.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돌아서서 다른 신을 섬긴다면 차라리 그래도 낫다. 그러면 잘못이 명백하게 드러나기에 다른 사람들은 쉽게 따라가지 않게 되고 자신들만 멸망해 버린다. 그러나 기독교에 다른 종교를 교묘하게 섞어 놓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가 버린다. 므낫세는 이러한 혼합주의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통일교도 무속신앙과 기독교를 혼합해서 만들어낸 종교이다. 그러나 통일교처럼 분명하게 섞어 놓으면 누구나 쉽게 구별한다.
문제는 우리 문화에 깊이 박혀 있던 무속신앙에서 나타나는 신내림이다. 이러한 신내림을 오순절 성령강림과 비빔밥 짬뽕을 만들어 성령체험이라고 하는 자들이다. 김기동 목사도 혼합주의의 주동자이다. 부흥회 때 사람들을 넘어뜨리며 성령체험이라고 속인 자이다. 초혼제를 지낸 정현경 교수는 혼합주의 신학자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 귀신들을 구별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기독교를 토착화시켜 변질시켜 버린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도 므낫세의 제자들이다.
또다른 혼합주의는 번영신학이다. 번영신학은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1947년 Oral Roberts가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미국에 널리 확산되어 있고 한국 교회에도 이미 완전히 뿌리박고 정착되어 있다. 번영신학은 성령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물질의 축복을 받는 것이 구원의 길인 것처럼 호도하는 자들이다.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자들도 이들과 한통속인 자들이다.
1984년에 부여 외산에서 가르친 제자가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었던 일도 기억한다. 분명히 그 아이는 신내림을 받고 점을 쳐서 유명해졌었다. 그러한 귀신의 신내림과 창조주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받은 것과의 차이는 방언을 하거나 입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물질 축복을 많이 받았는지 신유의 은사를 체험했는지 안 했는지도 아니다. 답은 성경에 있다. 예수께서는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고 하셨으니 열매가 있어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2-23절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말했다. 만약 이러한 열매가 있다면 그들이 체험한 기적들은 어떠한 형태이든지 성령님의 역사가 맞다. 만약 없다면 귀신의 신내림을 받은 것이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것과 같은 심판을 피하려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잘 배우고 가슴 깊이 새기고 그 말씀이 인도하는 길로 따라가야 한다. 자신의 탐욕을 성경을 인용하며 하나님을 포장지로 사용하여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꿈이라고 하는 자들은 무조건 멸망의 지름길로 달려가는 자들이다. 눈 크게 뜨고 말씀을 중심으로 믿지 않으면 모두가 다 그렇게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