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3:20-27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치마를 머리까지 올려 수치를 드러내시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언덕과 들판에서 음란하게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없이 참아 주시는 하나님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하: 정말 오래 참으신 하나님
인: 끝없이 음란하게 우상 숭배하던 예루살렘의 거룩한 자들
나: 내 육신의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오직 변함없는 진리를 간직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며 가르치고 선포하자.
이전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유다 남쪽 네게브의 성읍들이 포위를 당했고 멸망할 것이기에 왕과 왕의 어머니는 보좌에서 내려오라고 예레미야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이제 여인으로 비유된 예루살렘이 북쪽에서 오는 적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모습으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20절은 눈을 들어 북녘에서 오는 적들을 보라고 했다. "네가 돌보던 양 떼, 네가 그처럼 자랑하던 네 백성이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했다. 예루살렘은 높은 산지에 있기에 아직 정복당하지는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 양 떼들인 백성들은 이미 다 사라진 모습이다. 양 떼인 백성들이 사라진 뒤에는 그 지도자들도 아무런 힘도 없고 쓸모도 없는 것이다.
21절은 네가 손수 기른 자들이 너를 공격하고 지배하면 네 심정이 어떠 하겠느냐고 했다. 손수 기른 자들이란 바빌론이나 이집트를 말한다. 특히 바빌론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강성할 때에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며 지배를 했는데 이제는 그들이 거꾸로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한다. 그 고통이 마치 해산하는 여인처럼 온갖 진통에 사로잡히지 않겠느냐고 했다.
22절은 그 때에 너는 "어찌하여 내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가?" 하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것은 "네가 저지른 죄악 때문" 이라고 하신다. 죄악 때문에 치마가 들어올려지고 네 몸이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네 몸이란 원어에서는 발뒤꿈치라는 말인데 완전히 드러난 알몸을 완곡어법으로 말한 것이다. 이는 여인으로 비유된 예루살렘이 옷이 다 벗겨지고 성폭행을 당한 뒤 알몸으로 사슬에 매인 채 끌려가는 모습이다.
23절은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의 피부를 바꿀 수 없고 표범이 그 반점들을 다르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질문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유다의 죄악도 그와 같이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죄악에 익숙해진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도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음란하게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 버린 그 백성들은 절대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예루살렘의 음란함은 타고난 피부색이나 털의 무늬처럼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4절은 사막의 바람에 나부끼는 검불처럼 산산이 흩어 놓겠다고 한 것이다. 이는 시편 1:4절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도 같은 것이다. 25절은 "이것이 너희 몫이며 내가 너에게 정하여 준 배당이다" 라고 했다. 알곡이 몫이고 배당이어야 하는데 바람에 나부끼는 검불이 바로 몫이고 배당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너는 나를 잊어버리고 헛된 것을 믿었다" 는 것이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바알 신과 같은 우상을 믿었다는 것이다. 헛된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몫과 배당은 바람에 나는 겨 뿐이다.
26절은 그래서 치마를 얼굴까지 올려서 너의 수치가 드러나게 하겠다는 것이다. 치마를 얼굴까지 올린다면 얼굴만 빼고 온 몸이 다 드러나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다 벗고 부끄러운 짓 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예루살렘이다.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 앞에서 벌거벗고 부끄러운 부분을 다 보여줄 뿐 아니라 부끄러운 짓까지 한 것은 예루살렘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치마를 얼굴까지 올려서 그 부끄러운 부분이 다 드러나게 한 것이다.
27절은 예루살렘이 어떻게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원어의 순서대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간음하는 장면을 목격하신 것이다. 두번째는 "음란하게 소리 지르며" 인데 이는 발정난 말이 수컷과 교배하고 싶어서 소리치는 모습을 뜻하는 말이다. 먼저 목격하신 다음에 발정난 암말처럼 음란한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정말 역겨운 일을 보고 들으셨다는 것이다. 언덕과 들녘에서 저지른 역겨운 일이란 사악한 간음이란 뜻이다. 역겹다 사악하다는 말은 레위기 18:17과 20:14절을 보면 아내와 장모를 아울러 취하면 악행이라고 한 말에서 악행과 같은 말이다. 단순히 음란한 것을 넘어서서 이번에는 근친상간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언덕과 들판 같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유이기도 하지만 실제 당시 우상숭배 하던 예배의식이다. 언덕과 들판은 우상숭배의 장소들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부정한 예루살렘을 부르며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언제까지 그렇게 부정한 채로 남아 있으려느냐 라고 물으신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정말 오랫동안 그렇게 해 왔는데도 하나님은 참고 또 참으셨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음란하고 사악한 간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끝도없이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주와 심판의 말씀인 것 같지만 참고 또 참으신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을 나타낸 말이다.
우리는 그런 간음을 하지 않으니 거룩하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성경에서 간음으로 비유된 우상숭배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신의 육신이 시키는 대로 세상의 사치와 방탕과 세상의 부귀영화를 사랑한다면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온 역겨운 우상숭배이다. 예루살렘은 유다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종교 지도자들과 힘이 있는 권력자들이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거룩한 체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속까지 다 아시기에 그렇게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간직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따라간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의 육신의 생각을 따라 세상적인 가치들을 따라 간다면 하나님 앞에서 보란듯이 간음하는 우상 숭배자들인 셈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거룩한 척 할 수 없다.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