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6:5-6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외적 방해를 견디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을 견디었으며 그로 인해 겪은 내적 변화를 자랑한다.
이전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일에도 복음의 걸림돌을 놓지 않아서 우리 사역이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며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리 자신을 추천하며 오래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난을 겪는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청해서 고난을 겪은 일과 그로 인해 겪은 내적 변화를 자랑하는 내용이다.
첫번째 세가지는 바울 사역의 외적 환경이라면 두번째 세가지는 방해하는 외부 사람들에 의한 것으로 매맞음과 옥에 갇힘과 굶주림이다. 이 세가지는 바울 사역의 외적 조건을 설명하는 두번째 삼총사를 구성한다. 5절의 매 맞음이란 맞은 자리에 붉은 흔적이 남는다는 뜻이다. 고린도후서 11:24-25에 나오는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은 것을 뜻한다. 또 사도행전 16:23, 27에 나오는 로마인들에게 매를 맞은 것을 말한다.
이 말이 주먹으로 맞은 것도 포함될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아마도 고린도전서 4:11절에서 헐벗고 주먹으로 맞고 정처가 없다고 한 말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4:11절의 세가지는 현재형 동사를 나열한 것이기에 일상에서 계속되던 사도적 삶의 일반적인 상태를 묘사한 말이다. 하지만 고린도후서 6:5절의 내용들은 구체적인 사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따라서 매맞음이란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로마인들에게 세번 맞은 구체적인 사건을 가리킨다.
옥에 갇힘이란 감옥에 갇힌 것을 말한다. 그 다음 말은 새번역에는 난동이라고 했는데 개역에는 “요란한 것” 이라고 아주 애매하게 번역되었다. 어떤 이들은 고린도전서 4:11절의 주먹으로 맞고 떠돌아다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는 구체적인 소요사태를 뜻한다. 이는 사도행전 19:23절부터 나오는 폭동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수많은 무리가 모여 소동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이 세가지는 다른 사람들이 바울에게 가한 고난들이다. 바울은 이처럼 방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복음 전했음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 세가지는 외적 환경이나 방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온 고난이 아니라 복음 전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 자청해서 겪은 어려움이다. 세가지는 5절 뒷부분에 있는 수고와 잠을 못잔 것과 먹지 못한 것이다. 수고란 텐트 만드는 일을 강제노동 하는 노예처럼 힘들게 일하면서 복음 전하던 것을 말한다. 또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너무 힘들게 일하면서 또 복음을 전해야 하다 보니 잠을 못 잔 것을 말한다.
굶주림이라는 말을 경건과 사역을 위해 금식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수는 경건을 위해 금식했다기 보다는 사역하느라 식사할 틈도 없어 자발적으로 굶은 것으로 해석한다. 경건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 자청해서 굶은 것으로 보면서 전도 사역 때문이거나 후원을 받지 않으려고 자발적으로 궁핍을 감수한 것이다. 사역 때문에 자청해서 이러한 세가지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참으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6절부터는 자신들의 내적 변화를 자랑하고 있다. 앞에서 나온 9가지 어려움을 인내하면서 복음 전한 것이 다음 네가지 내적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는 것이다. 인내가 이러한 변화로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 놓았다는 것이다. 이 네가지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이다.
순결이란 단순히 성적 순결이 아니라 삶의 완전한 진실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도덕적으로 깨끗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항상 거짓이 없고 도덕적으로도 깨끗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4:2절에서 속임수를 버리고 간교하게 행하지 않았다는 내용과 연결되는 것이다.
지식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을 말한다. 고린도에 있단 그리스화된 유대적 배경에서 오는 지식에 반대하는 것이다. 지식이란 사람과 상황을 적절히 다루는 통찰력이라고 보기도 한다. 지식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의미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바울은 분명히 세속적인 지식의 반대인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지식은 세속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반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래 참으면서 계속 하나님의 지식으로 사역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참는 것이 인내이다. 이는 4절에 나온 “참는다” 또는 “견딘다” 라고 번역된 말과는 다른 뜻이다. 앞에서 나온 참는다는 것은 세상의 반대를 참는다는 것이고 여기서 나온 “오래참음” 또는 “인내” 라고 번역된 말은 아직도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사는 교회 안의 성도들을 참는다는 뜻이다. 우리도 역시 잘못한다고 무조건 비난하고 내버리지 말고 참고 변화되길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인내한 다음에 인상 찌푸리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진정한 인내가 아니다. 진정한 인내란 친절을 보여야 한다. 개역에는 자비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친절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어에 가까운 것이다. 대적하는 사람들을 참으면서 친절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구약 전체는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한없이 인내하시며 친절을 베푸신 역사이다. 우리의 인내는 친절한 태도로 나타나야 한다. 바울은 자신들의 이러한 네가지 내적 변화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이러한 내적 변화를 일으키게 한 네가지 원동력이 나온다. 그것은 성령과 거짓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의 감화” 라고 번역한 것은 의역한 것이고 원어는 그냥 “거룩한 영 안에서" 라는 뜻이다. 거룩한 영이라는 말이 성령이 아니라 거룩한 정신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문맥으로 볼 때 순결, 지식, 오래참음, 친절, 거짓없는 사랑 사이에 갑자기 성령이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거룩한 영이라고 말하면 항상 성령을 뜻한다. 우리는 왜 이 위치에 성령이 나오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을 말하다가 성령을 갑자기 넣은 것은 앞에서 말한 모든 덕목의 원천이 성령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시는가 아닌가가 거짓 선지자와 진짜 선지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앞에서 나온 네가지 내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랑가는 사람은 거짓없는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거짓없는 사랑이란 가면쓰지 않은 사랑이란 뜻인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낸 말이다. 예수님의 거짓없는 사랑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러한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