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11-12 우리는 주님을 경외함을 행동의 원칙으로 삼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지만 이미 하나님께 알려진 것처럼 너희 양심에도 알려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희에게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줘서 내면이 아닌 외적인 것만 자랑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전 말씀에서 우리는 몸을 떠나든지 머물러 있든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선한 일이나 가치 없는 모든 일에 대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는 주님을 경외함을 행동의 원칙으로 삼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지만 이미 하나님께 알려진 것처럼 너희 양심에도 알려지기를 바란다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희에게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자랑할 기회를 줘서 내면이 아닌 외적인 것만 자랑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11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한다. 10절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나야 한다는 말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낱낱이 다 드러나게 됨으로 우리는 주님의 두려움을 알면서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너희들” 이란 말을 쓰지 않고 “사람들” 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 일행은 주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 또 그분 앞에 설 때에는 모든 것이 숨김없이 다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너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지식으로 안다는 뜻이 아니라 분명히 확신한다는 뜻이다. 안다는 말은 단지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행동에 영향을 주는 확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에베소서 5:21절을 근거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것을 행동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며 그는 그의 행동이 그것에 의해 안내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바울이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행동의 원칙이다.
무엇을 그렇게 확신하고 행동하는가? 주님의 두려움을 그렇게 분명히 확신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주님의 두려움이란 무섭다는 뜻이 아니라 엄청난 경외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다수는 여기서 주님의 두려움이라는 말이 주님에 대한 존경심이나 경외감으로 설명한다.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그리스도에 대한 말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있기에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근거는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밝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10절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나 11절의 하나님 앞에서 환히 드러났다는 말이나 원어에서는 같은 말이다. 환히 드러났다는 말은 이미 완전히 끝난 일을 말한다. 하나님의 재판이 끝났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났고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을 이미 완전히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는 바울 일행의 마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열정을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바울 일행의 마음 속을 속속들이 다 아시고 인정해주시는데 반대로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어의 11절 뒷부분에서는 우리라고 하다가 갑자기 “나는 바란다” 라고 말한다. 새번역이나 개역은 원어의 나는 바란다를 우리가 바란다고 바꿔 번역했다. 원어는 ESV, NASB, NIV처럼 나는 바란다로 되어 있다. 갑자기 우리에서 나로 바꾼 것은 바울일행이 요청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바울 자신의 열정을 전하려는 것이다. 바울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도 환히 다 드러난 것처럼 여러분의 양심에도 환히 드러나길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바울 일행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걸 분명히 안다면 저들도 분명히 그리스도를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며 살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울 일행의 마음을 완전히 아는 것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바울 일행의 마음을 완전히 안다면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 일행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바울일행을 자랑하게 한다면 결국 자기 자신들을 치켜세우는 것처럼 오해할 까봐 12절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여러분에게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새번역에서 치켜 세운다고 번역하고 개역은 자천한다로 번역한 말은 함께 세운다는 뜻이다. 친구를 소개하고 추천하거나 자랑하기 위해 곁에 함께 세우는 장면을 나타내는 말이다. 언제 자기자랑을 했길래 “또 다시” 라고 말하고 있을까?
이 말은 고린도후서 3:1에 나온다. 이는 2:14-17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뿌리는 역할을 맡았는데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뒤에 나온 말이다. 하나님께서 보낸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한다고 한 것이 자기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시켜서 한 것이니 자기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5:12절에서 또 다시 자기자랑이 아니라고 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검증을 받았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왜 자기자랑이 아닌가 하면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을 보시고 합격판정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타내는 것이지 자기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일행의 마음 안에 있던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체험했기에 그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증거했던 것이다.
바울 일행은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랑할 기회를 준다고 했다. 이는 바울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 일행은 단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으려 한 것이다. 그러다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던 바울일행 안에 담겨있는 보물을 자랑하고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안에 담겨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형제자매들이 발견하고 그들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자랑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역서 상대의 마음에 담겨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랑해야 한다.
이는 겉모습만 자랑하던 사람들을 대항하게 하려는 것이다. 겉이나 외모로 번역된 말은 원어에서는 얼굴이란 뜻이다. 얼굴과 대조되는 말은 마음이다. 새번역은 겉과 속으로 번역했다. 얼굴이란 4:18절의 보이는 것이고 5:16절의 육신을 따라 라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혈통이나 지위나 탁월한 말솜씨나 환상과 계시의 경험들 같은 것을 내세우며 자랑하던 바울의 대적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고 말한다. 반면에 마음이란 10절에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환히 드러나야 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있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경건과 거룩을 자랑하던 사람들을 대항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속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경험한 우리가 먼저 우리 속 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 사랑을 자랑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들의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기지 않은 사람들에게 속지 않게 되는 것이다. 먼저 우리 안에 담긴 보물을 보여주지 않아서 한 번도 그러한 것을 본적이 없다면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는 사람들에게 속기 마련이다. 교회는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고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어 서로에게 비춰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런 교회는 그런 형제 자매들을 보고 그 사랑을 깨닫고 거짓 사랑에 속지 않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