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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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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Word

고린도후서 4:12-13

기록된 말씀과 같이 말할 수 밖에 없다

빛이 새어 나오는 질그릇 · 고린도후서 4장

2026. 10. 13. · 안정섭 목사 · 고린도후서 4장 강해 설교

고린도후서 4:12-13 그 결과 죽음은 우리 안에 작동하고 있고 생명은 너희 안에 작동되는 것이고 우리는 시편 기록자와 같은 믿음의 태도를 가졌으니 우리도 기록된 말씀과 같이 말할 수 밖에 없다.

이전 말씀은 우리는 추격을 당해도 버려지지 않고 잡혀서 땅에 던져져도 죽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데 우리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 우리 살아있는 자들이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지고 그 결과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결과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같은 믿음의 영을 가졌으니 기록된 말씀과 같이 우리도 역시 믿고 역시 말한다는 내용이다.

12-15절은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의 과정과도 같은 죽음에 날마다 넘겨져 예수의 생명이 드러난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12절은 그 결과라는 말로 시작한다. 8-9절과 10a, 11a에 나타난 내용의 결과라는 뜻이다. 그것을 요약해서 죽음이 우리 안에서 작동된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죽음이란 단순히 바울을 죽음의 그늘 안으로 이끈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일종의 죽음의 방문카드를 남긴 경험들 즉 갈라디아서 6:17절의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과 고린도후서 4:16절의 겉 사람은 낡아진다는 것을 포함한다.

작동된다는 말을 수동태로 번역하기도 한다. 원어의 형태가 수동태나 중간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우리 안에 작동되게 된다는 의미로 보면서 하나님이 작동시킨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어는 중간태이기에 죽음이 작동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 형태는 중간태이지만 의미상으로 능동태로 해석하기도 한다. Bauer사전은 중간태는 비능동이며 항상 비인칭적 주어를 가리키기에 의미상 능동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비인칭 주어이기에 형태는 중간태이지만 능동태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도록 참여한다는 의미로 본인은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렇게 읽는 것이 비유적인 표현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 일행 안에는 죽음이 작동하고 있지만 그러나 너희 안에는 생명이 작동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고린도 교인들이 경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바울 일행이 죽음의 위협 가운데 복음을 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이 고린도 교인들 안에서 작동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바울 일행은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고난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생명이 작동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는 뜻이다.

원어에서 죽음과 생명 앞에는 관사가 있다. 이는 앞절의 죽음과 생명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은 11절에 나온 몸의 죽음이고 생명도 역시 11절에 나온 예수의 생명이다. 이러한 관사의 의미를 살린다면 바울 일행은 생명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바울 일행의 육체의 고난과 죽음으로 전한 예수의 생명의 복음이 너희 고린도 교인들 안에서 역사한다는 뜻이다.

앞에서 복음 전파로 인해 당하는 일들과 죽음이 바울 일행 안에 작용되면 생명이 너희 안에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 안에 담긴 예수의 생명은 항아리에 절반쯤 차 있어 그냥 두면 잘 안보이는 것과도 같다. 항아리가 흔들려 뚜껑이 열리고 깨질만큼 흔들거려야 그 속에 담긴 보물이 보이는 것이다. 때로는 항아리가 넘어지듯 했지만 깨지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안에 담긴 보물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은 사람들에게 비추어지고 그들도 그 영광의 빛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13절에서 바울은 앞에서 말한 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하고 있다. 그것은 기록된 것과 같이 똑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면서 믿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똑 같은 믿음의 영이란 성령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영적 태도나 성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린도 성도들의 영이 아니라 시편 기록자와 같은 믿음의 태도를 공유한 것이다.

바울은 같은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면서 믿는다고 한 것은 시편 116편 기록자와 같은 믿음의 태도를 갖고 믿는다는 뜻이다. 바울 일행도 믿었기 때문에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9:16에서 바울은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 했다. 자신의 마음 속에 담겨있는 보물을 말로 전해서 보게하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필요한다. 그 지식이 우리에게 단순히 글자로 다가오면 안된다. 그 안 담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봐야 한다. 그 빛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 다른 사람도 그 빛을 발견하고 간직하게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고 듣고 믿게 되면 그 다음은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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