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3:16-18 그러나 누구든지 주님께로 돌아서면 너울이 벗겨지고 주님을 직접 뵐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우리 모두는 너울이 벗겨진 채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고 그 영광에서 시작하여 그 영광에 도착하게 되는 것인데 이는 주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전 말씀은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진 이유는 오늘날 옛 언약을 읽는 자에게도 그 너울이 남아있는데 그 너울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사라지는 것이기에 모세의 글이 청중들에게 읽혀질 때 청중들에게도 덮여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러나 주께로 돌아가면 그 너울이 벗겨지고 주님과 함께 있으면 자유가 있으며 우리도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주님을 바라본다는 내용이다.
16절은 원어에서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15절에서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 너울이 덮여있으나 라고 한 말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이 벗겨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이고 강조된 단어는 언제든지 라는 단어이다. 주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이 벗겨진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 34:34절에도 나오는데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여호와께서 말하기 위해서 갈 때는 언제든지 라는 뜻으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조건으로 쓰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 단어를 한번 주께 돌아서서 한번 주님과 대화하기 시작하면 언제든지 라는 조건으로 바꾸었다. 또 출애굽기에서는 모세에게만 해당한 말을 모든 사람에게로 적용했다.
또 한가지 다른 점은 출애굽기 34:34절에도 너울이 벗겨진다는 말이 있는데 출애굽기에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고 모세가 그 너울을 벗는데 참여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벗도록 시키셨고 모세는 하나님 뜻에 따라 벗는 일에 참여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3:16절에서는 현재형이고 벗겨졌다는 뜻이다. 고린도후서에서 쓰인 수동태는 흔히 신적 수동태라고 말한다. 하나님에 의해 벗겨졌다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서는 순간 즉각적으로 제거해 주신다는 뜻이다. 이는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통째로 집어 올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잠시 걷어 얼굴이 나오게 했다가 다시 가린다는 뜻이 아니라 완전히 벗겨서 내던져 버리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주께로 돌아서는 사람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 포함된다. 유대인들에게 여호와께 돌아서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욕을 하며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옛 언약을 버리고 영원히 빛나는 새언약의 영광으로 돌아서라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서 너울 또는 수건으로 번역한 말은 출애굽기에서는 모세의 얼굴을 가린 너울이지만 여기서는 유대인들과 그 밖의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있던 영적 어두움을 상징한다.
16절에서 “주” 라고 한 말은 황제나 노예의 주인을 뜻할 수도 있기에 17절에서 “주는 영이시다” 라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원어대로 정확히 번역하면 “그 주는 바로 그 영이시라는 뜻이다. 바로 모세가 주께 돌아설 때마다 너울을 벗으라고 하시던 바로 그 주의 영이란 뜻이다. 요한복음 4:24절에서도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고 한 말도 역시 하나님은 바로 그 영이시라는 뜻이다. 이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바울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함께 했던 영을 동일시하는 말이다.
이어서 바로 그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 했다. 이는 너울을 쓰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가져오는 율법은 사람들을 죄의 노예로 만들었고 모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래서 그들은 영광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너울을 쓴 것이다. 그러나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영이 그 영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주시고 너울을 쓰지 않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주라는 말을 여호와 하나님만 가리킨 것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바울은 일차적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유대주의자들에게 속아넘어가 있는 자들과 그러한 유대주의자들에게 출애굽기에 나타난 모세와 하나님을 가지고 논쟁한 것이다. 또 바울은 주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게 사용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 주는 그 영이시다 라는 짧은 말 속에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그 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결국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여호와께로 돌아서라는 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라는 말이다.
12절의 우리는 바울일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18절의 우리 라는 말에는 모두라는 말이 붙어 있다. 이제 고린도후서가 낭독될 때 그것을 듣고 있는 모든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바울을 대적했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선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18절에서 움직이는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 “벗어버리고,” “바라봅니다,” “변화하여” 이렇게 세 개가 나온다. 이 세 개 중에 중심이 되는 동작은 “변화하여” 이다. “벗어버리고” 와 “바라봅니다” 는 변화하기 위한 조건들이다.
따라서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 목표이다.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시작은 주님을 만나 주님의 빛나는 영광을 체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주님을 닮은 빛나는 영광의 모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개역에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라고 번역한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나는 것이 바로 영광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 때부터 시작하는 것에 영광에서 시작하여 라는 말의 의미이다. 또 영광에 이른다는 말은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뜻이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 그분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 그분을 닮기까지 변화되는 것을 영광에 도착한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것은 너울을 벗어야 하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하나님께서 너울을 벗겨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너울을 벗은 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을 때 그 영광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돌아가서도 그 영광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너울을 벗은 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우리도 그 영광을 받아서 빛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영광을 바라본다는 말은 원어에서는 주의 영광을 받아서 거울로 비춘다는 뜻이다. 우리가 너울을 벗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다보면 우리는 거울이 되어 그 영광을 우리 몸에 간직하게 되고 그 영광을 사람들에게 비추게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몸에 담아 비출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우리 모두 다 서로에게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서로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바라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이 되어 그 영광을 서로에게 비추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본래의 지음 받은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전에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희미한 영광도 사람들은 눈이 부셔서 계속 쳐다보지 못했다 했다. 그러나 우리는 햇빛보다 더 밝게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 영광스런 존재이다. 그 영광을 우리 몸에 받아 그 영광을 서로에게 비출 수 있는 귀한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기까지 계속해서 닮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 영광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위로하신 그 사랑이다. 우리도 그 사랑을 닮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는 것이다.
우리 서로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용서가 있는지 바라봐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태도가 있다면 그 영광이 시작된 것이다. 그 영광을 서로에게 비추어주며 서로의 모습을 보고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